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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마음의 반사신경이 평강을 조각낸다_태승철

by 태승철 · 16-05-23 11:05 · 8,290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것이 거듭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큰 결과가 초래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 삶에서 에덴의 기쁨이 조각 나는 엄청난 일이 마찬가지로 엄청난 이유에서 비롯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름 아닌 마음의 반사신경으로 인한 것입니다. 사소한 모든 것과 사건과 사람과 상황에 대한 우리의 반사적 반응을 잡아야 합니다. 그를 위해 마음의 무조건적 반사를 조건 반사로 바꾸는 것입니다.


<녹취문>

마음의 반사신경이 평강을 조각낸다

(사무엘하 6:1~11)

 

 

1.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2.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3.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6.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마음의 반사신경이 평강을 조각낸다>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마음의 반사신경이 평강을 조각낸다

반사(反射)적인 동작에는 무조건 반사와 조건 반사가 있습니다. ‘무조건 반사는 신 김치를 먹었을 때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이고 조건 반사는 이러한 자극이 되풀이 되어서 신 것을 눈으로 보기만 해도 입에서 침이 나오는 상태입니다. 이 두 반사의 차이점은 무조건 반사는 대뇌가 관여하지 않고 척수나 연수에서 반응이 일어나는 것에 비해 조건 반사는 대뇌가 개입을 하게 됩니다. 눈으로 신 김치를 보는 것과 입에서 침이 나오는 것은 물리적 차원에서는 상관이 없지만, 뇌가 경험을 기억하여 눈으로 신 김치를 보면 침을 내보내도록 명령하게 됩니다. 이러한 조건 반사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러시아의 생리학자인 파블로프입니다.

개에게 먹이를 주면 침을 흘립니다. 여기에 종소리라는 조건을 부여합니다. 개가 종소리를 들을 때에 먹이 주기를 반복하다보면, 나중에는 먹이가 없이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립니다. 이렇게 조건을 부여해서 반응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 조건 반사인데, 무조건 반사와 조건 반사는 유기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무조건 반사로부터 조건 반사로의 변화가 가능한데, 무술이나 격투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변화가 꼭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눈앞에 느닷없이 무언가가 확 날아오면 우리는 무조건 반사로 저절로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며 피하게 됩니다. 그런데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서 주먹이 얼굴로 날아와도 피하거나 맞더라도 눈을 뜬 채로 유지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상대방의 주먹이 날아오는 것을 조건으로 삼아서 역공을 하는 조건 반사로 만드는 것입니다. 즉 주먹을 피하면서도 내 손은 무의식적으로 공격을 가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격투기 선수들이 시합하는 것을 보면 너무나 빈번하게 조건 반사적인 동작에 의해서 공격이 일어나고 승패가 갈라집니다. 어제 예배를 드리고 와서 점심을 먹고 TV를 잠깐 틀었더니 마침 격투기 헤비급 챔피언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브라질 선수가 챔피언인데 쫓아다니며 공격을 합니다. 도전자였던 미국의 도전자는 도망 다니다가 주먹을 한 번 쭉 뻗었는데 그것을 맞은 챔피언이 넉다운이 되어버렸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평강이 유지되지 않고 항상 기뻐하라고 했던 사도 바울의 말처럼 기쁨이 유지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마음의 반사 신경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반사적인 움직임이 나타나기 때문에 믿음의 맥이 끊어집니다. 믿음이 이어지지 않으면 그 뒤로 이어지는 결과로 우리 삶에서 평강은 조각나 버리고 맙니다.

유전 죄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 마음의 반사 신경입니다. 주먹이 날아올 때에 눈을 감듯이 타락 전에는 없었던 반사적 반응이 타락 후에 생기게 되었는데, 우리 마음은 반사적으로 물건이나 사건이나 상황이나 사람을 대할 때에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손님들이 강릉에 와서 바다를 보면 !’라고 감탄을 하는데 마음의 반사 신경에 의해서 나오는 반응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화나게 한다면 ! / , 왜 이래! / 뭐라고?’라는 소리가 반사적으로 나옵니다. 요즘 뉴스에 잔혹한 살인사건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들이 다 마음의 반사 신경을 죽이지 못해서 반사 신경의 체질이 강화되고 극대화됨으로서 나타나는 일들로 마귀의 농간입니다.

만약에 제가 손님과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함께 커피를 마시다가 느닷없이 주먹을 휘두르는 시늉을 한다면 상대방은 깜짝 놀라서 커피를 다 쏟고 말 것인데 마귀가 이런 일을 합니다.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상황과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반사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삶의 평강이 커피가 다 쏟아지는 것처럼 다 흐트러지게 되는데 이 마음의 반사 신경, 즉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이 생길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봅니다.

요즘 뉴스에 나오는 사건들을 보면서 반사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으로 인해서 내 마음의 평강이 깨집니다. 자녀의 성적표를 보면 성적이 안 좋은 것도 나쁜데다 반사적으로 반응해서 내 마음의 평강까지 깨져나가게 하는 마귀가 정해 놓은 코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조건 반사를 조건 반사로 바꿀 수 있어야만 합니다.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만 듣고도 침을 흘리게 되는 조건 반사에서 대뇌가 반응에 끼어드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한 가지 조건이 끼어들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물건이나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과 연관된 조건에 반응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은 기랏여야림의 옛 이름이었던 바알레유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이 전쟁에 나갔다가 죽고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법궤가 가는 곳마다 다곤 신전의 신상들이 깨어지고 화와 재앙이 생기게 되자 블레셋 사람들이 젖 먹이는 암소 두 마리에 법궤를 실어 돌려보냈는데, 벧세메스의 사람들이 법궤의 안을 들여다보고 많이 죽게 되었고 다시 옮겨져서 기랏여야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70년 세월이 흐르고 다윗이 왕권이 확립되자 법궤를 옮겨오는데 다시 오늘 본문에서 말한 것과 같은 불행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당시에는 손자도 아들이라고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아비나답의 아들로 기록된 손자 아효와 웃사가 법궤를 싣고 아효는 궤 앞에서 갈 때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라고 하는데 소들이 뛴다.’는 것은 원어로 소들이 돌부리 같은데 걸려서 발이 엉키고 쓰러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타작마당은 널찍한 곳이어서 소나 말들이 타작기구를 어깨에 메고 타작을 하기 때문에 소가 걸려 넘어질 수가 없습니다. 소가 끄는 수레가 돌부리에 걸려 덜컹거릴 수는 있지만 소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이건 일부러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격동시키므로 소가 넘어질 듯이 비틀거리자 수레의 법궤가 떨어질까 반사적으로 웃사가 손으로 잡았는데 이를 이유로 하나님께서 죽이십니다. 다윗은 이 모습을 보고 분노하고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을 포기하고 오벧에돔의 집에 두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웃사를 죽이셨을까요?

 

우선 법궤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법궤를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의 만군은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천사를 일컫기도 하고, 시편 34편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표현하는데 하나님의 명령아래에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삼라만상과 하늘의 천사까지 모든 것을 명령아래 두고 계시는 분이 만군의 하나님입니다. 즉 법궤는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지고 있는 것을 기억하게 하는 상징물이었습니다.

법궤의 뚜껑에는 두 그룹이 형상화 되어 있고, 그 법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돌판이 들어있었습니다. 선민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 법궤를 물건 취급하듯이 수레에 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정하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말이 뜻하는 바대로 이 세상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있는데 이 법궤가 존재하는 것은 만물, 즉 우리의 삶에서 겪는 모든 사람, 모든 상황, 모든 사건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법궤를 어깨에 메라고 한 것은 물건을 취급하듯이 해서는 안 되고 그 법궤 앞에서 내가 하나님에 의해서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임을 뜻합니다. 그런데 법궤 안에 말씀의 돌판이 들어있어요. 그러므로 말씀의 돌판이 들어있는 법궤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합치면 만물 속에 하나님의 말씀(생각)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법궤에 대한 태도를 가르침으로 내가 삶에서 만나게 되는 만물에 대한 태도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돈을 대한다면 법궤를 대하는 것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법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의 돌판이 들어 있는 것처럼, 지금 손에 쥐고 있는 돈에도 하나님의 말씀(생각)이 들어있는데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만물을 대할 때 법궤를 대하듯 해야 합니다. 그러나 웃사는 그것을 모른 채 법궤를 물건처럼 여겨서 반사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우리도 돈이 벌리면 좋고 안 벌리면 나쁘다고 반사적으로 반응합니다. 누가 내 돈을 떼어먹었더라도 이 사건은 법궤와 같아서 돈에도 하나님의 생각은 담겨 있기 때문에 그렇게 반응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시고 만물 만사에 당신의 명령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취업이 안 되는 것도 법궤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법궤의 하나님이 만군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취업이 안 된 이 일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건에 말씀이 들어있기 때문에, 만사를 대할 때에 마음에서 반사적으로 판단을 하는 것이 우리의 평강을 깨뜨립니다. 웃사가 반사적으로 법궤를 붙든 것은 내가 법궤를 보존할 수도 있다는 뜻이고 내가 취급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다윗의 분노 또한 반사적인 것이었습니다. 법궤에 얽힌 이야기 즉 블레셋이 법궤를 탈취했다가 다곤 신전의 신상이 다 깨어져 나가고 법궤가 가는 곳마다 재앙이 임한 얘기들을 다 들었으므로, 다윗은 지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상태에서 법궤를 옮겨 오는 것이 삶 전체에 대한 순풍이 불 것이라는 굉장한 기대에 차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업을 할 때에 순조로움을 기대하지만 이 기대가 무산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기대가 꺾일 때에 우리 마음은 분노하게 되고, 무엇에 대해서 내게 유리하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우리가 만물을 대하여 갖게 되는 반사적인 반응인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내게 유리하게 돌아가기를 바라는 반사적 반응을 보이는데, 그러나 우리는 만물을 대할 때에 그것들에 대해 명령을 갖고 계시고 생각과 판단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에 반응하는 것처럼 만물에 대해 명령을 가지신 하나님께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법궤의 기능이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법궤가 존재함으로 내가 대하는 모든 만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신가에 대해서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취업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모른 채 그저 취업을 못하면 안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평강이 깨지는 것입니다.

본래 이 법궤가 있었던 지성소에 우리 마음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번제단을 거쳐야만 했는데, 선악과 사건 이후에 무조건 반사적으로 기대하거나 분노하며 살아왔던 우리의 성향은 죽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 번제단의 완성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졌으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언제나 기억해야만 합니다. 반사적으로 반응하려고 할 때마다 나는 죽은 자임을 기억하며 이 반사 신경을 죽일 때에 내 마음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평강이 유지되고 에덴이 유지되고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만물에 대한 명령과 생각들에 의해서 내가 취급이 되면서 뜻을 행하시게 되고 또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나와 상관없이 이루어 가시면서 에덴의 삶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문제는 십자가로 내 마음의 반사 신경을 잡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무조건 반사적인 판단과 기대가 죽게 하시고,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에 반응하듯이 오직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로만 마음이 올라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