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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홈리스 억만장자, 홈리스 하나님_태승철

by 태승철 · 16-05-28 12:08 · 7,956

세계 억만장자의 순위 안에 집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억만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니죠. 오히려 억만장자이기 때문이겠지요. 집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집, 곧 성전에 관한 오해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이 머무실 집은 없습니다. 지을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고,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본래 이 땅 위에선 홈리스이신 하나님에게 굳이 불필요한 집을 지어 드리려는 시도는 단지 이 땅을 향한 우리의 집착과 욕망의 간접적인 표현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홈리스 억만장자, 홈리스 하나님

(사무엘하 7:1~29)

 

 

1.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3.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

4.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6.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7.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오늘 말씀 중심으로 <홈리스 억만장자, 홈리스 하나님>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홈리스 억만장자, 홈리스 하나님

2007년 가을에 미국의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을 졸업한 청년이 대학 동창생의 부름을 받고 무작정 샌프란시스코로 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두 청년이 당장 직업은 없고 돈이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마침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미(全美)산업디자인협회가 주관하는 컨퍼런스가 열리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외부인들로 인해서 호텔이 꽉 차고 방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자신들이 거하는 공간의 일부를 그들에게 제공해주고 돈을 벌자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곧바로 에어베드 세 개를 구매하고 아침식사를 제공한다는 웹사이트를 만들었습니다. 그 사이트 이름이 말 그대로 “air bed and breakfast.com”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세계에서 제일 큰 숙박 공유 서비스인 Airbnb’의 시작입니다. 이 사업을 시작한 청년의 이름이 브라이언 체스키(Brian Chesky)였고 그의 동창생이 조 게비아(Joe Gebbia)입니다. 2008년에 이들이 창업을 하여 사업을 시작했으니 이제 8년 정도가 되었는데 이 회사의 기업 가치는 255억 달러로 29조원정도 된다고 합니다. 세계 호텔업의 1인자는 힐튼 호텔입니다. 그 힐튼의 시가 총액이 220억 달러정도 되는데, 8년 된 Airbnb의 기업 가치가 255억 달러나 되는 것입니다. 힐튼 메리엇 하야트 같은 세계의 호텔들을 다 제쳐버린 것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Airbnb의 창업자인 브라이언 체스키가 홈리스라는 점입니다. 이 사람이 특별하게 재산을 다 사회에 기부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사람의 개인 자산은 19억 달러로 2조가 넘는데 집을 사지 않고 Airbnb가 전 세계에 34,000개의 집이 가입되어 있는데 집이 비거나 빈 공간에서 동창생과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들의 집의 소파나 남는 방에서 자거나 휴가로 인해서 집이 빌 경우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 사료를 직접 먹어 본다(eating your own dog food)”는 미국의 속담처럼 직접 해봐야 알기 때문에 이 억만장자가 홈리스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억만장자 홈리스가 이 사람 뿐만이 아닙니다.

서울에도 세 번씩이나 찾아와서 박 원순 서울시장을 만나서 서울 명예 시민권도 받았던 베르그루엔 홀딩스의 이사장인 니콜라스 베르그루엔(Nicolas Berggruen)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집을 사지 않고 세계 각국의 호텔에 머물면서 보다 나은 도시를 위한 도시개혁 프로젝트에 관심을 쏟고 서울에 대한 관심이 커서 그에 대한 고마움으로 명예 서울 시민권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억만장자들이 홈리스로 살고 있는 것과 같이 억만장자를 넘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는 홈리스로 살고 계시며 그러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8:2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며 세상의 만물이 있게 하신 분인데 이 땅에 집을 가지려고 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집으로 생각하던 성전을 허물라고까지 말씀하시며 허물어 질 것을 예언하시고 당신의 부활하신 몸으로 성전의 본래의 기능을 대체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요14:2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 하시며 하나님의 집은 하늘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미 하늘에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우리가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문제 삼고 계신 것은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우리의 거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처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곁에 우리의 거처를 마련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 거처를 마련하시기는커녕 머리 둘 곳도 없이 지내다가 하늘로 가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당신이 머물 집을 원하지 않으시고 이미 하늘에 집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성경 속의 성전이나 오늘날의 예배당도 하나님께서는 집으로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거할 집을 지을 수도 없고 지을 필요도 없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집이라 불리는 성전을 지으려고 하는 행동은 근원적으로 보자면 이것은 우리의 욕심의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일이 잘되기를 바라고 이 땅에 마음이 붙으려고 할 때 나도 모르게 이 땅에서 궁극적이고 영원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본능이 마음에서 움틀 때에 바로 이 땅에 하나님의 집을 지으려는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왜냐하면 선민으로 내가 잘 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그 잘 되는 상황을 유지하고 싶기에 하나님의 집을 지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텐트나 일시적인 숙박 장소에 모시는 대신에 영구히 거하실 집을 지으려고 하는데, 지금 누리고 있는 평안도 영구해질 것이라는 연상 작용에 의해서 욕망이 표출되는 것뿐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시며 아버지의 집은 하늘에 있음을 천명하셨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던 성전이 허물어 질 것을 예언하셨으며, 성전을 성전 되게 하는 본질적인 기능은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끌어들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하나님의 집을 이 땅에서 지으려고 하는데 이 땅에 붙으려는 우리 마음의 욕망의 표현이고 어찌 보면 불신앙으로 나가려는 찰나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서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라고 합니다. 다윗이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집을 지어 드려야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자 나단 선지자도 그 생각을 좋게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윗의 소원대로 하면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여긴 것인데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에게 나타나셔서 다윗의 마음을 거절하시는데 마치 가시가 돋친 것 같이 냉소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다윗의 호의에 대해서 비꼬시는 것 같고 심사가 비틀어지신 것 같이 말씀하십니다.

5~7절에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집을 지어드리자고 말한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 네가 나를 위해서 집을 짓겠다고? 지난 500년 간 너희 조상들을 애굽에서부터 끌고 여기까지 올 때 어느 지파 누구에게 백향목으로 내 집을 지어 달라고 했느냐? 네가 무슨 내 집을 짓겠다고 하느냐?’라고 하시는데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것이 서운해서 하시는 말씀처럼 들리는데 그런 일을 시킨 적이 없고 네가 그 일을 할 필요도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조차도 우리 마음의 유전 죄의 체질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에서 지금의 평안함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움튼 것을 보셨고, 다윗 자신도 몰랐던 그 속마음에 대해서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지금 내 집을 짓겠다는 것은 상황이 평안하므로 이 평안한 땅의 상황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움트고 있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집과의 관계에서 너와 내가 얘기를 하자면 이런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집은 추위나 더위나 비바람을 막고 먹고 살기 위하여 짓는 건물인데, 예수님께서 풍랑 위의 배위에서 주무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인 요건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집의 필요성의 방향이 거꾸로 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11절에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라고 하신 것처럼 다윗이 하나님께 집을 지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기껏 양이나 쫓아 다녔던 목동에서 왕으로 세우시고 지금 다윗의 집안을 세워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이 말씀에 대해 27절에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집을 지으시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반대로 마음이 이 땅에 붙어서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이러한 죄악 된 마음의 공범으로 만들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자꾸만 건물을 지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집은 하늘에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거처를 염려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처를 염려하는 이유는 이 땅에 마음을 붙이고 싶어 하는 마음을 거꾸로 속이면서 하나님께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13절에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생깁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역대상 22장에서도 다윗이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집을 짓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나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하나님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성전은 완전히 개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집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름과 존재의 관계를 알아야만 합니다.

 

강남 터미널에 가면 전국으로 가는 버스라인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서울-부산이라는 티켓을 사면 부산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습니다. 혹은 여수행 티켓을 사면 여수로 갈 것인데 하나님의 이름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오게 되면 마음은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장소인 하늘로 가는 티켓이 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오래오래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집을 내 곁에 지으려고 하지만, 오히려 성전의 의미는 우리의 마음이 이 땅에 붙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를 위해서 하늘을 향해 가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지도 않으시고 필요도 없는 하나님의 집을 지으려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땅에 붙은 증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으로 알고 있던 성전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이 적힌 티켓을 발매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은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이 세상에 있는 온갖 존재들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곳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본토 친척 아비집이라는 존재가 있었고 그 존재의 이름이 마음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아내라는 존재가 있고 사래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어와 있었고, 독자라는 존재가 있고 그 독자를 가리키는 이삭이 마음에 들어와 있었는데 그것들을 다 지우는 것이 믿음이었습니다.

성전은 이와 같이 내가 마음 안에 둔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들의 이름을 다 지우고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이름만 담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담아야만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가 계시는 하늘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기 전에도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을 새겨 넣으면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로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성전이었습니다. 즉 성전은 터미널이고 플랫폼이지 하나님이 살고 계신 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지고 그 본래의 성전의 기능과 의미가 주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도달하기 위해서 성전에서 번제를 통해서 이 땅의 존재를 가리키는 이름들이 마음에서 죽어야만 했는데 그 번제의 완성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돈이라는 존재가 있으면 그 존재를 마음에 담는 이유는 그 존재에 도달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로 만들어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윗에게 하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예언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한 다윗의 마음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대하신 이유는, 다윗도 예외 없이 인간으로서 이 땅에 마음을 붙이고자하는 원죄를 타고난 죄인으로서의 욕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만 했다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냉소적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사시는 집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집으로서의 성전을 그 아들 솔로몬이 짓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이 사시는 집을 짓겠다는 생각은 잘못 된 것이었습니다.

억만장자인 홈리스가 있듯이 창조주 하나님께서도 이 땅에는 자신의 집을 두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이 땅에 머물게 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이유는 마음이 땅에 붙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성전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땅의 성전의 기능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을 마음에 남게 하는 것입니다. 부산행 티켓을 가지면 부산으로 가는 것처럼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을 가짐으로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게 하려는 것이 바로 성전의 의미인 것입니다. 다시는 우리 입에서 하나님의 집을 이 땅에 짓겠다는 말이 나와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참 성전이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우리 마음이 하나가 됨으로서 하나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