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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마음이 피난가면 육체는 장갑 된다_태승철

by 태승철 · 16-06-24 07:25 · 8,305

"나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몽당연필입니다. 나를 사용하신 하나님이 여러분도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마더 테레사의 이 말씀을 성경에 충실하게 바꿔 보면, '나는 하나님이 손에 끼신 장갑입니다'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갑이 되어 쓰임 받는 일이 특정한 사람들에게 국한 될 수는 없습니다. 선택 받았다면 누구나 하나님의 장갑이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진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선택받음의 기준인 마음의 피난이 없기 때문이지요.

마음이 피난가면 육체는 장갑 된다

(사무엘하 22:30~51)

 

 

30.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31.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진실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32.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33.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34.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35.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36. 주께서 또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37.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내 발이 미끄러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38. 내가 내 원수를 뒤쫓아 멸하였사오며 그들을 무찌르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였나이다

39. 내가 그들을 무찔러 진멸시켰더니 그들이 내 발 아래에 엎드러지고 능히 일어나지 못하였나이다

40. 이는 주께서 내게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티는 자를 내게 굴복하게 하셨사오며

41. 주께서 또 내 원수들이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내게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버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마음이 피난가면 육체는 장갑 된다>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마음이 피난가면 육체는 장갑 된다

목수 아저씨들은 면장갑을, 어머니들이 설거지 하실 때에는 고무장갑을 낍니다. 추울 때에는 털장갑이나 가죽장갑을 끼고, 뒷골목 조폭들은 싸울 때에 가죽장갑을 낍니다. 세상 사람들은 장갑이 이것만 있는 줄로만 알지만 선민에게는 생살장갑이 있는데 육체라는 장갑입니다. 선민은 누구나 다 육체의 장갑이 되어서 살아야 하는데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가 나는 하나님 손에 붙잡힌 몽당연필입니다. 나를 사용하신 하나님이 여러분도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는데 기독교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테레사 수녀 같은 분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신 사람은 반드시 사용하십니다. ‘몽당연필이라는 비유는 연필도 끝까지 아껴서 써야 하는 환경적 여건을 표현한 말일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을 성경적으로 비유해서 표현하자면 장갑입니다.

11:20절에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하신 말씀에서 하나님의 손은 원어상 하나님의 손가락입니다. 같은 의미로 출31:18절에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쓰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신 분이므로 그 육신 자체가 다 말씀입니다. 즉 이 세상에 예수님이 사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말씀을 쓰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손가락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셨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돌판에 십계명을 쓰신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말씀이 쓰이는 과정으로 사신 공생애는 하나님의 손가락이 말씀을 쓰신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과 하나님은 일체시지만 다른 인격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몸은 하나님의 장갑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손가락에 대한 또 다른 비유는 시8:3절에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라고 하십니다. 창조 때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손가락으로 만드셨지만, 창조된 세계에서는 선민의 육체가 장갑이 되어서 하나님의 손가락이 계속 활동하시기를 바라십니다.

 

기독교라고 하는 말은 사실 맞는 말이 아닙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입니다. ‘자를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종교의 신은 사람들이 선택한 신이고 심지어 만들어 낸 신입니다. 쓰임 받는 것도 사람들에 의해서 신이 쓰임을 받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 안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사람을 쓰시는데 문제는 기준입니다. 기준이 모호하면 선택 받은 의미도 우리 안에서 활성화 되지 못하고 쓰임 받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쓰임 받음은 선택 받음에 뒤 따라오는 단계입니다. 선택 받았으면 반드시 쓰임 받게 되고, 쓰임 받음이 없는 것은 곧 선택 받지 못한 것입니다.

사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여러 신들 중에서 하나님을 신으로 선택해서 들어온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쓰임 받는 것이 아닌 내가 하나님을 쓰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신학교총장 학장 교수 신부 사제 추기경 교황 등의 직책과 무관합니다. 그렇다면 선택 받음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다윗의 노래나 신약성경 곳곳에서 명확한 선택 받음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3:18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는 말이 나옵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란 19절에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땅의 일을 생각도 하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선택 받음의 증거입니다. 하늘을 향해야 합니다.

다윗은 이 세상일들을 사망의 물결이고 무가치한 것들의 홍수로 표현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거기에 빠지는 것이 죽음이고 멸망이기에 하나님께로 도망갔는데 이것이 땅의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자의 모습입니다.

3:1~2절에서도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라고 하시는데 이것이 선택받은 증거입니다.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하늘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하나님을 이용해서 형통하게 잘 살다가 육체가 죽은 다음에 천국 가는 것으로 아는데 아닙니다.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은 하늘에서 얻겠다고 하는 것이 선택받은 자들의 증거인 것입니다.

이렇게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하늘로 만족하려고 하늘만 벌어들이려고 하므로 육체가 있는 삶에서는 마음이 없어져 버리는 진공상태가 일어나는데,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 임하셔서 선민의 육체를 생살 장갑으로 끼시는 것입니다. 선민은 혹시 병들어서 죽게 되더라도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려는 십자가 기도를 지속적으로 하는 동안에 그 주변에서 어마어마한 영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침대에 누워서까지도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선민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인해서 누리시는 기쁨과 만족을 내 것으로 삼으려고 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육체가 주인 없이 남아있을 때 하나님께서 장갑으로 사용하시는데 바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자꾸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우리의 마음이 향하도록 설교를 하고 계시다면 그 분이 선택받은 자인가를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물론 아직 그러한 기준에 대한 명확한 가르침을 받지 못해서 그러한 설교를 하신다는 여지는 남겨두어야 할 것이지만, 그러나 명확하게도 선민은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땅으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오늘 다윗의 노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신바람이 나고 너무나 재미있습니다.

30절에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라고 합니다. 이 구절은 그냥 스쳐 넘어갈 수 있는 구절이 아닙니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라는 말을 내가 적진으로 달려갈 때에는 무기도 약하고 병력도 약하기 때문에 두려움과 걱정이 많지만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힘을 동원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라는 말을 성벽을 뛰어넘어야만 정복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내 마음이 이 과제와 씨름하다보니 자신도 없고 염려와 두려움이 생겨서 하나님의 힘을 끌어들여서 용기를 내고 자신감 넘치게 성벽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이해합니다. 이렇게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에 진보가 없는 것입니다.

보세요.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라고 하는 말은 믿음의 말이 의미하는 대로 내 마음 심장을 꺼내드리는 것입니다. 앞서 다윗이 노래했습니다. 적들을 눈앞에 두자 내 마음이 적들에게 쏠릴 때에 이러한 상황을 사망의 물결이고 무가치한 것들의 홍수이며 음부의 밧줄이 내 마음을 묶어서 끌고 가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즉 적을 앞두고 있는데도 마음을 적에게 쓰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적에게 빨려 들어간다면 곧 죽는 것이고 멸망이기 때문에 적을 앞두고서도 내 마음은 적이 아닌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떠나버린 주인 없는 다윗의 육체에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하나님의 손으로 생살 장갑 삼아 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다윗은 적진으로 달려갈 수 있었는데 분위기가 확 달라지지 않습니까?

다윗은 이 세상일을 숯불에 비유하며 다 재로 변해 남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하며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했더니 그 마음을 받으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상을 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 품에 안겨서 보니 하나님의 말씀 중에 못 지킬 말씀이 없게 됩니다. 먼저 믿음으로 가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상급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뒤 다윗은 적진을 달리고 성벽을 뛰어넘습니다.

 

34절에서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라고 합니다. ‘암사슴은 민첩함의 상징이며 35절의 놋 활은 너무나 강해서 아무나 당길 수가 없는 활이지만 쏠 수만 있다면 뚫지 못할 방패가 없습니다.

38절에서는 내가 내 원수를 뒤쫓아 멸하였사오며 그들을 무찌르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앞서서 계속 피난만 갔었던 다윗의 노래가 어떻게 이렇게 전환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을 장갑으로 끼신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35절에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라는 말에서 내 손을 가르쳐라는 말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나타나셔서 칼 검법 1, 칼 검법 2장으로 가르치셨다는 게 아니라 30년간 무술을 연마한 천하무적 검객의 손이 다윗이 싸워야 하는 순간에 다윗의 손에 확 쥐어진 것입니다. 또 다른 비유로 말하면 30년 피아노를 친 세계적 피아니스트의 연주 솜씨가 피아노를 아무것도 모르는 다윗의 손에 임한 것입니다. 이게 다른 것은 30년 검객의 검술이 주어졌어도 그 순간이 지나서도 남아 있는 게 아닙니다. 30년 피아니스트의 피아노 실력이 다윗의 손에 주어졌는데 그 피아노를 쳐야 될 순간이 지난 뒤에도 계속 남아있는 게 아니라 다만 다윗은 장갑일 뿐입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그러한 실력을 내게서 발동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능력이 다윗의 지속적인 능력과 체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연합이 지속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필요하실 때마다 스스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도망가야 합니다. 마음이 도망가는 자가 선민입니다.

 

여호수아에게도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고 하십니다. 담대하게 나가서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31절 말씀에서도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진실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라는 노래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다는 것과 하나님께 피해야 한다는 말을 붙였습니다. 여호수아에게나 다윗에게나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걸려들지 않는 하나님,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 냄새를 맡을 수 없고 눈을 부릅떠도 볼 수 없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말씀을 사인으로 삼아서 단순히 율법을 지키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율법을 증거삼아 하나님께로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