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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받은 복을 세어 보다 낭패한 이야기_태승철

by 태승철 · 16-06-25 10:24 · 8,885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찬송가 429장의 후렴입니다. 너무나 은혜로운 가사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받은 복을 세어 보고, 주의 크신 복을 알고 나서 낭패한 다윗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받은 복을 세어 보는 일에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어떤 전쟁에서도 다윗은 백성 7만 명을 잃었던 적이 없었지요. 대체 이 재난의 이유가 뭘까요? 받은 복이 물망초라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받은 복을 세어보다 낭패한 이야기

(사무엘하 24:1~25)

 

 

8. 그들 무리가 국내를 두루 돌아 아홉 달 스무 날 만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9.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더라

10.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11.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12.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를 위하여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

 

 

오늘 말씀 중심으로 <받은 복을 세어보다 낭패한 이야기>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받은 복을 세어보다 낭패한 이야기

찬송가 4291절의 가사를 보면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 내려 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라고 하는데 참 은혜롭습니다. 제가 노래를 잘 한다면 아침에 멋있게 한 번 불러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 가사에서 복은 이 세상에서 땅을 딛고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 받아 누리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 의미를 연장시켜서 생각해보면 우리는 없다가 있게 된 자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주어진 것들 중에 복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오장육부 사지백체가 복이고 부모도 복입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의 외모도 복이며, 형제나 나라와 민족 집이나 옷이나 먹고 마실 것도 다 복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없는 상태에서 있게 되었으며 있음으로 누리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받은 복을 세어 보라는 가사의 의도 속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들어 있을 것입니다. 사업하는 사람이 사업이 안 돼서 괴로워할지라도 그것은 수없이 많은 복 중에 하나가 잘못 됐을 뿐입니다. 건강이 좀 안 좋을지라도 배우자와 자녀들이 건강하니 다행입니다. 또 자녀가 공부를 잘 못하더라도 건강하고 밝게 살면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복들을 세어보면 지금 안 되는 일 때문에 생긴 걱정과 근심을 뛰어넘을 수 있는데 받은 복을 세어 보지 못하고 내 손에 없는 것들 때문에 걱정하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다윗 왕이 받은 복을 세어보고 있습니다. 왕이 받을 수 있는 복 중에 첫 번째 복은 나라의 번성입니다. 그 당시에는 백성이 번성하는 것이고 군대의 막강함이 최고의 복이었습니다. 왕의 자리가 이미 복인데 그 중에서도 백성의 번성과 군대의 막강함은 첫 번째 복으로서 그 복을 세어보기 위해 인구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전염병으로 인해 무려 칠만 명을 잃게 됩니다.

다윗이 전쟁 때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을 잃어버린 적이 없었는데, 전쟁도 끝나고 나라가 부강해져서 받은 복중에서 첫 번째 복을 주의 깊게 세어보았을 뿐인데 대체 다윗의 어떤 행동이 잘못되었던 것일까요?

복을 세어보는 것은 찬송가의 가사일 뿐만 아니라, 신앙적 논리에서 볼 때에 맞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내게 주신 것들을 세어 보며 주시지 않은 것들에 대한 불평을 잊어버리는 의도이기 때문인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복을 세는 방법이 잘못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을 어떻게 세어보십니까? 아마 복을 세어보지도 않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영화에서 보면 서양 사람들이 마시는 도수가 높은 술중에서, 술 한 모금 마시고 물 한 모금 마시는 술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복을 세는 방법도 술 한 모금에 물 한 모금이듯이 복 한 모금에 반드시 십자가 한 모금이 따라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받아 누리는 개별적인 복들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가리키는 간판이자 사인이고 물망초입니다. 부산 200km이라고 쓰여 있는 표지판에 주저앉아서 부산에 다 왔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복이 물망초라는 것은 ‘forget me not(나를 잊지 말라).’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셀 때에는 복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의 복을 한 모금 먹었다면 십자가도 한 모금 먹어야만 합니다. 우리 마음은 자꾸 주신 복에 마음이 붙어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주신 물망초일 뿐이고 간판이고 사인일 뿐입니다. 그 복을 세어보았다면 반드시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피 한 모금을 먹으므로 그 복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을 잊지 않고 하나님께로 마음이 갈 수 있는데 반드시 기억해야만 합니다.

복의 근원이 되도록 부름 받은 후에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일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들을 마음에서 하나씩 다 제거해야만 했는데, 고향 본토 친척 아비 집을 제거해야 했고, 아내를 제거해야 했고, 백 살에 얻은 독자 이삭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이삭을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죽이는 것은 이삭에 대해 내 마음이 죽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삭을 죽이는 이 장면이 곧 복을 세는 방식입니다.

올바르게 복을 세기 위해서는 모든 복에 대해서 내 마음이 죽어야만 하는데, 복은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주신 물망초이자 간판이고 사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을 보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즉 복을 세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복을 주시는 행위의 반복 횟수를 센다고 보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 상하를 마감하는 장입니다. 다윗의 인구조사로 인한 벌을 내리시는데 하나님께서 세 가지 벌을 제시하시고, 그 중에서 다윗은 타인에 의해서 고통 받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손에 직접 고통 받기를 원하여 전염병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로 칠만 명이 죽게 되고 그로 인해 다윗이 괴로워하자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재앙을 멈추시고 다윗은 회개합니다. 결국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이 불행한 재난이 매듭을 짓게 되고 사무엘 상하가 끝납니다.

그런데 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이후에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앞으로 솔로몬이 성전을 짓게 되는데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상번제와 각종 제사가 드려지고 법궤가 안치되는 성전이 바로 이곳에 들어서게 되는데 이 본문 전체가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우선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도록 충동하셨다고 나옵니다. 이 말이 이해가 가면서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삼상14:6절에서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과 대치했을 때에 자기 수하 한 명만을 데리고 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라는 말을 합니다. 다윗 또한 본래의 신앙심으로 인구조사를 했을 리가 없는 것은 당연한데 삼상17:47절에서 골리앗에게 나갈 때에도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칼과 창은 군사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많고 적음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요나단과 같은 의미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1:6절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사르라 하시니라라고 하는데 구원은 여호와께 있음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다윗도 삼하8:4절에서 병거의 말은 다 말의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신앙을 가졌던 다윗이 인구를 조사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복에 마음을 붙였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는데 이 일은 하나님께서 충동하셔서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애초에 하나님의 진노는 다윗이 아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임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충동하셔서 인구조사를 하게 하시고 그것에 대한 징벌을 가하셔서 칠만 명을 죽게 하셨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의도가 있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잘못된 상태에 놓여 있었는데도 아무도 자기가 잘못하고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의 시선이 모이는 왕의 자리에서 잘못이 없는 왕으로 하여금 모든 백성이 깨달을 수 있는 잘못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충동하셨다는 말은 이 사건을 똑같이 다루는 대상21:1절에서는 사탄의 충동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크신 섭리 안에서 사탄이 충동하는 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신앙적일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향하도록 다윗에게 행하셨던 은혜를 잠시 멈추셨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잘못을 깨닫지 못하자 왕의 자리에 있는 다윗으로 하여금 그들과 같은 죄를 범하게 함으로서 진노하시고,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셨던 것인데 이러한 일이 십자가에서도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저주받은 자리인 십자가에 주님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다윗과 다르게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때문에 범죄 한 자로 취급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애꿎은 다윗 왕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까지 깨닫게 하시려고 하셨던 진노하시기에 충분한 백성의 잘못은 받은 복을 세었던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인구조사를 하였지만, 평민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잔고와 재산목록을 조사했을 것입니다. 자녀들이 받은 복이나 건강 등에 마음을 붙일 근거를 찾으려 하고 땅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붙이려고 하는데, 성군 다윗 왕의 치하에서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렸는데 여기에 바로 함정이 있었습니다.

받은 복을 세다보니 복에 집중하게 되고 복에 마음을 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복은 물망초이자 간판이고 사인입니다. 이 세상에 없던 존재가 있게 되어서 복을 누리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마음은 지금 누리는 복에 가는 것이 아니라, 복을 물망초 삼아서 하나님께 두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태평성대 아래에서 모든 백성들이 복을 어떻게 더 많이 벌고 누릴 것인가에 대해 마음이 달라붙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복을 누리며 살면서 우리와 똑같이 더 많이 모으려고만 하고 깨닫질 못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왕이 대표가 되어서 전국의 인구를 계수합니다. 그러자 심지어 자기중심적이고 잘못된 야심이 가득했던 요압도 다윗의 행동을 여호와 앞에서 잘못된 일이라고 말릴 정도입니다.

모세 시절부터 왕이 하나님이 아닌 병력에 의지하는 것을 경계해 왔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왕이 백성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를 명령하실 수는 있지만, 왕이 군대를 근거로 삼기 위하여 인구를 세는 것이 죄라는 것을 전 국민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칠만 명이 죽게 되고 이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을 세는 행위에 문제가 있는 것을 깨닫게 되고 마지막으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림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번제는 내가 번제물과 함께 죽는 동일시가 일어나는 제사입니다. 양이 죽는데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끌어안은 양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복에 마음을 붙이는 것이 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복을 세어보라는 말은 복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죽는 의미로서 번제가 드려졌던 것입니다.

화목제는 그렇게 죽은 내가 세상에 등을 돌리는 것을 뜻합니다. ‘등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로 기쁨과 만족의 근거로 삼지 않겠다는 것이고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고 만족하겠다고 결심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선민의 삶이 선민답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번제와 화목제의 의미가 삶에서 끊임없이 활성화되어야만 합니다.

내게 주신 복을 세어 보십시오. 그러나 마음이 복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복 한 모금에 십자가 한 모금입니다. 복은 물망초이고 간판이고 사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죄악으로 가득차고 유전 죄로 찌들어서 이 세상의 복을 너무나도 좋아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이 세상의 복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고 나의 진짜 복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의 자리에서 그 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죽으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에서 번제와 화목제의 의미가 완성된 것입니다.

 

결국 사무엘 상하의 의미는 나라를 세워서 이루어져 가는 이스라엘 역사가 선민의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번제와 화목제가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복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물망초이고 간판이고 사인인데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자꾸 복에 붙기에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배우자가 복이라면 십자가 한 모금을 통해서 배우자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돈이 복으로 주어졌다면 십자가 한 모금을 통해서 돈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자식이 훌륭하다면 십자가 한 모금을 통해서 자식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이것들을 물망초와 간판과 사인 삼아서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