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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삶의 문제의식은 썩은 시체 주무르기_태승철

by 태승철 · 16-07-21 10:06 · 8,015

문제의식(問題意識)이란 "문제점을 찾아서 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는 태도"입니다.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지요. 첫째로 문제점을 찾는다. 둘째로 그에 적극적으로 대처한다. 세상의 대부분의 책들과 특히 모든 종교는 이 두번째 단계에 집중해 있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은 첫번째 단계에 자리합니다. 문제점을 찾는 사람의 마음의 죽음을 선언하니까요. 삶의 문제의식은 썩은 시체 주무르기의 출발점임을 오늘 본문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삶의 문제의식은 썩은 시체 주무르기

(열왕기상 13:1~10)

 

 

1. 보라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제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2.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3. 그 날에 그가 징조를 들어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징조라 제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4.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제단에서 손을 펴며 그를 잡으라 하더라 그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5.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징조대로 제단이 갈라지며 재가 제단에서 쏟아진지라

6.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도록 전과 같이 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삶의 문제의식은 썩은 시체 주무르기>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삶의 문제의식은 썩은 시체 주무르기

우리는 삶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갖습니다. 지금 나의 상황을 이래서 문제이고 저래서 문제이고 또한 불평하면서 이건 아니라고 표현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거기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삶의 개선을 추구해 나갑니다. 그러나 너무나 지극히 당연하고 바람직해보이는 이 문제의식을 통한 삶이 다름 아닌 썩어 문드러진 시체 주무르기입니다.

문제의식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문제점을 찾아서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는 태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문제점을 찾는다 / 적극적으로 대처한다는 두 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점을 찾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특별하고 소수의 전문가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자력발전소에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점을 찾는 것은 기술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좀 더 포괄적으로 문제의식을 설명하면 문제 됨을 느끼고 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일반인들에게도 일상적으로 해당되는 것입니다. 문제 됨을 느끼고 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태도로 문제 됨을 느끼는 것은 문제점을 찾는 것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 썩어 문드러진 시체를 주무르는 것과 같다면 과연 문제의식 없이 정치 학문 예술 문학 등이 가능하며 또한 개인적으로 문제의식 없이 생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역사의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실제로 역사와 개인의 삶은 이제까지 문제의식을 통하여 발전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의식은 주인의식의 표현이고 내 생의 주인으로서 문제점을 발견하거나 느끼게 될 때에 해결을 위한 도전의식과 목표의식도 생기게 합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삶의 역동성, 한 민족의 역동성, 인류역사의 역동성도 그 출발점은 문제의식으로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제의식이 문제점을 찾고 적극적으로 대처한다.’는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고 볼 때에 우리에게 특별히 의미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기계발서나 생의 지침서는 첫 번째 단계가 아닌 두 번째 단계에 집중되고 있는데, 생의 문제 됨을 느끼는 것은 문제로 느끼는 기준이 있고 그 기준이 뻔합니다. 돈이 없고 건강이 문제고 높은 자리로 올라가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등 이런 정도의 기준을 가지고 문제점을 느낍니다. 이러한 육체적으로 편리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문제점을 찾는 기준이기 때문에 이것 자체를 책으로 써내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문제점은 누구나 다 보편적으로 몇 안 되는 가치기준에 의해 느끼며 살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집중하게 됩니다.

재미있는 점은 타락한 기독교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종교는 두 번째 단계에 집중하는데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계발서나 워렌 버핏이나 빌게이츠가 쓴 책을 읽으며 문제를 극복하려고 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백일기도를 하면서 극복하려고 합니다. 종교의 존재가치와 의미가 바로 문제의식의 두 번째 단계에 예속된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은 첫 단계에 자리 잡습니다. 문제점을 느끼고 드러난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과정 중에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문제점을 찾고 문제 됨을 느끼는 단계에서 마음 자체에 죽음을 선언하는데 이것이 십자가 복음입니다. 내 삶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느끼는 것은 십자가를 우회하는 것이고 피하는 것이고 원수로 행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제의식을 느끼는 내 마음에 죽음을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독교라고 말하는 것을 좀 조심해야 합니다. ‘기독교라고 한다면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종교집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종교가 되면 죽은 것이고 타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복음의 가르침이라고 합시다. 종교의 자가 가르칠 자로 가장 큰 가르침이 종교(宗敎)입니다.

 

그러면 십자가 복음에는 문제의식 자체가 전혀 무시되는 것일까요?

불교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공()사상에서도 문제의식을 겨냥하면서 하는 말이고,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나, 공자의 천명(天命)사상도 생의 문제의식을 초월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복음도 이와 다를 바가 없지 않겠냐는 질문을 할 수 있는데 그러나 그렇지 않고, 이러한 구절들이 뜻하는 바대로 문제의식들이 처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삶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갖는 것은 분명히 썩은 시체를 주무르는 것이지만 성경은 문제의식으로 가득합니다.

태초에서부터 문제의식은 드러납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었는데 창조가 이루어지고 사람이 살 공간으로서의 에덴이 만들어집니다. 이 에덴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하나님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생겨난 삶의 공간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결혼은 인류사회에서 생겨난 최초의 제도입니다. 아담이 혼자 있을 때에는 사회가 없었지만 하와가 있게 되면서 인간사회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결혼도 창2:1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라는 말씀대로 아담이 혼자 사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문제점을 느끼신 것입니다. 그 문제의식의 표현으로 이 세상에 결혼제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안식일 제도도 사람이 끊임없이 한 가지 일에 매이거나 종사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하나님의 문제의식으로부터 나온 쉼의 시간이고, 땅에서 마음을 떼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는 시간으로 하나님의 문제의식의 표현인 것입니다. 사람이 먹고 사는 것과 생명을 유지하는 것 등 사람에 관련된 모든 창조가 다 하나님의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예언자와 선지자들인데 이들의 비난은 삶에 대해서 사람들이 느끼는 보편적인 문제의식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땅에 사는 선민들의 삶을 보면서 갖게 되는 하나님의 문제의식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문제의식의 표현이 집대성되고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이 땅을 향해서 갖고 계신 하나님의 문제의식의 총합이며 동시에 해결의 총합이기도 합니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개인 집단 민족 국가 인류전체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살아왔는데 참 희한합니다. 그것이 역사가 되고 삶의 내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문제는 여전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문제의식으로 시작해서 해결했다고 하는 것은 일시적인 해결처럼 보일 뿐입니다. 인간은 문제의식을 가질 권한이 없기 때문에 그로부터 출발한 해결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해결은 반드시 또 다른 문제를 불러올 뿐입니다.

지금 세상을 보세요. 어제 독일에서 또 이슬람에 의한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국제적으로 나라마다 경제적으로도 문제없는 날이 없습니다. 이것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질량불변의 법칙이 인류역사에 적용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별 모양의 혼돈을 보면서 세모 모양으로 만들고는 해결됐다고 하지만 그 세모도 별 모양의 혼돈의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질량불변의 법칙이 적용되는 가운데 해결을 한다고 난리를 치지만 해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드디어 여로보암이 만든 제단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2~3절에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 그날에 그가 징조를 들어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징조라 제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유다에서 익명의 하나님의 사람이 와서 남 왕국의 요시야 왕이 300년 뒤에 나타나서 이 벧엘의 제단 즉 출애굽의 하나님으로 이름을 붙인 금송아지 제단 위에서 제사장을 올려놓고 불살라 죽일 것이며 무덤에서 사람의 시체와 뼈를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태울 것이라는 예언과 내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정확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징조가 지금 바로 제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질 것이라고 했는데 그대로 되었다는 얘깁니다.

자기 딴에는 기발한 종교정책을 내세움으로 민심을 왕좌로 집중시키고 순풍에 돛단 듯이 정권을 확립하고 왕으로서 치리를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여로보암으로서는 기함할 일이었습니다. 4절과 6절에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제단에서 손을 펴며 그를 잡으라 하더라 그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되 이르되 청하건대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도록 전과 같이 되니라라고 하는데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 제단에 대해서 갖는 하나님의 문제의식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문제의식을 통해서 이 제단을 볼 때 이 제단의 의미는 시체를 올려놓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가진 금송아지의 제단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상징화 되었는데 노예상태로부터 탈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으로부터의 탈출을 가리키는 상징인데 직접 경험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문제의식을 갖고 생을 바라볼 때 이 상황은 탈출해야 되고 벗어나야 되고 더 나은 상태로 나가야 한다는 의식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이 제단의 의미입니다. 여로보암의 제단이 거꾸로 상징이 되어서 뜻하는 바는 출애굽의 의식을 말하는데 출애굽의 의식이 바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삶을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 영적 의미는 시체를 불사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서 시체는 악하고 더러운 것의 대표적 상징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저주를 퍼부으실 때 마23:27절에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비난을 하셨습니다. 더러움의 극치를 썩은 시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시체가 뜻하는 바는 그 몸으로 이루실 하나님의 뜻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상태에서 인간의 뜻에 의해서 되는 모든 것들을 시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돈이 안 벌리는 문제의식을 가졌다면 이 돈이 없는 것은 잘못된 상황이므로 이 상황으로부터 탈출을 해야 되고 출애굽처럼 출 돈 없는 상황을 해야 되므로 문제점을 찾고 적극적으로 대처를 하는데 책도 읽고 사업 계획도 세우고 준비를 하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하고 교회에 충성합니다. 충성 기도 헌금 봉사 등 이런 것들이 다 두 번째 대처방안의 단계에 속한 것들인데 이게 시체를 주무르는 것입니다.

지금 돈 없는 상황이 문제인 것도 하나님의 뜻 안에 없는 것이고, 탈출하겠다는 방법 계획 소원도 하나님의 뜻에 없는 것이고, 그리고 빠져 나가서 도달하고 싶은 지점도 하나님의 뜻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시체를 주무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르는 게 있습니다. 마귀가 넣어준 가치관을 따라서 돈 없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만 하지 돈이 벌려도 문제인 것을 모릅니다. 돈 없는 세모 모양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도넛이 동그라미 모양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도넛으로 바뀌는 것뿐인데 모르는 것입니다.

자식이 공부 못하는 것만 문제로 생각하는데 공부를 잘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을 전혀 모릅니다. 건강에 이상 신호가 켜지고 질병이 생기면 문제라고 알지만 무조건 건강하기만 한 것도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몸에 가시가 있었어도 감사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시가 빠지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래 사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 몸이 진짜로 죽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을 모릅니다.

내가 교회를 가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건강이 안 좋으니 건강하게 해주세요. 우리자녀가 공부를 잘 하게 해주세요. 돈을 벌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은 금송아지 제단에 시체를 올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이 없기 때문에 시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