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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문제의식의 좀비들 속에서 사람으로 살기_태승철

by 태승철 · 16-07-22 15:19 · 8,282

국내외에 좀비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시체'인 '좀비'가 세상을 보는 눈이 된 듯합니다. 노동자도, 대기업 직장인도, 공무원도, 디지털 게임에 빠진 청소년도, 거리의 노숙자도 모두 다 이상하게 '좀비'와 오버랩 됨에 무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좀비가 되어버린 것은 사실 태초의 창조 직후의 일입니다. 문제의식의 바이러스가 들어오면서 세상은 전염 되고 좀비들의 세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좀비들의 세상에서 사람으로 사는 길을 알아봅니다.

문제의식의 좀비들 속에서 사람으로 살기

(열왕기상 13:7~10)

 

 

7.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8.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 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9.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10.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아니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문제의식의 좀비들 속에서 사람으로 살기>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문제의식의 좀비들 속에서 사람으로 살기

칸 영화제에서 10분 동안이나 기립박수를 받아서 화제가 되었던 우리나라의 좀비 영화 부산행이 어제 개봉이 되었습니다. 이 좀비가 국내외에서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데 반응이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좀비는 한 마디로 살아있는 시체입니다.

좀비의 어원을 찾아보면 서인도 제도나 아이티의 부두교 주술사들의 마술적 방법이나 흑마술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흑마술사들이 약품을 써서 사람을 죽은 상태로 만들었다가 살려내면 사람이 환각상태에 빠져서 의식이 없는 채로 움직입니다. 주체적인 판단이나 인격성 전체가 완전히 빠져나간 상태에서 지시대로 움직이는 존재로 이들을 데려다가 농장의 노예로 부렸다고 합니다.

현대인의 삶을 보면 노동자, 대기업 직장인, 공무원, 핸드폰에 매여 사는 청소년, 노숙자 등 우리 사회 구석구석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좀비와 일치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살기보다는 정해진 틀 안에서 주어진 명령을 따라 먹고 살아야 하는 과제에 짓눌려서 아무런 생각 없이 기계적이고 기능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좀비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좀비가 현대의 인간상을 비유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더욱 더 열풍을 일으키면서 사람들에게 회자되는데 특히 영화를 통해서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좀비의 진짜 모습은 성경에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금송아지에 출애굽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출애굽을 경험한 자들이 아니었기에 출애굽은 출 문제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부추기고 강화시켰던 것인데 이것이 바로 시체를 주무르는 삶이라고 유다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밝혔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의 시체의 정의는 하나님이 더 이상 그 육체를 향한 당신의 뜻이 끊어졌음을 뜻합니다. 타락 후에 하나님께서는 뜻을 가지고 계시지만 인간이 등을 돌림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끊어졌으므로 시체입니다.

2:17절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십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내 뜻을 따라서 살게 되어 하나님의 뜻이 끊어짐으로 아담과 하와는 영적인 의미에서 시체가 된 것이고 시체들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 움직임의 근원적인 힘이 문제의식에서부터 나왔습니다.

왜 나는 돈이 없지? 돈을 벌어야겠다. / 왜 나는 근육이 없지? 근육을 키워야겠다. / 왜 나는 얼굴이 예쁘지 않지? 성형 수술을 해야겠다. / 왜 나는 스펙이 부족하지? 영어 학원을 다녀야겠다.’라는 등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움직임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시체들의 움직임입니다.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려다 볼 때에 이 지구는 좀비의 세상입니다. 이 좀비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선민을 가려내셔서 사람으로 회복시키십니다. 회복시키시는 과정이 성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내가 좀비임을 깨닫고 번제단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내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좀비의 형태인데 성전의 번제단을 통하여 좀비 됨이 죽고 선민 됨이 회복된 자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좀비로 남아있는 자들과 만날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 전염성이기 때문입니다.

좀비 영화에서 보면 예외 없이 바이러스에 감염 되어서 사람의 인격성은 사라지고 이들이 멀쩡한 사람을 물면 바이러스가 전염되어 다 좀비가 됩니다. 이 좀비들은 인격도 감정도 생각도 없이 맹목적인 공격성만을 가지고 있는데 오늘 본문이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해주고 계십니다.

 

남 유다에서 올라온 익명의 선지자가 여로보암의 금송아지제단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심판을 예언하자, 화가 난 여로보암이 이 선지자를 잡아 죽이려고 하다가 손이 말라버리고 제단이 갈라지며 재가 쏟아지는 일이 생깁니다. 여로보암은 깜짝 놀라서 선지자에게 손을 낫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손이 회복되자 7절에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8~9절에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라고 하는데 이 하나님의 명령이 뜻하는 바가 바로 전염성에 대한 경고입니다.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좀비가 되는 것인데 인간사회에서 좀비 아닌 존재들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 좀비의 문제의식이 강력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지 말라는 말은 좀비 영화를 보면 좀비를 피해서 갈 때 왔던 길로 다시 가는 사람은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급박한 단절을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6:31~32절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한 걱정을 필연적이고 당연한 일로서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좀비에 전염되어 나타나는 병적 증상이고 좀비의 징후인 것입니다.

내일은 뭐 먹고 살지?’라는 질문은 본래 사람으로서는 굉장히 이상한 질문입니다. 좀비로 만드는 강력한 바이러스에 전염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창조주이시자 아버지가 되셔서 자녀로 부르신 사람들이 육체의 생존을 위해서 내일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입을까를 걱정하며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당연시 하는 것은 사탄의 문제의식이 전염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탄은 에덴동산에서조차도 문제의식을 갖게 하고 문제의식을 일으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문제시 삼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준비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문제시했습니다. 참새나 백합화도 걱정하지 않고 사는데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사람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동성애문제도 그렇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야 한다는 것 자체를 문제시 삼아서 그것을 전염시켜가는 것입니다. 모든 기독교 교단들이 처음에는 동성애에 대해서 펄쩍 뛰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동성애자 목사를 세우고, 나라에서도 법적으로 인정해주는 단계가 되었는데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해서 전염된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지 않는 한 동성이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희미해졌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도 동성 간의 결혼에 대해서 문제 삼는 것이고 전염되어버린 것입니다.

돈을 추구하는 것도 돈이 없으면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것인데 전염된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다 입히시고 먹이시고 살리시겠다는 것을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면서까지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좀비에게 전염된 사람들이 아무 곳에나 문제의식을 발동하고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속에 문제의식이 살아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다 문제로 보입니다. 며느리 발뒤꿈치가 달걀 모양으로 예쁘게 생긴 것조차도 문제가 됩니다. 아내의 얼굴이 예쁘면 예쁜 대로 문제고 못 생겼으면 못 생긴 대로 문제 삼습니다. 내 마음이 문제의식으로 차 있으면 세상에 문제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비들 속에서 어떻게 전염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니이다라는 말은 절대로 그들에게 접촉하여 전염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회사 안에도 가정에도 아내와 남편사이에서도 좀비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지닐 수 있는 포터블 성전을 만들어 주셨는데 십자가 사건입니다. 포터블은 들고 다닐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면 살전5:16~18절의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씀에서처럼 문제의식이 설자리가 없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는 말은 문제의식을 제로상태로 유지하라는 것인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에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의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공간 안에 우리 마음이 머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좀비인 사장님을 만날 때 사장님이 문제의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사장님이 야단치려고 부를 때에 나는 육체의 눈과 귀로는 사장님을 대할지라도 마음의 눈과 마음의 귀로는 말씀이신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동시에 마음의 귀로 듣는 것이므로 나는 죽었다는 고백을 할 때에 문제의식의 전염성을 철저하게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먹여 살려야 될 가족을 바라보면서 눈에 보이는 사장님 귀에 들리는 사장님의 굴욕적인 야단은 다 참으면서도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가 죽었다는 고백은 왜 하지 못합니까?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가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것을 알고 사장님이 야단치는 이 상황에 대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되고 하나님의 문제의식이 나타나기를 바라야지 사장님의 문제의식이 나에게 전염되어서는 안 됩니다. 문제의식에 전염되면 좀비가 되어서 내 삶은 에덴 바깥으로 쫓겨나고 맙니다.

 

세상의 삶에 대해서 두려움의 문제의식, 분노나 원망의 문제의식, 걱정과 염려라는 문제의식으로 출발한다면 좀비의 삶이 되어버릴 뿐만 아니라 전염되어 나갑니다.

온 대한민국이 사교육에 미쳐서 일류대학에 들어가야만 한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도 좀비들이 되어서 문제의식에 전염되었기 때문입니다. 학원에서 밤 12시가 되어 눈이 퀭해져서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다 좀비들입니다. 아빠 엄마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에 전염된 좀비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되는 현실은 피할 수가 없지만 마음으로 십자가를 끊임없이 바라봄으로 사람으로서 회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되면 삶의 현장은 무조건 에덴이 되고 평강이 지배하게 되는데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조차도 평강을 깨지 못했습니다. 좀비가 되었기 때문에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면 죽으리라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 한 가지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나는 삶의 현장에 대해 죽었사오니 이 현장에 하나님의 통치가 내려오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며 내가 해야 될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문제의식으로부터 나를 움직이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문제의식으로 말미암은 내 사지백체의 움직임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항상 기쁨과 쉬지 않는 기도와 범사에 감사로 원망불평의 문제의식, 두려움과 걱정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완전히 회복되면 그 이후에 생각들은 하나님의 문제의식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쁨과 감사로 충만한 상태와 살아계신 하나님이 가장 우선적으로 보이는 상태로부터 세상을 행해 내 사지백체가 움직여야 한다면 그 모든 움직임은 하나님의 문제의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을 찾으며 백일기도를 할지라도 그것은 좀비의 기도일 뿐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봄이 중단되지 않고 이 세상을 살게 하심으로 좀비들과 함께 사는 세상 속에서 문제의식의 전염병에 전염되지 않고 에덴을 성취하며 살아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