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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좀비들의 성경읽기_태승철

by 태승철 · 16-07-23 13:34 · 7,896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일반 백성의 독일어로 번역하기 전까지 성경은 소수 교직자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성경책이 남아돌고 일반 교인들의 성경읽기가 일상이 돼버린 지금 상황은 그 자체만으로도 개혁입니다. 그러나 과연 성경책과 성경읽기 만큼 복음의 진리 역시 보편화 되고 생활화 되고 있을까요? 이 '읽기'에서 중요한 것은 성경책뿐 아니라 읽는 자 자신임을 우리는 종종 잊습니다. 읽는 자가 좀비라면 상황은 차라리 루터 이전이 더 나을지도 모르지요.

좀비들의 성경 읽기

(열왕기상 13:11~34)

 

 

11.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의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그에게 말하고 또 그가 왕에게 드린 말씀도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말한지라

12.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어느 길로 가더냐 하니 그의 아들들이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의 간 길을 보았음이라

13. 그가 그의 아들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그들이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 그가 타고

14. 하나님의 사람을 뒤따라가서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냐 대답하되 그러하다

15.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16.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17.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다

18.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19. 이에 그 사람이 그와 함께 돌아가서 그의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중심으로 <좀비들의 성경 읽기>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좀비들의 성경 읽기

마르틴 루터가 에라스무스의 그리스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함으로 소수의 교역자들에게만 읽혔던 성경이 모든 백성들에게 읽힐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종교개혁 중에서 실질적 효과를 나타낸 측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성경이 부족한 나라와 민족이 있어서 성경을 모으는 단체도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집집마다 성경이 남아돌 정도이고 교회에서도 성경 읽기와 성경 공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관측자의 상태에 따라서 시간과 공간의 관측에 대한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인데,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관측 대상이 아닌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루터가 사람들이 성경책을 많이 읽도록 번역을 해 놓았는데 실제로 기독교인의 삶에 개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문제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교인들은 개혁이 되었습니까? 아무리 성경책을 읽어도 내가 성경을 바르게 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면 성경은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이고 상대적인 것입니다. 좀비의 상태에서 성경을 읽는 것이 보편화 되었는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락한 아담과 하와가 좀비였고 또한 그의 후손들이 다 좀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으리라고 하셨지만 살아있습니다. 죽었는데 살아있으니 좀비입니다. 또한 우리는 성경에서 시체가 갖는 부정하다는 의미를 밝히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와 그 후손들이 왜 좀비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시체는 더 이상 그 육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루실 뜻이 없는 상태임을 말합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내 뜻이 삶을 이끌어 가게 되고 하나님의 뜻은 끊어지게 되어 살아있는 시체인 좀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좀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삶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졌다는 점이었습니다. 문제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고 해결하고 싶어 합니다. 이 문제점을 느끼는 마음이 좀비 됨의 증거입니다. 문제점을 느끼고 있기에 항상 기뻐하는 대신에 항상 근심하고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우울해 합니다. 쉬지 않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아버지와 대화하는 대신에 쉬지 않고 이 땅에서 돈 벌 생각, 자식 생각, 건강 생각, 애인 생각만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대신에 범사에 부족함을 느끼고 불평과 원망과 불만을 가집니다. 이것들이 좀비의 형태로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서 가장 쉽게 발견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삶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는 좀비들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 흔히들 좋아하는 긍정적인 마인드입니다. 이 땅에서 이루고 싶어 하는 꿈과 비전을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 최선일 것인데 그러나 결국은 극심한 최악으로 끝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썩은 희망을 좇는 동안 자신의 좀비 됨의 비극을 깨달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더 큰 악으로 귀결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문제의식은 문제점을 찾아서 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는 태도입니다. 좀비는 문제점을 찾는 첫 번째 단계에서 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려고 하는 두 번째 단계에서 성경을 읽는 자들입니다. 내가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 좀비가 되는 것인데 이 세상에서의 삶이 내 마음 안으로 침투하고, 내 마음이 세상 속으로 침투하여 서로 얽혀있는데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 모습이 문제입니다.

배는 물에 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배가 물속으로 들어가거나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온 상태이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땅에서 살지만 땅의 삶이 내 마음 안으로 들어와서도 안 되고, 내 마음이 땅의 삶 속으로 침투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서로 묶여있는 상태에서 문제의식은 발동합니다. 원래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 땅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들어와 계셔야 합니다. 그러면 내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이 내 삶의 문제의식을 갖고 보시며 섭리하시며 통치하시고 이끌어 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의 삶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는 좀비의 모습은 선악과를 따먹은 후유증임을 알았습니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성경을 읽을 때에 성서적 물질관을 갖게 됩니다. 물질에 관여하는 것에 성서가 답을 주는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성서적인 경영이론도 내가 사업을 할 때에 성서가 어려운 문제들에 봉착할 때마다 답을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성서적인 아버지, 성서적인 어머니, 성서적인 자녀양육, 성서적인 건강법, 성서적인 인간관계 등 이것들은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는 것이며 좀비의 성경읽기의 결과들입니다.

성경은 돈을 어떻게 처리해야 되느냐에 대한 원칙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좋은 아버지 되는 길을 가르쳐주지 않고, 건강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의 동선과 이 동선 위에서 연쇄적으로 연결된 세 개의 고리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만드신 동선이고 연쇄적으로 연결되는 세 개의 고리는 하나님을 가리키고 하나님께 가는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렇게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면 이제 이 땅의 삶은 하나님께서 사십니다.

솔로몬은 국가의 재정문제를 다루는 지혜, 민사소송의 재판을 할 때의 지혜, 신하들을 다룰 인간관계의 지혜 등의 분야별 지혜를 구하지 않았고 오직 듣는 마음을 구했습니다. ‘듣는 마음은 어느 하나의 원칙(이론)을 가지고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마다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듣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직접 그 문제들을 취급하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나는 문제가 있는 그 자리를 죽고 떠나는 것이지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좀비들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며 삶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고 합니다. 좀비가 성경을 읽고 성경공부를 하면 반드시 이러한 특징이 나타나게 됩니다. 원칙을 찾으려하고 어떤 특정한 분야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여는 마스터키를 성경에서 얻으려고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라이브 교제는 끊어지게 되고 이것이 율법주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여로보암의 종교정책의 핵심은 출애굽 사건을 상징화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성경 속의 조상들의 출애굽 사건을 지금 나의 출 문제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했던 것입니다. 정치가로서 민심을 모으기에 탁월한 효과를 냈을 뿐만 아니라 금송아지 종교의 부흥을 위해서도 탁월한 전략이었습니다. 출애굽을 상징화하여 우리가 느끼는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출 문제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숫자적으로 부흥하는 비결입니다.

또한 여로보암의 전략이 특이한 점은 바알이나 아스다롯과 같은 가나안 족속의 우상을 섬기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금송아지를 출애굽의 하나님으로 명명하면서 한편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그대로 붙잡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출애굽 사건을 상징화함으로 이 땅에서 삶에 대해 가지는 문제의식을 여호와 하나님 신앙에서 찾게 만들었습니다. 문제의식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 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신은 금송아지든 하늘에 계시든 상관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주목적은 해답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여로보암의 좀비의 성경읽기 식의 태도가 어떻게 나왔는가를 가르쳐주십니다. 문제의식을 갖고 성경을 읽는 게 좀비의 성경읽기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을 판단하므로 문제의식을 갖게 되고 이 자체가 좀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더럽게 생각하시는 것의 상징은 시체인데 살아있는 시체입니다. 이 더러움을 가지고 성경을 읽게 되었는데 이러한 일이 생기게 된 이유는 바로 주인의식 때문입니다.

 

본문의 11~12절에서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의 아들들이 와서 이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그에게 말하고 또 그가 왕에게 드린 말씀도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말한지라 /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어느 길로 가더냐 하니 그의 아들들이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의 간 길을 보았음이라라고 합니다.

유다에서 올라온 선지자가 여로보암 왕이 금송아지 제단에서 분향할 때에 하나님께서 징계의 예언을 하였습니다. ‘300년 뒤에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 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고 하시고 그 징조로 제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고,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잡으라고 할 때에 손이 말라버리자 하나님의 선지자가 기도하매 다시 성하게 되는 것과 왕이 예물을 주려고 초대를 했지만 초대에 응하지도 않았고 떠났다는 것을 늙은 선지자의 아들들이 목격하고 아버지에게 와서 고했습니다.

이때에 벧엘에 여로보암이 만든 금송아지 종교가 부흥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선지자로 불리던 사람의 아들들이 이 사건을 목격하고 알리자, 늙은 선지자가 부지런히 쫓아가서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선지자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거절을 합니다.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곧 바로 떠나겠다고 하자 이 늙은 선지자는 거짓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당신을 초대해서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고 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나도 당신과 같은 선지자라고 하는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왜 구태여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이런 행동을 했던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문제의식이 나오게 되는 원천인 주인의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행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 자는 벧엘의 금송아지 종교가 성행하고 있는 선민의 나라에서의 패륜적 영적 상황에서 선지자로 불리던 사람이었습니다.

대하11:16절에 보면 여로보암이 이 금송아지 종교를 창안했을 때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마음을 굳게 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레위 사람들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고자 한지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늙은 선지자는 그들과 함께 가지 않았습니다. 금송아지 종교가 성행하는 가운데 사람들이 자기 삶의 문제를 느끼고 해결하기 위해 제사를 드리는 그들 가운데서 선지자로 불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아들들의 말에 의해서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선지자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신도 선지자이고 이 사람도 선지자라면 당신에게서는 왜 이런 징조가 보이질 않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물을 수 있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도둑이 제 발이 저리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 교제함으로 실질적으로 하나님이 함께 함으로 징조가 나타나는 선지자의 위치로 격상시키고 자기의 속임수와 열등감을 덮으려 했던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징조로 나타났으면 자신도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을 열심히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징조를 보인 사람과 식사를 하며 교제함으로서 사람들 눈에 자신을 같은 급이고 동류로 인식시키고 싶어 할 뿐이었습니다. 이 늙은 선지자는 하늘에 계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자의 마음이 붙잡은 것은 금송아지 종교의 분위기 안에서 사람들이 자기들의 삶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문제를 해결받기를 원할 때 중재하는 선지자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 내가 주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주인의식의 결과가 33~34절에서 여로보암이 망한 이야기를 통해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은 좀비들의 종교를 만들었고, 그 가운데 좀비로서의 종교 활동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문제의식의 출처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타난 사건이 벧엘의 늙은 선지자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내 삶을 문어발식으로 꽉 붙잡고 놓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 삶을 진짜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타난 징조로 덧입혀서 사람들에게 선지자로서의 권위를 강화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결국 식사에 초대 받은 하나님의 사람도 가짜 선지자의 말을 믿고 식사에 초대받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사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겪게 되는데 이 사람도 잘못입니다.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접촉 자체를 금지하신 하나님이 자기에게는 금지를 시켜놓고는 이 사람에게는 가서 같이 떡 먹으라고 서로 상충되는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그리고 그 정도로 추악함이 팽배한 금송아지 종교 숭배의 분위기에서 멀쩡하게 살아있는 선지자가 어떻게 제대로 된 선지자일 수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성경 읽는 예를 들어 봅니다.

여러분 중에는 출애굽 사건이 내 문제로부터 탈출함을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의아해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에 대한 성경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셨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드러내주시려고 기록한 것이지 내 삶에서의 나의 출애굽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 이야기도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창조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이 기록한 기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가리키기 위함일 뿐 나의 기적을 말하려고 이 땅에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나의 기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이유는 좀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좀비가 된 이유는 이 세상 삶에 대해서 하나님의 문제의식으로만 이끌어져야 하는 삶에 대해서 내가 주인의식과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삶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느끼는 세상의 문제의식에 대해 죽어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죽음으로 마음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보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운동하는 분들이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1/3을 병자를 치료하셨다고 하면서 병을 치료하려는 것에 대해서 설파하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악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더럽게 여기는 살아있는 시체 좀비가 되어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