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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5초짜리 기도로 다윗의 길을 간다_태승철

by 태승철 · 16-08-20 10:25 · 8,685

다윗의 길과 여로보암의 길! 이것은 비단 남 북 왕국의 왕들에 대한 평가의 기준만은 아닙니다. 선민의 경계 안에서 진짜와 가짜, 알곡과 가라지, 참 선민과 무늬만 선민이 가려지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여로보암의 길은 뿔 달린 도깨비들만 걷게 되는 기이한 길인 것도 아닙니다. 남 북 왕국 가리지 않고 보편적인 현상이 될 수 있었을 정도로 인간의 본성에 친화적인 길입니다. 이 길을 피하고 다윗의 길을 걷을 수 있기 위한 5초짜리 기도가 있어 소개합니다.

5초짜리 기도로 다윗의 길을 간다

(열왕기상 16:1~34)

 

 

1.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예후에게 임하여 바아사를 꾸짖어 이르시되

2. 내가 너를 티끌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 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네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하여 그들의 죄로 나를 노엽게 하였은즉

3. 내가 너 바아사와 네 집을 쓸어버려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하리니

4. 바아사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그에게 속한 자가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더라

 

29.유다의 아사 왕 제삼십팔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30.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32.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33.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34.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5초짜리 기도로 다윗의 길을 간다>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5초짜리 기도로 다윗의 길을 간다

방송휴무 기간 동안에 홈페이지와 카페에 십자가 생활화의 1분기도라는 제목으로 기도의 예를 제시했습니다. 오늘은 십자가 생활화의 5초짜리 기도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여로보암의 길을 피하고 다윗의 길을 가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핵심 메시지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다윗의 길을 가기 전에 우리가 꼭 생각해야 될 것이 있는데 이 땅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성공을 마음에 두고 간절히 바라는 것 자체가 실패이기 때문이고, 또한 이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형통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되는데 형통을 마음에 간직하고 기억하는 것 자체가 불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언제 어디서든지 내가 여로보암의 길을 가는지 다윗의 길을 가는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회사에서도 승진과 성과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되고 다윗의 길을 가야 합니다.

회사에 근무하는 동안에 내가 지금 여로보암의 길을 걷는지 다윗의 길을 걷는지에 대해서만 주의를 하고, 가정에서의 부부관계나 자녀관계에서도 자녀를 어떻게 잘 키울 것이냐를 문제 삼고 염려하기 전에, 내가 지금 여로보암의 길을 갈 것인지 다윗의 길을 갈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다윗의 길을 가는 삶을 살다 보면 이보다 더 완벽한 성공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인데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똑같은 삶을 살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참 성공적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이 세상의 사람들이 정해놓은 성공을 소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다윗의 길을 가는 것은 여로보암의 길을 피하는 것인데 5초짜리 기도를 하면 됩니다.

5초짜리 기도이기 때문에 1분에 맥시멈 12번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다윗의 길을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1분 동안 이 기도를 몇 번이나 반복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내 삶이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에 어느 정도로 성공적인 삶이냐가 결정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를 한 번도 안 한다면 예외 없이 여로보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5초의 기도가 아주 간단하기 때문에 미리 말씀 드릴 필요는 없고 끝날 때 5초 전에 말씀드리면 됩니다. 문제는 이 기도를 왜 그렇게 반드시 해야 하는가에 대한 우리의 자각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남북 왕국이 아주 예민하게 적대적인 대결 구도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남 왕국의 선지자 예후가 나옵니다. 나중에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으로 나오는 예후와는 동명이인입니다. 이 예후가 북 왕국의 왕 바아사의 죄악을 꾸짖고 멸문지화의 심판이 주어질 것을 선포하는데, 이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북 왕국을 선민으로 여기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계속되고 있는 이 불행하고 참혹한 내용의 이야기들이 믿지 않는 이방인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선민들의 경계 안에서 일어난 역사입니다.

남 왕국 유다의 아사 왕이 41년간 비교적 훌륭한 통치를 했습니다. 이 아사 왕이 통치하는 기간 동안에 북 왕국 이스라엘에는 어떤 왕들이 있었는가를 이야기하는데 아합까지 합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왕이 되어서 2년 만에 바아사에게 죽임을 당하고 바아사가 왕이 되었는데, 예후 선지자가 바아사에게 멸문지화의 심판이 주어질 것을 예언합니다.

바아사의 아들이 엘라였는데 그가 왕이 되었을 때에 2년 만에 신하 시므리가 정변을 일으켜서 엘라 뿐만 아니라 바아사 가문 전체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바아사가 여로보암 가문의 남자들을 다 죽인 것과 똑같은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시므리는 일주일 동안 정권을 잡았다가 오므리에 의해서 포위되어 잡히기 직전에 궁정에 불을 지르고 뛰어들어서 자살을 합니다. 이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왕 위에 올라서서 바알숭배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다섯 왕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지만 이 왕들의 사적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핵심은 여로보암의 길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바아사를 향한 예후 선지자의 말씀이 2절에 네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하여 그들의 죄로 나를 노엽게 하였은즉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엘라와 시므리와 오므리와 오므리의 아들 아합에게도 713192633절에서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어 언급되면서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들이 예외 없이 철저하게 여로보암의 길을 따르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던 다섯 왕의 이름을 거명하시는 이유는 여로보암의 길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너무나 쉽게 여로보암의 길로 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반복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여로보암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 멸망의 길을 걷고 있음을 모르기 때문에 이 길이 무엇인가를 반드시 알아야만 합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여로보암의 길은 입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마음으로는 땅에 있는 어떤 대상을 좋아하는 삶입니다. 이 이야기는 반드시 선민에게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방인들은 입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 의미를 좀 더 입체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서 여로보암의 길의 기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여로보암의 길이 어디에서부터 시작 됩니까?

솔로몬에 이어서 르호보암이 남 왕국 유다의 왕이 되자, 나머지 열 지파를 떼어내서 여로보암을 북 왕국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로보암은 왕권 강화의 필요성을 느껴서 북쪽 열 지파의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그리워하여 남쪽으로 내려갈까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에 출애굽을 이루신 여호와라는 이름을 붙여서 성전으로 내려오는 길을 막았던 것입니다. 즉 열 지파 선민들의 삶에서 성전의 의미와 효과를 제거했던 것인데 이 성전이 백성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사람이 살면서 돈 건강 취직 승진 등의 걱정들이 있었다고 생각해봅니다. 그러한 걱정을 안고 성전에 나오면 제일 먼저 내 마음을 지성소의 모습과 비교하게 됩니다.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고 법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돌판이 있었습니다. 돌판은 하늘에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거였습니다.

지성소는 선민의 마음을 본 따 만든 것으로 우리 마음에는 인격체이신 하나님만이 들어와 계셔야 함을 뜻합니다. 마음의 지성소에는 그것으로 인하여 기쁠 수 있고 만족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이 들어오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지성소에 이 세상의 돈 걱정 자녀걱정 건강걱정 등으로 가득한 자신의 마음과 비교해 봅니다. 목사님들 같은 경우에는 목회 부흥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합니다. 목회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만 들어와 계셔야 하는데 다른 것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깜짝 놀라서 제사장에게 가서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하면 가지고 온 양을 제사장이 죽여서 각을 뜨고 번제단에 올려 불에 태웁니다. 그 때에 번제단 옆에서 무릎 꿇고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이 아닌 돈을 담고 염려 걱정했던 자신이 양과 함께 죽는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데 성소의 분향단을 통하여 돈으로 만족하려고 노력했던 만큼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기쁘고 만족하기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만을 추구하게 됩니다. 또한 떡상의 진설병이 뜻하는 대로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배불러야 됨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등대가 뜻하는 대로 하나님으로 배부르고 난 뒤에야 아내를 보고 남편을 볼 때 올바른 말을 할 수 있는데 밝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배부르기 전에는 내 배를 채우기 위해서 남편이나 아내에게 짜증을 내는데 왜 나를 만족하게 해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웃을 만나도 내 배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될 뿐입니다. 그 등대의 밝음은 내 배가 불러서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변해야 하는데 여로보암이 이 길을 싹 제거해 버리고 마음의 지성소에 돈 걱정을 하며 돈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사람에게, 그 상태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는데 바로 금송아지에게 출애굽의 여호와 하나님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삭을 번제단에 올려놓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리에 이삭이 들어오면 안 된다는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자녀가 마음의 지성소에 들어왔다면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입으로만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도록 만든 것인데 이렇게 될 때에 이상한 효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이 들어와야 할 자리에 이 세상의 돈 건강 자녀 승진 등에 대한 생각이 가득한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내 마음에 들어와 있는 그것들에 대한 나의 열망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기 시작합니다.

아합의 경우를 보면 두 아들의 이름은 아하시야와 여호람이었습니다. 아하시야나 여호람의 이름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이름입니다. 아하시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붙잡으신다.’는 것이고, 여호람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높으시다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자식들의 이름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붙인 것은 아합이 절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포기한 적이 없는 것을 뜻하지만, 그러나 이 사람이 아내 이세벨의 영향을 받아 바알 신전에 우상을 만들고 절을 할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바알숭배를 전하는 전도사가 되어 버립니다.

바알숭배의 핵심은 풍요와 다산에 대한 열망입니다. 한 마디로 부자이기를 원하고 부흥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망을 가지고 입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동안에 내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무서운 일입니다.

유명한 목사님들의 책 속에서 부흥을 열망하라 / 성공을 열망하라 /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것이 바로 여로보암이 백성을 죄를 짓게 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기쁨과 만족을 주는 궁극적인 마음의 자리 지성소에는 이 세상의 돈이나 건강 등이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이 들어와 계셔야만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여로보암의 길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여로보암의 길에는 그 길이 시작되는 싹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넓은 길이라고 표현하신 우리 육체의 오감관입니다. 오감을 통해서 들어온 재료들이 마음과 만날 때에 마음이 반응하게 되면서 여로보암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것들을 오감을 통하여 포착하는 호불호에 대해 마음이 반응하면서 여로보암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데 마음의 지성소에 다른 것이 들어와 있는데도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악을 범하게 됩니다.

그래서 1분 기도를 말씀드렸던 것처럼 여로보암의 길을 피하고 다윗의 길을 걸을 수 있는 15초 기도를 우선 말씀드립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내 마음은 주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만으로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하시고, 지금 이곳에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고 뜻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중대한 일을 할 때에 짬이 있으시면 1분 기도를 드리세요. 더 바쁘면 15초 기도를 드리세요. 그리고 우리 마음이 일상적으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처럼 쉬지 않고 기도할 때에는 5초 기도를 통하여 항상 십자가 생활화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다.’라는 5초 기도를 1분 동안에 맥시멈 12번 반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항상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 고백함을 잊지 않는 것 외에는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재료들에 우리 마음이 직접 반응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반응하려고 할 때마다 죽는 것인데 그럴 때에 삶은, 십자가를 경계로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하늘 쪽의 영역이 열리게 됩니다. 십자가를 경계로 그 반대쪽은 세상을 향한 영역이 열립니다. 오감을 통하여 접하는 세상의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내 마음이 죽었다는 5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