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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하나님 살아계심이 내 통장이다_태승철

by 태승철 · 16-08-24 10:32 · 7,322

통장 뿐 아니라 하나님 살아계심이 내 병원이고 내 연금이기도 합니다. 이 땅의 삶을 위하여 불가결한 필요들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예외 없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살아계심이 이처럼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고, 반면에 우리가 살면서 추구해야 하는 대상은 하늘의 하나님 뿐입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동안에 하나님 살아계심은 우리 삶에 필요한 통장이 되고 병원이 되고 연금이 되십니다.

하나님 살아계심이 내 통장이다

(열왕기상 17:8~24)

 

 

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10.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11.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2.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살아계심이 내 통장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 살아계심이 내 통장이다

이 말을 조금 변형해서 같은 의미로 말씀을 확장해보면 하나님 살아계심이 내 연금이다.’ 또 건강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 살아계심이 내 병원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로또 100억짜리 당첨과 하나님 살아계심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살아계심을 주저 없이 택할 수 있을까요? 가정이지만 좀 진지하게 생각해서 내 수준에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할 때 하나님 살아계심에 마음을 두기 위해서 100억을 포기할 수 있겠느냐는 것인데 포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 살아계심 대신에 100억을 선택하면 100억짜리 통장 들고 지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통장으로 살지 않고 연금으로 살지 않습니다. 연금이 없는 사람은 잘되었습니다. 하나님 살아계심으로부터 살면 됩니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까마귀가 극심한 가뭄 속에서 자기가 먹지 않고 고기와 떡을 엘리야에게 날라다 준 기적과, 사십 년 광야생활에서 하나님께서 그날그날을 먹여 살리셨는데 조금이라도 저축해 놓겠다고 이틀 분 만나를 주우면 썩어 버렸습니다. 이 사십 년 광야생활을 통해서 오고 오는 세대의 선민들에게 저축, 통장, 연금으로부터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 살아계심으로부터 사는 것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연금이 주어지고 있는데 연금으로 살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부터 살고, 통장이 있는 사람은 곶감 빼먹듯이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어떻게 통장으로부터 살지 않고 하나님 살아계심으로부터 살 수 있느냐는 것인데 통장이나 연금으로 살면 이건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삶의 조건을 얻기 위해 의지하는 연금과 통장 등에 대해서 내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고 하나님께로 마음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방향만 바꾸면 끝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 배부르기 위해서 말씀과 기도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돈을 통장에 넣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추구해야 하고 하나님께 투자를 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까지는 우리의 행위나 수고로 되는 게 아니지만, 하나님과 친해짐은 기계적으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마술적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인격적으로 됩니다.

인격적이라는 것은 친하기 위한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친해지면 하나님으로 기쁨을 느끼기 시작하고 만족을 누리기 시작하면 주어지는 연금이나 통장의 돈을 믿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과 친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친해지면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 어제 바로 앞장 34절에서 난데없이 그 시대의 여리고성을 재건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500년 전에 있었던 여호수아의 맹세를 되살려 생각을 했습니다.

6:26절에 여호수아가 그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라고 하는데 이 맹세가 500년 뒤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맹세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여리고성을 무너진 채로 놔두게 한 것은 여리고성 전투는 요단강을 건넌 뒤 복지에 들어와서 치룬 첫 번째 전쟁으로, 복지에서 선민들이 해야 될 모든 전투뿐만이 아니라 모든 삶의 행동의 성격을 규정하는 사건입니다.

여리고성 이후의 전투에서는 여리고성 전투와 같이 싸워 본 적은 없으나, 칼을 들고 나가서 싸운 승리의 전투에서도 영적인 의미에서 보면, 바로 여리고성 전투의 방법과 같은데 여리고성 전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복지의 삶은 여리고성에서 경험했던 바와 같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부터 살아가는 것이므로 여리고성의 무너진 것을 재건하는 자는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는 저주를 맹세했습니다.

복지에서 살고 싶으시면 여리고성의 함락이 뜻하는 영적 의미의 교훈대로 살아야 합니다. 무찔러야 하는 적이 있는 여리고성 바로 앞에서 성을 돌면서 마음에는 여리고성을 생각하지 않고, 나팔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법궤 속에 있는 말씀의 돌판이 뜻하는 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인격체로 살아계신 증거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민이 추구해야 될 삶의 방식입니다. 그렇게 하면 여리고성에 대한 대응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삶은 좁쌀만큼이라도 우리 스스로가 생각하고 계획하고 추진한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부터 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우리 삶에서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이루시려는 준비를 하고 계신다는 뜻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부터 사는 내용입니다.

엘리야 때에 이세벨의 영향을 받아서 바알 숭배가 전성기를 이룬 다음 곧바로 앞장의 34절에 연이어서 여호수아의 맹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부터 살지 않으면 반드시 바알 숭배에 빠진다는 내용입니다.

 

앞에서는 내가 저금해 두고 내가 모아 둔 창고로부터 꺼내서 먹고 사는 게 아니라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떡과 고기 즉,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부터 먹고 산다는 얘기를 극단적으로 보여주셨고,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부터 사는 것의 예를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들려주십니다.

본문은 사르밧 과부가 한 움큼의 밀가루와 조금 남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서 먹고 죽으려고 했는데 엘리야가 내게 먼저 조금 가져오라고 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 극심한 가뭄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식량을 측정해보았을 것이고 가장 오래 살기위한 최소한의 분량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사실은 남아있는 한 움큼에서 떡을 조금 달라고 하지만 그 자체가 이미 조금이므로 주어야 한다면 엘리야에게 거의 다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르밧 과부의 헌신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사르밧 과부의 마음은 지금은 믿지도 않는 사람인데 엘리야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이 과부 앞에서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사르밧 과부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한 기적은 우리도 그런 기적을 체험하라는 뜻이 아니라 기적 자체가 말씀이고 또 다른 언어입니다.

극단적 상황에서의 사르밧 과부의 예를 들었습니다. 최소한의 분량으로 분배해서 남겨 두었던 밀가루와 기름을 먹고 나면 이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데 그 상황에서의 한 움큼의 밀가루와 기름이 이 과부와 아들에게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그러나 그것에 대한 마음보다 하나님이 더 우선이었는데 그렇게 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밀가루 통과 기름병으로부터 살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밀가루 통과 기름병의 바닥이 나지 않게 채우려고 평생을 땀을 흘리며 살아가는 것이고, 이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풍요와 다산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가뭄 때문에 한 번 먹고 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은 참으로 처절합니다. 이런 상황을 피하려고 우리는 통장을 만들고 연금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데,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하시는 것은 그 극한 상황에서 마지막 남은 한 움큼의 밀가루조차도 내 마음에서 하나님 다음으로 밀쳐내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부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밀가루 통으로부터 기름병으로부터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채우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채우려고 노력했고 직장을 다니며 애쓰고 그것이 어느 정도 채워지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내하시면서 마음을 하나님께로 우선 드릴 것을 기다리시면서 허락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벗어날 수가 있습니까? 직장을 그만 두고 하던 사업을 그만 두어야 할까요? 돈 버는 일들을 다 멈추어야 됩니까? 그 행동을 멈추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계속 하시되 시간을 떼서 하나님과 친해지는 시간을 갖는 것이고 하나님으로 배 부르려는 것인데 재정 상태를 의지하는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여야 합니다.

수련을 통하거나 마인드 컨트롤을 통해서 재정에 대해서 내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용히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 땅에 대해서 죽었음을 고백합니다. ‘죽은 자라는 마음이 될 때 주님의 부활사건에 동참하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사건에 동참하는 것은 내 마음 속에 이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으로 만족과 기쁨을 누리고 싶은 열망이 생기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땅의 것을 통해서 배부르고 만족하려고 했던 사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려는 사람으로 변한 것이고 그 마음이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서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하늘로 끌고 가십니다. 하늘의 예수님 안으로 끌고 가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늘에서 하나님과 교제하시면서 하나님의 고백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시고 주님의 고백은 내 사랑하는 아버지시요 내 기뻐하는 분이시라고 하십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이 느끼시고 예수님이 배불러하시는 하나님을 똑같이 느끼고 배부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직장에 나가면 여리고성의 일이 일어납니다. 직장은 먹고 살기 위한 돈을 버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은 돈 벌기 위해서 밀가루 통과 기름병을 채우라고 허락하신 게 아닙니다. 직장에 가는 이유는 여리고성입니다. 직장에 가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직장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부터 역사가 나타납니다. 삶이 진행됩니다. 사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의 뒤에 보면 외아들이 죽었다가 엘리야가 죽은 시체위에 세 번 엎드리는 일을 통해서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경험되는데 마찬가지 얘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과부는 요즘과는 다릅니다. 요즘은 사회활동도 할 수 있고 재혼을 할 수도 있고 얼마든지 문이 열려 있지만 그 옛날의 과부와 외아들은 원자폭탄을 터뜨려도 깨지지 않는 관계입니다. 어떤 검객의 예리한 칼도 이 홀 어머니와 외아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무사는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죽음을 가져 오셨습니다.

죽음을 가져온 뒤에 하나님의 사람이 세 번 엎드리자 다시 살아난 아들을 볼 때에 깨닫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은 나의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사는 줄 알았는데 나의 외아들에 대한 관심과 기대와 소망으로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부터 아들이 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 전에는 아들을 직접 껴안았는데 이제는 죽었다가 하나님의 사람이 그 시체에 세 번 엎드렸다가 살아났으므로 아들보다 하나님이 더 가깝습니다. 이제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아들이 살고 있고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면서 아들을 대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르밧 과부의 외아들에 해당되는 소중한 것들을 내가 사랑하고 내가 붙잡고 애를 써서 나아지고 개선되고 좋아지는 게 아닙니다. 사르밧 과부가 외아들을 사랑하듯이 내가 사랑하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병원이라고 했는데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도 아픈 데가 많습니다. 그런데 다른 신체에 비해서 치아만큼은 건강한데 사랑니를 하나도 뽑지 않았습니다. 썩은 이 하나가 없고 가지런합니다. 스케일링을 할 때면 치아건강이 굉장히 좋다고 하면서 의사가 하는 말이 유전이라고 합니다.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말씀을 점점 깊이 깨닫고 하나님과 친해짐이 더할수록 같은 말밑으로 깨달음의 깊이가 깊어집니다.

치아건강도 어머니 뱃속에서 유전적으로 태어나고 치아의 영역에서 적어도 건강함이 내재하는 것은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과 무관하게 건강이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은 불가능하고 불신앙 생각입니다. 나는 태어나기를 치아만은 튼튼하다고 하고 혈압만은 정상이라고 하는 등등의 이런 생각이 불신앙입니다. 치아자체가 건강하기 때문에 괜찮은 게 아니라 지금의 건강함의 상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부터 주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아프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부터 그 아픔이 주어지고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육체를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몸에 가시를 안고 사탄의 말뚝으로 표현할 정도로 심한 고통가운데 있었지만 그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지금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한 번 더 만나게 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우리의 병원입니다.

 

그러면 병원에는 가지 말라는 것이냐? 의사들은 다 필요 없느냐? 건강을 위해서 병원을 동원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몸에 난 병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먼저 기억할 때 하나님께서 내 몸에 난 병을 하나님이 치료하시는데 방법을 병원으로 택하실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고 시력을 회복한 맹인을 고치실 때 흙을 침으로 이겨서 눈에 발랐습니다. 그런 방법이 아니면 고치지 못하시겠습니까? 그런데 그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