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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타락의 동일시, 구원의 동일시_태승철

by 태승철 · 16-09-21 09:49 · 7,877

동일시(Identification)는 거의 자동적이며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지속 되는 일종의 정신과정입니다. 동일시를 통해 사람은 삶의 방향을 얻기도 하고 인격의 성숙과 정신 발달을 꾀하고, 한 인격으로서의 여러가지 속성을 획득하거나 배우게도 되지요. 그런데 십자가복음을 받아들이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단 하나의 동일시를 제외하고 모든 다른 동일시는 포기 되어야 하지요. 이 단 하나의 동일시를 통해 동일시로 타락한 상황이 구원과 승리로 전환 됩니다.

타락의 동일시, 구원의 동일시

(열왕기하 3:20~27)

 

 

21. 모압의 모든 사람은 왕들이 올라와서 자기를 치려 한다 함을 듣고 갑옷 입을 만한 자로부터 그 이상이 다 모여 그 경계에 서 있더라

22. 아침에 모압 사람이 일찍이 일어나서 해가 물에 비치므로 맞은편 물이 붉어 피와 같음을 보고

23. 이르되 이는 피라 틀림없이 저 왕들이 싸워 서로 죽인 것이로다 모압 사람들아 이제 노략하러 가자 하고

24. 이스라엘 진에 이르니 이스라엘 사람이 일어나 모압 사람을 쳐서 그들 앞에서 도망하게 하고 그 지경에 들어가며 모압 사람을 치고

25. 그 성읍들을 쳐서 헐고 각기 돌을 던져 모든 좋은 밭에 가득하게 하고 모든 샘을 메우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길하레셋의 돌들은 남기고 물매꾼이 두루 다니며 치니라

26. 모압 왕이 전세가 극렬하여 당하기 어려움을 보고 칼찬 군사 칠백 명을 거느리고 돌파하여 지나서 에돔 왕에게로 가고자 하되 가지 못하고

27. 이에 자기 왕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데려와 성 위에서 번제를 드린지라 이스라엘에게 크게 격노함이 임하매 그들이 떠나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타락의 동일시, 구원의 동일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타락의 동일시, 구원의 동일시

동일시(identification)’는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정신과정일 것입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동일시를 하고 있는 것이고 동일시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처음 태어나서 어머니가 자기를 안고 있는 모습을 거울을 통해 볼 때에 자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동일시를 통해서 사람은 성숙해지고 정신적 발달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사람의 후천적 속성도 동일시를 통하여 습득되게 됩니다.

이 동일시는 영적으로 성경적으로 신앙적으로 볼 때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태초에 에덴에서 인류는 타락하여 불행한 죄악 가운데 처하게 되었는데 인류의 비극이 바로 동일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에덴에서는 동일시 대신에 하나님과의 연합이 요청되었기 때문입니다. 연합과 동일시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서 아들이 훌륭한 아버지의 모습을 동일시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들이 아버지와의 동일시를 통해서 훌륭하게 자랐더라도 아들은 결국 아버지를 떠나 자신의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러나 연합은 동일시와 달리 끝까지 함께 결속되어 살아가는 것인데 에덴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연합이 요청되는 장소였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은 사람은 선악을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선악을 판단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데 나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어제 말씀드렸던 미션 프로히비티드(prohibited)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악을 판단해야 살지만 선악을 판단하지 않도록 권유되었던 것인데, 이 미션이 수행될 때에 판단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내게 돈 문제가 있지만 좋다 나쁘다 판단하지 않는 이유는 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해서 하나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돈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 적용되고 실행되는데 이것이 에덴의 삶이었습니다.

 

이렇게 연합해서 살고 있었던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온 사탄은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 아닌 너도 하나님처럼 되라고 하는데 하나님과 동일시할 것을 제안한 것입니다.

집나간 탕자처럼 아버지 밑에서 지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처럼 주권을 발휘할 수 있는 독자적 삶의 영역을 추구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을 가지시고 판단대로 다스리시는 것처럼 나도 다스리는 영역을 가지는 것이 좋다는 사탄의 말을 합당하게 여겨 동일시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처럼 되어 다스리고 주관하겠다고 시작된 인간의 삶의 특징은 동일시입니다.

부자가 좋다는 선악의 판단을 통해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고 비전을 가지고 동일시합니다.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읽고, 순복음 교회의 조용기 목사님의 18번처럼 외치던 말씀대로 바라봄의 법칙을 가지고 마음에 부자가 된 자기의 모습을 인정하고 긍정하는 것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목사님들도 목회자 세미나를 합니다. 세미나의 강사님들은 다 큰 교회를 이룬 목사님들입니다. 저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은 할 말이 많더라도 목회자 세미나에 불러주시질 않습니다. 목회를 크게 개척해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큰 교회 목사님들만이 강사를 하게 될까요? 그래야만 자기 동일시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저 같은 사람과는 자기 동일시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골 강릉에서 혼자 카메라보고 떠드는 사람과 동일시하려는 사람이 없을 것인데 이 동일시가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도 동일시 아닐까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동일시가 문제이지만 동시에 동일시를 통해서 믿음이 가능합니다.

동일시를 통해서 인간은 타락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아들과 동일시를 통하여 구원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탄의 말을 듣고 살아계신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동일시함으로서 타락한 인간은 동일시가 근성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한 인간에게 구원의 길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동일시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마음에서 동일시를 하여 타락했으니 구원을 받기 위해서도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과 동일시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십자가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그와 같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 드디어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와 에돔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모압을 정복하러 갑니다. 그러나 물이 없어서 위기를 겪을 때에 그나마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기억해서 위기를 극복합니다. 비록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전쟁을 시작하지는 않고 왕의 신분으로부터 주어진 임무에서부터 시작했지만 뒤늦게나마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를 찾게 되어 엘리사로 하여금 그렇게라도 하나님을 찾는 여호사밧의 얼굴을 보아서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승리가 전달됩니다.

 

16절에 그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라고 해서 연못 같은 물웅덩이를 많이 파자 물이 넘치게 되어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는데, 아침에 소제 드리는 시간에 아침 해가 뜨면서 흘러넘친 물이 붉게 빛나는 것을 보고 모압 진영에서 피로 오인하게 됩니다.

그럴만한 이유는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와 에돔은 역사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사밧 왕과 아합 왕 때부터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되었지만 언제든지 갈라설 여지는 있었습니다. 또한 에돔은 남 왕국의 지배하에 속국처럼 되어있었기 때문에 독립을 원하고 있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세 나라는 여차하면 서로 칼을 들이댈 만한 사이였고 모압으로서도 그러한 자멸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태양 빛으로 붉게 물든 물이 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그렇게 해석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본 모압 사람들이 무슨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세 왕이 서로 칼부림을 한 것으로 여겨 방심하고 왔다가 공격당해서 모압은 진멸할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모압 왕은 칼 찬 군사 칠백 명을 거느리고 가장 약해 보였던 에돔 왕이 있던 쪽으로 돌파하려고 시도했으나 그나마도 실패합니다.

 

그러자 모압 왕은 싸움을 포기하고 성 높은 곳으로 들어가 연합군이 다 보는 가운데 자기를 이어서 왕이 될 맏아들을 잡아 죽여서 그모스 신에게 번제로 바칩니다. 아들을 죽여 토막 내고 불태워 그모스 우상 앞에 바친 것입니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 군대에게 크게 격노함이 임하매 그들이 떠나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더라고 합니다. 싸우다 말고 코앞에 있는 승리를 두고 돌아가 버렸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 격노함이 하나님의 격노하심이었다면 아들을 죽여 불태우는 인신제사를 내버려두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살아있지도 않은 그모스 신의 격노도 아닐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계속 전쟁을 했더라면 모압 왕과 그 아들을 자신들의 손으로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압 왕이 성 위에서 자신의 맏아들을 죽이는 것을 보게 되자 상황이 역전됩니다.

모압 왕과 그 맏아들은 이스라엘의 군대가 죽이거나 사로잡아야 될 적의 수장이었는데, 그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광경을 보면서 그들을 더 이상 적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연극처럼 눈앞에서 펼쳐졌습니다. 그 순간에 이스라엘 군의 각자의 마음속에 아들을 두고 있던 모든 아버지들에게 모압 왕과의 동일시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크게 격노함이 임했다는 것은 모압 왕의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감정이입을 통해서 동일시를 통해서 이스라엘 군인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는 것입니다. 모압 왕이 얼마나 화가 났으면 자기 왕위를 이을 맏아들까지 죽일지를 생각하니 전쟁을 끔찍하게 여기게 되었고 전쟁을 수행할 힘을 잃게 된 것입니다.

모압 왕이 스스로 아들을 죽였을 때에는 더 이상 적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이 된 것입니다. 이토록 모압을 밀어붙인 것이 자신들이었기 때문에 전쟁의 명분이 사라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를 몰아붙여서 내가 나의 아들조차 죽여야 될 상황이 된다면 어떨지를 생각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전쟁의 승리를 코앞에 두고 다 돌아섰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떠한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정말 기가 막히는 책입니다.

 

20절에서 물이 넘치게 된 시간을 아침이 되어 소제 드릴 때에라고 부각시켰습니다.

아침 소제는 상번제를 뜻하는 것입니다. 상번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어린양을 잡아 번제와 함께 소제를 드립니다. 이러한 상번제는 선민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무리 멀리 떨어져서 살고 어디에서 살든지 죽어가는 어린양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동일시가 도대체 어떤 것이냐를 오늘 모압 왕이 아들을 죽이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전쟁에서의 승리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조차도 그것을 중도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동일시의 효과입니다. 상번제의 동일시가 뜻하는 것도 어린양과 함께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므로 조금만 더 하면 전쟁의 승리가 주어지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정도로 죽으라는 것이고, 이 동일시가 끊임없이 아침저녁으로 반복되며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1868년에 프러시아의 선교사였던 클라인(F. A. Klei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트랜스 요르단의 디본에서 모압 비석을 발견했습니다. 이 비석에 따르면 모압이 북 왕국 이스라엘의 지배권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데 그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전쟁을 중도 포기한 사건입니다.

 

이 상번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입니다. 모압 왕은 아들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면서 내가 내 아들을 죽이는 자기 동일시가 일어나야만 합니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 되어야 내가 맏아들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내가 맏아들을 죽이는 그런 상황이 주어질 때에 이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인데 이게 정상입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고백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죽이시는 사건이고 그 사건을 바라보면서, 나도 이건희 씨처럼 되고 빌게이츠처럼 되는 나의 타락으로 반복하던 동일시를 멈추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그 상황을 동일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맏아들을 죽이는 상황보다 심각한 상황이 어디 있겠습니까? 승리를 코앞에 두고도 포기했던 이스라엘처럼 이 상황에서 우리는 세상의 어떤 일도 추진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심각한 일이 있더라도 그 상황이 내 아들을 죽여야 되는 상황보다 심각할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내가 죽을지언정 어떻게 하면 내가 내 아들을 죽이는 상황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외아들을 죽이셨는데 자기 동일시를 하라는 것입니다.

 

아침이 되어 소제 드릴 때에 물이 넘치는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상번제를 생활화할 것을 중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상번제에서 타락을 이끌어 낸 동일시를 적용함으로써 타락한 내가 죽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고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코앞에 둔 승리를 중도포기하고 돌아간 것처럼 모든 일에 대해서 죽어야만 나의 삶은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면서 판단하시고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미션 프로히비티드를 온전하기 이루기 위해서는 십자가 사건에 완전한 동일시가 이루어져야 됩니다.

매일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고 외우면서도 그 아들을 죽이신 아버지의 심정은 모르고 있는데 동일시를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그대로 받고 죽으셨습니다. 나를 향하신 진노는 외아들을 죽이실 정도로 큰 진노였습니다. 내게 와야 될 그 진노를 주님께서 받으신 것인데 이 보다 더 큰 사건은 없습니다.

사업이 망한다고 해서 내 아들을 죽여야 될 상황보다 급박하진 않습니다. 암으로 죽게 되었다고 해서 내가 외아들을 죽여야 될 상황보다 급박하진 않습니다.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언정 왜 외아들을 죽이겠습니까? 하나님과의 자기 동일시가 일어나면 세상에 대해 맥이 풀려야 정상입니다.

어떠한 상황이었기에 하나님 아버지가 나대신 외아들인 주님을 십자가에서 죽이셨을까? 이것은 나를 죽은 것으로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