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0,1)복음방송

성령! 충만 대신 조금씩만 더 받기_태승철

작성일
16-09-22 10:06
작성자
태승철
조회
7,691

'성령'하면 으레 '충만'이 따라 붙습니다. 게다가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셔서 정말 많이 구해도 봤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이나,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현장에서와 같은 성령 충만은 솔직히 아직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또 이런 상황은 나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대체 하나님은 왜 이렇게 성령충만에 인색하실 까요? 이런 인색하심의 이유는 바로 하나님 경외 때문입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이냐고요? 이제 함께 살펴봅니다.

성령! 충만 대신 조금씩만 더 받기

(열왕기하 4:1~7)

 

 

1.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그의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하니

2. 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 그가 이르되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니

3. 이르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4.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하니라

5. 여인이 물러가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그들은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6.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아들이 이르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7.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말하니 그가 이르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성령! 충만 대신 조금씩만 더 받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성령! 충만 대신 조금씩만 더 받기

성령 충만하게 받는 대신에 성령을 조금씩만 더 받자는 내용입니다.

성령 충만이 왜 그렇게 안 되는 것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웬만큼 믿은 분이라면 성령 충만을 구해보지 않으신 분은 안 계실 것입니다. 저도 성령 충만을 너무나 강렬하게 열심히 오랫동안 반복해서 구했는데도 불구하고 성령 충만한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보는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이나 오순절 성령강림의 현장과 같은 성령 충만함이 도무지 경험이 안 되므로 이제쯤은 한 번 질문을 해봐도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운데 말로 다 할 수 없이 진심으로 부족함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족함 때문에 성령 충만을 안 주신다고 여기기에는 성경의 증언들이 용납하질 않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나 사도들은 성령 충만을 받을 당시에, 성령 충만을 간절히 원했지만 오순절의 성령 충만 같은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한 우리들보다 월등하게 훌륭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던 것일까요?

베드로의 사도된 모습은 베드로가 훌륭해서 성령 충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 받고 나서 사도다운 모습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우리처럼 신학교에서 교수님들에게 배운 게 아니라 예수님께 직접 3년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적인 야심을 버리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따르다가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자 도망가고 배신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먼저 찾아오셔서 부르시고 그들이 한 일은 단지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 충만을 구한 기간과 열심에 비하면 이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너무 쉽게 성령 충만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결렸는데도 불구하고 성령 충만이 나타나질 않고 있습니다.

어차피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이전의 베드로와 같이 다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칩시다. 부족했던 베드로에게 성령 충만을 주셨던 것처럼 지금 현재 문제 많은 교회에 허락하신다면 교회의 문제 때문에 무슨 세미나 하고 연구하고 발표하고 누구 탓을 할 필요도 없어질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는다면 나만 좋은 것이 아니라 내 이웃에게도 좋고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다 좋은 일인데 왜 이렇게까지 인색하신 것일까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과 같은 성령 충만의 재현의 횟수는 다다익선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성령님은 우리 안에 이미 내주하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이러한 신앙의 말씀을 전하거나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충만하지는 않은 이유가 있는데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 문제는 여호와 경외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성령 충만이 스데반 집사님이나 베드로 사도에게 임한 것같이 화끈하게 임하지 않는 이유는 여호와 경외와 모종의 관련이 있는 것인데 알아봅니다.

 

오늘 본문은 너무나 잘 알려진 본문입니다. 엘리사의 제자들 중에서 한 사람이 일찍 죽어서 과부가 된 아내가 두 아들을 데리고 살고 있었는데 너무나 가난했고 빚도 있었습니다. 먹고 살자니 빚이 생기게 되었는데 요즘 말로는 생계형 부채입니다.

요즘과는 다르게 그 당시의 과부는 재정적인 능력을 확보할 틈바구니가 없는 사회였습니다. 두 아들도 아직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나이였거나 형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과부가 엘리사를 찾아와서 빚을 갚지 못하게 되어 두 아들이 종으로 끌려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여호와를 경외하였음을 잘 아는 엘리사에게 대책을 좀 세워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3~4절에 이르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하니라라고 합니다.

우선 이 문장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해한 것과 대부분의 주석서에서는 엘리사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보이기에 앞서서 이 여인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많이 받을 수 있는 믿음이 있는지를 시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릇을 많이 빌려오면 믿음이 큰 것이고, 그릇을 적게 빌려오면 믿음이 작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엘리사는 그릇을 준비하고 기름을 부어라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굳이 이웃에게 가서 그릇을 많이 빌려오라는 답을 줄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시험을 내면서 답까지 준 것인데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엘리사가 남은 기름 한 병을 가지고 부으면 빌려온 그릇에 기름이 찰 것이라고 했을 때에 일반적으로 집에 있는 그릇을 모아오는 것이 정상일 것인데 이것이 과연 믿음과 관련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반대로 엘리사가 이웃에게 그릇을 빌려오라는 말을 안했다고 가정한다면, 내가 기름을 많이 모아서 팔겠다는 생각으로 그릇을 많이 빌려왔다면 이것 또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욕심이 머리끝까지 찬 것입니다.

오히려 집에 있는 그릇에나 기름이 차기를 바라는 것이 정상이고 그렇게만 되어도 감사함을 느끼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핵심은 여호와 경외입니다.

본문이 보여주려는 것은 과부가 엘리사를 만난 이후에 그릇을 빌리는 과정에서 믿음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엘리사를 만나러 오기 전까지의 삶이 이미 여호와를 경외하는 믿음의 여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경외라는 것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하나님이 때릴까 두려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돈을 두려워하는데 돈이 없을까 두려워하고, 있는 돈이 사라질까 두려워하고, 내가 돈을 못 벌어서 주머니의 돈이 없을까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좋아함과 같이 가는 것입니다.

즉 경외하는 것은 그것이 내게 없을 때 제일 부담스럽고 두렵고 절망하고 무섭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다 없어도 그것만 있으면 숨통이 열리는 것이고 그것에 대해 갖는 마음이 바로 경외인 것입니다.

6:5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시는데 하나님 경외입니다. 하나님께 마음과 뜻과 힘을 다 드리면 다른 것들에게는 줄 수 있는 마음과 뜻과 힘이 없는 것입니다.

3:17~18절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없는 것이 너무나 많아서 죽을 것 같은데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여호와 한 분 계심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없어질까 두려워하는데 이것이 여호와 경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의 아내가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라고 하는데 진짜입니다. 남편을 가장 우습게 볼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사람은 바로 아내입니다.

더구나 이 선지자는 돈도 못 벌고 빚만 남기고 일찍 죽었습니다. 과부의 힘으로 빚을 갚을 수도 없어서 아들들은 종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부와 아들들이 일찍 죽은 남편과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닌 이유는 그 당시에 북 왕국 이스라엘에는 바알 숭배가 편만하였고, 바알 숭배는 돈을 경외하므로 돈 없으면 죽는 줄로 아는 시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돈을 노래할 때에 이 일찍 죽은 선지자의 남은 가족들은 여호와를 노래하며 살았는데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남편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여보 우리가 너무 가난하지만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잖아. 다른 사람들이 고기 먹을 때 우리는 죽을 먹더라도 고기 없는 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이 없는 것을 더 두려워하자라고 하는 이 말을 아내도 아들들도 그래! 인생은 어차피 여호와 하나님으로 사는 것이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아들들이 종으로 끌려갈 극한 상황이 되자 이들은 엘리사를 찾아오는데 이것이 또한 대단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기쁨의 근원으로 믿고 살았는데 이 정도 상황까지 왔으면 이제는 두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정도는 허락해 주셔야 하지 않겠느냐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알을 찾으며 돈 돈 하고 있을 때 그들이 맞고 내가 실패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었고 당연합니다.

그러나 죽은 남편과 마찬가지로 가진 것이 없는 엘리사를 찾아 왔는데 이것이 여호와 경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 경외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믿음과 체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유일한 기쁨의 근원이심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이 제일 좋고 하나님이 아니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소용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찬물에 손을 집어넣었을 때에 손이 차가움을 느끼는 것처럼 생각과 믿음대로 정말로 좋으신 하나님으로 체감할 수 있다면, 돈이 없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이론으로도 하나님보다 좋은 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변형되신 예수님의 영화로우신 모습을 보고는 이제까지 자신이 좋다고 여겼던 이 세상의 모습을 까마득하게 망각한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체감할 수만 있다면 못 이길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 경외는 하나님이 최고로 좋고 그분이 안 계시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여기는 생각의 믿음이 있고 그 믿음에 대한 체감이 있는데 이 두 가지 요소를 경험할 때에 하나님 경외는 가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체감의 정도가 가지각색이라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현장은 돈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돌에 맞아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늘을 보면서 하나님을 체감하자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이 부자로 산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형통한 삶을 산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다 없어도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살았는데 이것이 여호와 경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질문을 할 수 있는데 믿음과 체감의 간격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최고이시고 거룩하시다는 생각속의 하나님을 믿지만 실제로 체감은 되지 않습니다. ‘거룩은 더 이상 구분되고 구분될 수 없을 정도로 최고로 좋으심을 뜻합니다.

우리가 생각으로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아직 실제로는 체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갈등을 겪거나 분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의 눈앞에 보이는 남편이나 아내를 만질 때보다도 더 실감나게 하나님이 느껴지는데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웃으면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자 밥이 되고 화형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 충만하다면 하나님 경외함에 있어서 인격적인 면이 많이 상실돼 버립니다. 왜냐하면 내가 좀 극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나타날 수가 없고 저절로 기계적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화로움을 보자 다른 것을 다 잊어버리고 두려워했는데 경외입니다. 예수님의 영화로운 모습을 잃어버리면 나는 죽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에게는 어떠한 갈등이나 이 갈등을 넘어서려는 인격적 분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계3:8절에는 빌라델피아 교회를 향해서 칭찬을 하시는데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십니다.

베드로 사도가 두려워 떨다가 성령 충만을 받고 문을 박차고 나간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성령에 의해 장악된 상태였습니다.

그에 비해 빌라델피아 교회는 오순절 사건과 같은 큰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로마의 핍박으로 인해 시시각각으로 죽음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생각으로는 하나님이 제일 좋은 분이라는 것을 믿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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