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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더블 절대성 상실한 웃기는 종교심_태승철

by 태승철 · 16-10-25 10:19 · 7,895
십자가 복음의 입장에서 다른 종교를 바라볼 때 지배적인 감정은 오직 안타까움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적 자기계시가 없는 한 미망 속에 빠질 수밖에 없지요. 오히려 웃기는 종교심은 기독교 교회 안에서 일어납니다. 버젓이 온갖 세상 가치를 마음의 지성소에 품고는 예수님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주장하는 종교심입니다. 너무 기가 막히고 화나서 웃게 됩니다. 더블 절대성과 더블 유일성을 유지하지 못하면 예수 절대성의 주장은 한낱 해프닝일 뿐입니다.

더블 절대성 상실한 웃기는 종교심

(열왕기하 17:24~41)

 

 

24.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

25. 그들이 처음으로 거기 거주할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사자들을 그들 가운데에 보내시매 몇 사람을 죽인지라

26.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앗수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왕께서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옮겨 거주하게 하신 민족들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하므로 그들의 신이 사자들을 그들 가운데에 보내매 그들을 죽였사오니 이는 그들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더블 절대성 상실한 웃기는 종교심>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더블 절대성 상실한 웃기는 종교심

나와 같은 종교가 아니라고 해서 신실한 종교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웃긴다고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당신을 계시하시지 않는 한 그 누구도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심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심을 같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전적인 은혜 위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공로가 조금이라도 섞여있다면 다른 종교의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을 웃긴다고 멸시할 수도 있겠지만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원통하고 분해서 푸념으로 웃을 수밖에 없는 종교심이 있는데 바로 기독교 교회 안에 있습니다. 은혜로만 가능한 에덴을 회복시켜주는 복음의 신앙을 웃기는 해프닝으로 만드는 자들이 있는데 그것도 정통 교단에서 이단으로 정해놓은 자들이 아닙니다.

교단에서 이단으로 정하면 그대로 믿고 또 대충 소개되는 것들을 봐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이단들에 대한 얘기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꾸 이단들 얘기하면서 끌려들어갈 필요가 없는데, 문제는 정통 교단으로 인정하는 기성교단 내에 너무너무 화가 나서 오히려 웃음이 픽 나올 정도의 종교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많은데 지도자들 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십자가 복음에 대한 믿음이 아닌 화가 나서 웃기는 종교심을 갖고 있는 자들이 누굴까요?

예수님을 구원의 길로서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주장하는 자들의 종교심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말씀을 전하는 저는 예수님을 구원의 길로서의 절대성을 주장하지 않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감히 그럴 수 없고 목을 내놓고라도 주장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주장하는 자들이 화가 날 정도로 웃기는 종교심의 소유자인 이유는, 예수님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분들 중에서 많은 분들이 더블 절대성을 붙잡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더블 절대성을 붙잡지 않으면, 예수님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화가 나고 웃기는 그들이 주장하는 예수님의 구원으로서의 절대적 유일성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더블 절대성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연관된 절대성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관된 절대성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항변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 하나님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안 믿는 사람이 없기 때문인데, 그러나 이 맥락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유일성과 절대성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절대성과 유일성이 우리 자신과의 관계에서 갖는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절대성과 유일성도 단지 그 분이 유일하신 절대적 신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에 대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붙잡지 않습니다.

우리와의 관계에서 갖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절대성은 하나님만이 원초적으로 모든 인간의 마음의 공백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어떤 대상으로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우리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요 절대적 존재입니다. 즉 우리 마음의 만족과 기쁨은 하나님만으로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붙잡아야만 합니다.

이것을 붙잡지 않으면 기쁨과 만족은 다른 것을 통해서 얻으려고 하는데 예배당을 잘 지어서 얻으려 하고, 교인의 수를 늘려서 얻으려고 하고, 교회 재정을 풍성하게 해서 얻으려고 합니다. 사업하는 장로님은 돈을 많이 벌려고 하고, 부모라면 자녀를 잘 키워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봉사 충성 박애 평화 평등 혹은 사랑까지도 기쁨과 만족의 근거로 믿으면서 예수님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은 화가 나는 웃기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기쁨과 만족의 근거들이 예수님의 절대성을 아무런 의미도 없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내 마음의 만족과 기쁨의 근거로 믿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 때문에 그 하나님께 갈 수도 없고 하나님을 가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하늘로 길을 내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복음이 되십니다. 유일한 기쁨과 만족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제공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복음이신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모토는 사도 바울의 말씀에서처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었는데, 그러나 제2의 종교개혁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기쁨이라는 단어와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지금 종교 혼합주의와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앗수르의 이민정책에 의해서 사마리아에 이방사람들이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므로 사자를 보내서 몇 사람을 죽게 하시므로, 사마리아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자신들의 믿던 기존의 신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지방을 다스리는 지방 신으로서의 여호와를 섬겨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앗수르 왕에게 전갈을 보냅니다. 앗수르 왕도 각 지방마다 지방 신이 있어서 그 신을 달래고 섬겨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공감해서, 잡아갔던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제사장을 택해 사마리아로 보냅니다. 이방 땅에서 사마리아로 이주해온 이방인들에게 여호와 경외를 가르쳐서 다시는 사자가 와서 사람들을 물어죽이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래 사마리아에 제사장은 있었으나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여 다 망하여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사람이었기에 여호와 경외의 참뜻을 가르쳐 줄 수도 없었습니다.

출애굽이 일어난 것이 약 BC1500 경이었습니다. 이후의 모세시대부터 광야 사십년을 거치고 사사시대까지를 약 500년간으로 묶습니다. 그 후에 BC1000년경부터 사울과 다윗이 통일왕국을 만들기 시작했고 솔로몬 이후에 르호보암 때에 갈라져서 약 200년이 지나 BC722년에 북 왕국이 망하게 됩니다.

계산해보면 출애굽 이후로부터 약 800여 년 동안 선민들을 택하셔서 온갖 기적을 다 보여주시고 말씀을 주시고 선지자들을 보내어 여호와 경외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내와 극진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경외를 하지 못하고 망해버렸습니다.

하물며 사자로 인해 몇 명 죽었다고 해서 여호와 경외를 지방 신을 섬기는 것쯤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르친다고 이들이 진심으로 경외했을 리는 만무한데 하나님은 무엇을 기대하시고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인지 이상하십니다.

 

800년을 이끄셨는데도 선민들이 여호와 경외를 하지 않았는데, 지금 이주해온 사람들이 무슨 수로 여호와 경외를 할 것이라고 기대하시며 사자들을 보내서 물어죽게 하셨을까요?

이는 800년간 온갖 은혜를 받고도 망해버린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와, 방금 이주해 와서 여호와 경외를 배우려는 자들의 마음 상태가 똑같다는 것을 알려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에게 질문이 생기는데 도대체 800년간이나 섭리하셨는데도 여호와 경외가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이고, 도대체 무엇이 그리도 지독하게 여호와 경외를 가로막았느냐는 것입니다.

그 대답으로 여호와 경외가 무엇인지를 알면 됩니다.

경외란 존경하면서 두려워하는 것인데 그 분과의 관계가 깨어지거나 상실되거나 문제가 생길까 전전긍긍하는 마음입니다.

이 경외가 마음의 활동인데 그 자리가 바로 마음의 지성소입니다.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는 우리의 마음의 모양을 본 따서 만들어진 곳이었고, 또한 우리 마음은 성전의 모습이 되어야만 합니다.

즉 지성소에 법궤와 속제소가 있었다는 것은 법궤 안에 말씀의 돌판이 증거가 되어서 상징하고 있는 인격성을 가지신 하나님을 마음의 지성소에 모시지 않은 것이 죄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경외는 궁극적으로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입니다. 즉 어떤 대상이 있을 때 이 대상은 내 마음에 궁극적으로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마음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경외가 안 된 이유는 오늘 본문을 보면 이방인들이 자신들이 본국에서 섬기던 우상들을 다 가져와서 하나님을 함께 경배하는데 종교 다원주의와 혼합주의가 펼쳐지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상태가 하나님께서 800년간을 이끌어 오신 선민들이 망한 상태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 경외는 여호와를 일개 지방 신쯤으로 섬기려는 마음은 마음의 지성소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지성소 바깥의 성소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돈을 경외하므로 돈이 없으면 두려워합니다. 노후를 걱정하는 것도 돈을 경외하기 때문이고 돈이 있어야 산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돈을 궁극적인 만족과 기쁨으로 여겨서 마음의 지성소에 담았을 때에 지성소 바깥의 성소의 상황은 어떤지 생각해봅니다.

 

성소에는 분향단이 의미하는바 지성소에 담은 것을 기도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추구의 목적은 떡상이 의미하는 대로 배부름입니다. 그리고 등대가 의미하는 대로 삶의 밝음에 대한 판단도 지성소에서 나옵니다. 돈을 경외할 때에 돈과 연관된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경외가 800년 간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이들이 마음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족과 기쁨의 근거로 믿지 않고, 이 세상의 풍요와 다산을 만족과 기쁨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립 가능한 가치들을 마음의 지성소에 끌어들인 상태였기 때문에 800년간을 가르쳤음에도 안 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코르크 마개로 봉인한 병이 바다에서 100년이 지나더라도 물 한 방울이 들어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세상의 가치들을 받아들이는 것도 믿음인데, 그럴 때 800년간 하나님이 이끄시더라도 여호와 경외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바라셔서 그러한 마음이 죽을 수 있도록 성전의 번제단을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것을 마음의 지성소에 담은 내가 죽어야 함을 가르쳐 주신 것인데 이렇게 성전의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그 길을 통해 가려는 대상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를 기쁨과 만족의 원천으로 여기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두 믿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으로서 유지가 되어야 기독교는 온전하게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형교회들은 교회를 짓기 위해 교인들의 마음을 예배당 건축으로 몰고 갔는데 이들이 악한 사기꾼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 중에 예수님의 유일성을 주장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들 마음의 지성소에는 돈이나 부흥이 들어와 있습니다. 장로나 목사나 이들은 예수님의 절대성을 주장하면서도 매일같이 교회 재정 탓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꼬방 같은 곳에서라도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서 하나님 한 분만으로 행복해 하는 곳입니다.

매스컴을 보면 교인들의 자살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렇게 된 이유는 교회가 세상보다도 세상적인 가치척도로 승자와 패자를 결정하는 성향이 짙어졌기 때문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의 가치를 얻지 못했을 때 훨씬 더 패배의식을 느끼는데, 하나님을 잘 믿었다면 축복을 받아서 세상의 가치들을 많이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 가치를 못 받은 것을 보니 하나님의 은혜를 못 받은 것이고 잘못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교회 안이 오히려 세상보다도 세속적이 되었기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데 기가 막히는 현실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유일성과 절대성을 주장하되 더블 절대성과 유일성을 주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했는데 사도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그 말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에 관한 이야기만큼이나 기쁨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또한 본래 창조의 시작도 기쁨의 동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야기는 기쁨과 만족의 근거로서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대신에 돈 자녀형통 무병장수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박애나 평등이 들어올 수도 있고,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마음이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다 무엇인가가 내게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라는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바람에 지금 얼마나 많은 오해를 낳고 교회의 부패를 가져다주었는지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그 절대성만을 주장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장되어야 될 절대성은 두 가지인데 하나님만이 이 땅에서 나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기쁨과 만족의 근거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 절대성이 있어야만 예수님의 절대성도 의미가 있습니다.

 

속마음으로는 돈이나 자녀의 형통을 바라며 이 세상 가치들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 화가 나고 웃기는 일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졌을 때에 예수님이 절대적일 이유가 없습니다.

돈이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는 대상으로 믿어지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저 종교적인 사건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절대적 의미를 갖는 구원의 길인 이유는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기쁨과 만족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아하스 왕은 성전 안에 앗수르 식의 제단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기쁨과 만족의 근거임을 잃어버린 채로 예수님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하스 왕이 성전에 앗수르 식의 제단을 지었던 것과 똑같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상화하고 무효화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는 구약적 길이었고 그 성전의 의미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3:2절에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마음에서 하나님 때문에 기쁨을 체감하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믿음은 생각차원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생각으로라도 믿어지지 않는다면 선민이 아니겠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이 기쁨과 만족의 근거로 믿어지고 생각으로라도 동의가 될 때에 선민입니다. 마음의 체감은 십자가를 붙잡고 생활화해 나갈 때에 시간문제임을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종교 혼합주의나 다원주의가 생기게 된 것은 지성소에서의 믿음의 문제가 하나님을 향하지 않기 때문인데 더블 절대성이 동시에 주장되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다면 아무리 예수님 십자가의 구원의 유일성을 주장할지라도 효과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길을 통해서 가야 할 곳은 돈 많이 버는 것이 아니고 큰 교회 짓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 딸 낳아서 잘 먹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야 할 것입니다. 그 목적지의 절대성이 상실된 길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은 화가 나도록 웃기는 종교심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더블 절대성을 순교의 각오로 유지해나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