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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가장 어두운 밤에 친 번개"_태승철

by 태승철 · 16-10-26 10:01 · 8,205
전설적인 복서 알리의 장례식에서 고인을 기리기 위한 한 코미디언의 추모사에 나온 말입니다. 고인이 파킨슨씨 병을 앓고 있는 동안에도 반전, 평화운동가로서, 인권운동가로서의 삶을 산 것을 의식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선민의 존재의 의미를 이보다 더 멋지고 합당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어떻게 내가 가장 어두운 밤에 치는 번개가 될 수 있을까요? 뱀처럼 기어서 돼지처럼 먹는 대신,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면 됩니다.

가장 어두운 밤에 친 번개

(열왕기하 18:1~12)

 

 

1. 이스라엘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삼 년에 유다 왕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니

2. 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비요 스가리야의 딸이더라

3.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4.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5.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6.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7.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8. 그가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고 망대에서부터 견고한 성까지 이르렀더라

 

 

오늘 읽은 말씀 중심으로 <가장 어두운 밤에 친 번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가장 어두운 밤에 친 번개

지난 63일에 74세를 일기로 별세한 전설적인 헤비급 복서인 모하메드 알리의 장례식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 장례식에서 생전에 고인을 알던 코미디언 빌리 크리스탈이 알리의 삶을 추모하면서 미국의 가장 어두운 밤에 친 번개였다라고 기가 막히는 표현을 했는데 정말 멋진 표현이라는 생각이듭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이 내 마음의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근거로 믿으면, 당연히 가장 좋은 생의 길은 죽어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이익이 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만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만족과 기쁨의 근거로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보좌 앞으로 이끌림을 받지 못한 채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 어둔 밤에 치는 번개가 되라고 살려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제 박근혜 대통령이 연설을 했는데 정치 전문가들은 개헌에 대한 발표가 여러 가지 궁지에 몰리고 있는 정세를 타개해 나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처럼 요새 정치인들의 당리당략적 사고에서 나오는 끊임없는 쟁투는 보고 있기가 지칩니다.

회사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밀하게 진단하자면 영적으로 어둡지 않은 공간이 없습니다. 이 어두움은 이북의 도발이나 정치인들의 수준 때문도 아니고 경제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서도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로마의 핍박 속에서도 어두움을 이겨낸 밝음의 삶을 살았고,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얼굴이 천사처럼 빛날 수도 있었습니다. 즉 어두운 이유는 눈에 보이는 환경 때문이 아니라 하늘이 차단된 공간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민들이 하나님을 궁극적이고 유일하고 절대적인 기쁨과 만족의 근거로 믿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땅에 살아있는 이유는, 바로 이렇게 회사 나라 가정 등의 어둠의 공간 속에서 치는 번개가 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선민은 어떻게 가는 곳마다 존재하는 어둠 속에서 치는 번개가 될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이 바로 모하메드 알리가 전성기 시절에 챔피언이었던 리스튼을 도발하기 위해서 했던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알리는 22살에 당시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리스튼에게 도전장을 내면서 그를 도발하기 위해 나는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겠다.”라는 말을 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하면서 22살에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됩니다.

이처럼 가장 어두운 밤에 치는 번개가 되기 위해서는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면 되는데 오늘 본문이 그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가장 어두운 밤에 치는 번개 같은 한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어두운 밤에 치는 번개가 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데 바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것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둠을 밝히는 번개로 살아가지 않고 어둠에 지배당하고 어둠에 먹혀서 어둠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라고 하는 이 구절을 패러디해서 말해보자면 뱀처럼 기어서 돼지처럼 먹으며 산다.’라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아우성치며 사는 삶이 어두운 삶의 특징이고 라이프 스타일입니다.

지금까지 선민들이 이렇게 뱀처럼 기어서 돼지처럼 먹으려 아우성을 치며 살아가는 가운데 남 왕국 유다의 13대 왕이었던 히스기야는 독보적으로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가장 어두운 밤에 친 번개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읽지 않은 9절부터 12절까지를 보면 그 당시의 어두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앞서 언급 되었던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다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북 왕국의 멸망은 모든 사람이 뱀처럼 기어서 돼지처럼 먹겠다는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인 복지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뒤덮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에 이방인들이 들어오고 심지어는 그들이 여호와를 경외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경외는 출애굽 이후에 800년이나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고도 여전히 악했던 선민 이스라엘의 여호와 경외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들의 수준이 방금 전까지 이방신을 섬기다가 사마리아로 강제 이주하게 되어 하나님을 지방 신으로 섬기게 된 자들과 같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선민 속에 거하는 어둠은 하나님께서 선민에게 베푸신 구원의 길 자체를 막고 있기에 더 크고 절망적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 가운데 히스기야 왕은 가장 어둔 밤에 친 번개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먼저 히스기야 왕은 속이 뻥 뚫릴 정도로 시원하게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남 유다의 고질병처럼 끈질기게 근절되지 않았던 산당을 드디어 제거했는데 박수쳐야 합니다. 지금까지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몇몇 왕들이 있었지만 그런 왕들도 산당을 제거하지는 못했었는데 히스기야 왕에 의해서 산당이 제거 된 것입니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산당 예배가 매력을 가지는 이유는 예루살렘에서의 성전 예배가 껄끄럽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말씀의 돌판이 증거 하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생각하시고 말씀하시며 계획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앞에서는 내 생애에 대한 나의 계획과 소원을 마음대로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산당에 가면 말씀의 돌판을 담은 법궤가 지성소에 없기 때문에, 내가 마음에 가지고 있는 소원을 마음대로 소원할 수 있었던 것인데 이것이 산당 제사의 매력이었습니다.

이러한 산당을 제거했다는 것은 다시금 제사를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집중시켰다는 것이고, 내 생에 대해서 생각을 가지고 뜻을 가지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인격을 부인하여 하나님과 연결 될 준비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특징 외에도 눈에 띄는 것들이 있습니다. 4절을 보면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라고 합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놋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놋뱀은 광야에서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이 아니고 그것을 기억해서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추측컨대 과거에 놋뱀을 바라본 자들이 나았던 것을 기억하여, 놋뱀이 질병을 치료하는 효험이 있으리라 믿어 숭배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뜨리고 느후스단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단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작은 의미 없는 놋 조각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즉 놋뱀을 숭배의 대상이 아닌 조소 섞인 단어로서 부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민수기 21장에서 나왔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의 기적을 경험하고 얼마 되지 않아 호르산을 출발해서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고 할 때에 길이 거칠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충분치 않음에 대해서 불평을 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셔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때에 백성들이 모세에게 부탁해서 살려달라고 하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장대에 놋뱀을 매달아 높이 들게 하시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마다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에 뱀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뱀처럼 살았음을 외형화시킨 것이었습니다.

 

뱀처럼 산다.’라는 것은 육체를 통해 만나는 이 세상에 마음의 배를 붙이고 마음의 공백을 땅에서 만나는 것들로 배불리면서 살기 원하는 뱀의 모습을 띄고 있다는 것입니다.

뱀처럼 마음의 배를 땅에 붙이고 기어 다니면서 땅에서 만나는 것을 닥치는 대로 돼지처럼 먹어서 마음의 배를 불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배를 불리고 싶은 욕구 자체는 타락 전이나 후에나 똑같은 것입니다.

다만 타락 전에는 좋다 나쁘다는 판단을 하지 않았음으로 언제나 먼저 만나는 하나님으로 배불러서 에덴동산을 누릴 수 있었으나, 타락 후에는 뱀처럼 땅에 배를 붙이고 기어 다니며 돼지처럼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게 된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마음의 배를 채우기 위해 땅에 배를 붙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연합된 상태였기 때문에 하늘을 나는 마음으로 살았고, 이 땅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을 받아서 그대로 행동할 뿐이었습니다.

마치 벌이 쏘듯이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완전히 바뀌게 되어서 나비처럼 날며 벌처럼 하나님의 뜻을 쏘던 자들이 뱀처럼 땅을 기면서 허기진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돼지처럼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게 된 것입니다.

자식을 기쁨과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삼고 남편 아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를 가도 사명으로 여기는 사람이 없습니다. 회사 생활을 통해서 필요한 만족과 기쁨을 얻겠다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기쁜 자는 회사에 가서도 나비처럼 날아다니고 승진에 대해서도 돼지처럼 껄떡거리며 침을 삼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히스기야 왕은 뱀처럼 기고 돼지처럼 먹는 어둠의 삶으로부터 빠져나와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참 선민다운 모습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어둠 속의 번개처럼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 박자가 맞아야만 하는데 본문 5~7절에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의지, 하나님과의 연합, 하나님에 의한 형통으로 세 가지 박자가 맞아야만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첫째, 여호와를 의지하여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지성소는 성전의 지성소처럼 궁극적인 만족과 기쁨의 대상이 들어오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할지라도 마음의 지성소에 가정을 들여놓았다면, 가정의 평화와 안정된 삶을 위해서 하나님을 붙잡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닙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돈을 만족과 기쁨의 근거로 여겨 마음의 지성소에 들여놓고 돈을 잘 벌기 위해서 하나님을 붙잡는데 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마음의 공백을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돈이나 가정으로 마음의 공백을 채우려고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만 마음의 공백이 채워진다고 믿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인데 절대 착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내 마음이 채워져야 되는 것은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산당을 제거하고,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여신 아세라 목상을 찍어 버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만이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대상으로 믿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통해 삶의 만족과 기쁨과 보람이 느껴지고 행복이 주어진다고 믿으면 그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붙잡고 나서 자식 잘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하나님께 연합함으로서 나타나는 결과대로 관계하면 됩니다.

자녀나 회사나 사업에 대해서 하나님께 연합함으로서 관계해야만 합니다.

의지하는 것은 믿음을 말합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마음의 공백을 채워주실 수 있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근거로 믿는 것이 의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의지가 있으면 하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돈을 붙잡은 사람이 실제로 돈을 추구해서 쥐게 되면 돈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만이 내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다고 믿고 그 믿음이 지속되는 한 실제로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들어오셔서 나를 채워주시는 연합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연합함으로서 나타나는 증거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명령이 하나도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마음에 내 나름대로 다른 것을 좋아하는 것들이 있다면 하나님과의 연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돈 권력 건강이나 혹은 추상적으로 평화 박애 등에 사로잡혀 있는 한 땅을 떠날 수는 없고 연합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사랑이나 박애라고 할지라도 진정으로 거룩한 삶이 아닌 기껏해야 이 땅에서 남들과 차별화 된 삶을 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과 박애는 하나님과 연합된 자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명령이고 계명이기 때문에 이웃에게 행하게 될 때 진짜 이웃 사랑이 됩니다.

내가 내 의지를 가지고 이웃사랑을 통해 내 삶을 보람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돈을 통해 보람을 찾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연합했다면 목숨을 바쳐 사랑하고도 나는 한 것이 없다는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헌신적 삶에 대해 큰 보람과 기쁨을 느끼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연합이 아닙니다.

우리가 목숨을 바쳐 이웃을 사랑할지도 그것이 우리의 공로가 아닌 것은 온전히 하나님과 연합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사랑은 하나님께서 나를 장갑삼아서 하시는 활동입니다.

 

셋째,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형통입니다.

우리가 이 형통에 대해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이 세상의 가치를 뱀이 배를 땅에 대고 기듯이 땅의 것을 붙잡습니다. 마음에서 이 세상의 가치를 붙잡고 먹고 싶어 할 때 그러한 세상과의 연합이 이루어지고 소원대로 되는 것을 형통으로 아는데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으신 것은 불통이 아닌 형통입니다. 하늘로 가니까 형통인 것입니다.

형통은 뱀처럼 기어서 돼지처럼 먹고 싶어 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모든 삶의 순간들이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과정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나비처럼 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세상의 가치들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세상으로부터 날아오를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연합해주십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을 때에 주님과 연합하여 부활과 승천의 과정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주님께서 창세전부터 하늘에 계시다가 이 땅에 내려오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몸을 통해 내려오셔서 이 땅에 당신의 뜻을 벌처럼 쏘시며 사는 삶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통해서 뱀처럼 기다가 나비처럼 나는 자가 되고, 돼지처럼 세상을 먹으려다가 하나님을 먹음으로 배부르게 될 때에, 이 땅에서는 벌이 쏘듯이 하나님의 뜻을 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도 히스기야 왕처럼 어둠이 지배하는 회사와 가정과 나라 안에서 번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뱀처럼 기어서 돼지처럼 먹겠다고 아우성치던 삶으로부터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삶을 통하여 가는 곳마다 어두움을 밝히는 번개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