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books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하나님! 배 째세요!”

by 태승철 · 16-10-28 09:49 · 8,269
'배째라!'는 말은, 저지른 잘못을 책임지거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상황이 되었을 경우 막무가내 식 책임회피를 위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배 째세요!" 라는 표현은 이와는 달리 실제 배를 째라는 뜻입니다. 이는 협박도 요청도 강요도 생떼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배 째시려 준비하신 앞에 내 배를 들여대는 수긍과 동의입니다. 삶의 현장 안에서 잉태되는 수많은 문제들의 해결을 해산으로 비유하자면 답은 자연분만이 아니라 제왕절개라는 의미이지요.

하나님! 배 째세요!

(열왕기하 19:1~7)

 

 

1. 히스기야 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2. 왕궁의 책임자인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장로들에게 굵은 베를 둘려서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

3. 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이 오늘은 환난과 징벌과 모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

4. 랍사게가 그의 주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와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였으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말을 들으셨을지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들으신 말 때문에 꾸짖으실 듯하니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소서 하더이다 하니라

 

 

오늘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배 째세요!>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 배 째세요!’

배를 째라는 말은 쉽게 말해서 무대포의 정신으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져야 될 일에 막무가내로 책임을 회피하는 말입니다. 배짱을 부리거나 생떼를 쓴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니라 실제로 배를 짼다는 뜻으로 쓴 것입니다. 협박이나 요청이나 생떼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배를 째시려고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배를 내어 드리는 수긍과 동의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배를 짼다는 말에는 아기를 출산한다고 하는 비유적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로 아기를 출산할 때에 제왕절개보다는 자연분만이 좋다고 합니다만, 이론믿음이 현장믿음으로 전환되어 살아갈 때에는 제왕절개와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이론믿음으로 고백된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전지전능하심 나를 사랑하시고 자녀 삼으심이 액면가대로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기 위해서는 현장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던 공통적으로 끊임없이 문제가 주어지고 그에 대한 해결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현장믿음이 활성화된 선민의 삶에서 문제가 나타나고 해결되는 과정을 비유로 말하자면 자연분만이 아니라 제왕절개의 모습입니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삶에서 아기가 잉태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기를 해산하는 것으로서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에 자연분만과 제왕절개의 두 방식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현장믿음이 활성화된 상태라면 문제의 해결은 반드시 제왕절개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반대로 자연분만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아직 이론믿음이 현장믿음으로 바뀌지 않았다는 증거인데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러한 말씀을 해주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어제에 이어서 앗수르의 2차 침공이 벌어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기혼 샘 근처에 앗수르의 군대가 진을 치게 되었고, 히스기야 왕은 이 극악무도한 앗수르 군대를 지휘하는 랍사게에게 온갖 모욕을 들으면서도 자신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침묵을 명령했습니다.

그 다음 단계로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보면 히스기야 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 왕궁의 책임자인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등 장로들에게 굵은 베를 둘려서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라고 하는데 신하들을 이사야 선지자에게로 보내어 이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의견을 듣기 원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 왕의 아버지 아하스와 할아버지 요담과 증조할아버지 웃시야 그리고 히스기야 다음의 므낫세 왕 때까지 남 왕국 유다에서 60년가량 선지자 활동을 합니다.

오늘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 2차 침공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듣고 싶어 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강력한 질문 하나를 던져 줍니다.

히스기야는 1차 침공 때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막대한 공물을 바쳤고, 그 이후에 잠재적으로 남아있던 앗수르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애굽과의 동맹을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경우 모두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는데 이제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의견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성전에 들어갔다는 말과 이사야를 찾았다는 얘기는 1차 침공 때나 애굽에 동맹을 요청하던 시점에서는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던 것일까요? 이상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남 왕국의 유다 역사상 몇 차례 없었던 종교개혁이 있을 때마다 끈질기게 남아 있던 산당을 마침내 제거한 성군중의 성군이었습니다. 다윗 왕 다음의 성군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출중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왕이 앗수르 1차 침입의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런 끔찍한 상황에서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러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찾았는데도 왜 이사야 선지자가 앗수르에게 항복하지 말라고 권고 했던 말을 묵살하고 항복했던 것일까요? 이러한 상황에서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막대한 공물을 바치고 애굽에 손을 내민 것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느냐는 것인데, 답은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찾았으나 침묵의 단계가 없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앗수르의 1차 침공이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히스기야 왕의 마음에 들어오자 스스로 판단하며 생각하면서 대책을 마련하게 됩니다. 침묵의 단계가 사라진 것입니다.

앗수르의 침공 자체가 왕의 마음을 뚫고 들어오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사건일 수 있습니다. 마치 사업하는 장로님에게 사업이 망할 위기가 닥치면 그것이 마음을 뚫고 들어오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선민이라면 여기에서부터 일반인과 반응이 다릅니다. 침묵해야 합니다. 침묵하면 충격과 함께 마음을 뚫고 들어왔던 사건들이 다시 마음 바깥으로 밀려나기 시작합니다.

침묵은 판단을 중지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생각은 마음속의 말이고 말은 입 밖으로 나온 생각입니다. 즉 침묵하려면 마음속에 생각이 없어야 하고, 생각이 중단되려면 판단이 정지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는 판단이 되면 대비책에 대한 생각이 이어지게 되어 있고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불가항력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 내 마음을 뚫고 들어왔을지라도 내가 판단을 중지하고 침묵하기 시작하면 마음에서 그 사건은 빠져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현장에 나의 아버지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와계신다는 또 하나의 사건이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이론믿음이 현장믿음으로 전환되는 포인트인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 1차 침공 때와 애굽에 동맹을 요청했을 때의 마음 상태는 침묵의 단계가 없이 그러한 현실을 마음에 담고 스스로 대비책을 마련하려 했던 것이고, 히스기야 왕은 그러한 대비책을 마련하고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안에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의 침공을 담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일 뿐이고, 여전히 그 현장의 주체와 주인은 히스기야 왕이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에 사건을 유지한 채로 침묵의 단계가 존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어떤 방식으로 기도를 드릴지라도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동원되지 않으십니다.

우리 마음이 침묵함으로 충격적으로 마음을 뚫고 들어온 현장의 사건들을 밖으로 내밀 때에 그 사건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오시게 되고, 실제 삶의 현장에서도 스스로 등장하십니다.

우리가 사건을 마음에 담고 대비책을 마련한 대로 하나님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힘으로 대비책이 완수되게 하려고 할 때 절대 동원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히스기야 왕이 성전에 올라가는데 침묵의 단계 뒤에 드디어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는 단계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즉 마음에서 앗수르의 침공 사건이 빠져나가고 하나님이 들어오시게 되자, 이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의견이 있으실 것인데 그 의견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내려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사람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성군인 히스기야 왕조차 침묵의 단계가 없었던 때에는 이사야가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해도 듣지 않았는데 우리도 이제까지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왔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에 대해 하나님의 대답을 해산을 비유로 들려줍니다. 보통 자연분만을 하려면 평균적으로 8~12시간 정도의 씨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1차 침공과 애굽에 동맹을 요청하던 상황들이 자연분만을 위한 고통의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2차 침공을 당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존재함에도 침묵을 통하여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3절의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라는 말씀을 단순히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2차 침공에 대비할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1차 침공 때에 굴욕적인 항복과 공물을 바친 것도 나름대로의 대비책이었습니다. 2차 침공 때에도 또 한 번의 항복을 하든 결사항전을 하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해산할 힘이 없다고 한 이유는 지금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문제는 잉태되어 있는데 침묵하는 자는 자연분만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태를 아이는 낳아야 하는데 해산할 힘이 없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오셔서 문제의 배를 가르는 제왕절개의 단계가 남았습니다.

침묵하는 자는 방책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침묵한다고 문제가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침묵은 하나님의 등장에 대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요청이고, 하나님의 등장을 위한 가장 완벽한 무대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침묵은 내가 그 문제를 당면하지 않은 것처럼 마음에서 몰아내는 것입니다. 판단하지 않으면 밖으로 밀려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침묵은 불교에서 말하는 묵언수행처럼 침묵을 위한 침묵이 아닙니다. 또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묵비권행사와 같은 침묵도 아니고 무감각과 무관심에 의한 침묵도 아닙니다.

침묵은 하나님께서 어마어마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 와계신다는 또 하나의 사건을 세상의 사건보다 우선적으로 내 마음에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의 침묵만이 유효한 침묵이 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의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길만이 하나님께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현장에 와계신 하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실 수 있는 태도는 내가 십자가를 붙잡고 침묵하며 주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왕절개가 이루어지듯이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해결이 되는데 하나님이 문제의 배를 째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6~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사야에게 앗수르의 2차 침공에 대한 대비책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미 문제를 해결할 메스를 손에 쥐고 계셨던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침묵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바라게 되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그것을 알려주십니다. 나중에 보겠습니다마는 결국 히스기야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앗수르의 군대는 자멸하고 마는데 하나님의 제왕절개입니다. 내가 침묵하고 있는 동안에 나는 어떤 문제도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역사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홍해 사건을 보면 앞에는 바다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오합지졸인 이스라엘은 애굽에 저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주신 출14:14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고 침묵을 명하십니다.

46:10절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전능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이론의 하나님을 현장의 하나님으로 알기 위해서는 잠잠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을 돌 때에도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말하지 말고 침묵할 것을 강조했고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러한 침묵을 모르면 믿음은 이론이라는 예배당 울타리 안에 갇히고 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침묵함으로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마음에서 몰아내고,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 이 순간에 와계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에, 우리 삶에서 모든 문제가 해산되는 해결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제왕절개에 의해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침묵하지 않으면 자연분만의 해결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 1차 침공 때에 행했던 굴욕적인 항복과 공물의 바침이었고 애굽에 동맹을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화근이 되어서 2차 침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자연분만의 해결 방법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들일 뿐입니다.

오늘도 수없이 많은 문제들이 내 삶의 현장 안에 잉태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문제가 일어난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급박한 문제와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마음에 받아들일지를 시험하십니다.

예를 들어 사업의 망할 위기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중차대한 사건으로 받아들일 것인지를 선택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더 중차대한 사실이라면 세상사람 모두가 뒤집어질 만큼 어마어마하게 깜짝 놀랄 사건으로 사업이 망할지라도 그 사건에 대해 침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들어오셔서 제왕절개를 하시듯이 문제의 해결을 꺼내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보기위해서는 십자가를 통해 죽음으로서 침묵해야 합니다.

이 정도의 위급하고 절박한 사건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 되심이 더 우선적인 사건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이 세상 사건에 대한 침묵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삶의 현장에 잉태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침묵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제왕절개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 땅에서 성취해 나가시는 신나는 모습을 보며 찬양만 하면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