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0,1)복음방송

내 모든 결점의 근원_태승철

작성일
17-01-18 09:26
작성자
태승철
조회
7,481
가톨릭 교회의 교황이나 기성 개신교 교단들의 총회장을 비롯해서 화계사의 주지 스님까지 대체 결점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결점투성이인 우리 같은 보통 사람도 결점 없는 삶은 살 수가 있습니다. 먼저 수많은 결점들이 하나의 근원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 결점의 근원을 제거하면 됩니다. 간단하지 않습니까? 부자 되고 높아지기를 바라는 승산 없는 싸움 대신에 이제 결점 없는 삶에 생의 목표를 두는 겁니다.

내 모든 결점의 근원

(역대하 8:1~18)

 

 

16.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의 기초를 쌓던 날부터 준공하기까지 모든 것을 완비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전 공사가 결점 없이 끝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 모든 결점의 근원>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 모든 결점의 근원

결점은 모자라고 잘못되거나 완전하지 못한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전 공사가 결점 없이 끝났다고 합니다.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이 결점 없이 진행되고 결점 없이 끝내질 수는 있겠지만, 인간의 인격과 연관 지어서 생각한다면 결점이 없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이 결점 없이 지어졌다는 이 말을 왜 인간의 인격과 연결을 시키느냐는 것입니다.

성전은 인간의 마음의 지성소에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그분의 이름을 붙잡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사람은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만족과 기쁨을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의 이름을 마음의 지성소에 붙잡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것은 하나님만이 내 만족과 기쁨의 유일한 근원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성전의 지성소 안에는 말씀의 돌판이 들어있는 법궤가 있고, 성소에는 우리의 삶을 추구하는 기도를 뜻하는 분향단이 있고 또한 만족을 뜻하는 떡 상과 이 세상을 밝히 분별함을 뜻하는 등대가 있습니다. 성전 바깥에는 야긴과 보아스 두 기둥이 있고 번제단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성전의 모양이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은 우리의 마음을 외형적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성전을 결점 없이 지었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결점 없는 상태가 되었다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며 가리키고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결점 없는 인간에 대해서 쳐다보고 생각하고 논의하게 합니다.

 

가톨릭에는 교황 무류성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교황에게는 오류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교황 개인적 측면의 무류성이라기 보다는 교황 자리에 앉아 교회에 대한 결정을 할 때에 오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개신교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입니다. 가톨릭의 가장 두드러진 오류 중의 하나가 교황에게는 오류가 없다고 하는 이 교황무류성일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죄인으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적 타락에 대해 공감을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리적 차원의 신앙고백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내 삶에서 죄로 인한 증거들이 나타남으로 증명됩니다. 가장 두드러진 증거는 항상 기쁘지 않은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습니다. 그러나 이 의미가 제대로 적용되고 온전한 신앙적 삶을 위해서는 오직 기쁨으로라는 말이 보태지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무엇으로 기뻐할 것인가가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기쁨은 본래 태초 이전부터 하늘에 있었던 것입니다. 태초 이전의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그 유일한 기쁨을 우리가 살면서 받아 누려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기도하실 때에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예수님께서 창세전부터 누리시던 기쁨을 우리도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은 일시적이거나 가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이며 육체가 죽은 다음까지도 항상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영원하다라고 하고 영생이라고 합니다. 영생은 영원한 기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영원한 기쁨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반면에 기뻐할 수 없는 것으로 자꾸만 기뻐하려고 하는 것은 죄의 가장 두드러진 증거가 됩니다. 결국 우리가 이렇게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근본적으로는 우리에게 결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을 성취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나 잘못된 판단이나 부족한 외모까지도 결점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별의별 주사를 다 맞아가면서까지 결점이 느껴지는 외모를 어떻게든 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결점에 찌든 인간을 전제로 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성경이, 이 세상 그 어떤 책에도 없을 만큼 인간의 완전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48절에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도대체 우리가 무슨 수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139절에서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은 좋지만 여전히 우리는 온전하게 될 수 없어 보입니다.

히브리서 1321절에서도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라는 구절이 있고, 야고보서 14절에서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곧 결점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황이 교회에 대해서 교리에 대해서 삶의 복음적 신앙적 윤리기준에 대해서 결정하는 것이 어떻게 오류가 없을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교황무류설을 거부합니다. 그런데 막상 성경에서는 교황뿐만이 아니라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결점에 찌든 인간을 전제로 성립하는데, 성경은 인간의 무결점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데 이 모순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우리의 후천적인 결점은 제외하고 생래적인 결점을 찾아보기로 합니다.

예를 들어 제 경우를 보면 지금은 상관하지 않지만 사춘기 때에 몸에 대해서 다리가 짧은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유치원 때부터 버스에 앉으면 다른 아이들의 허벅지는 내 허벅지처럼 뚱뚱하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뚱뚱합니다. 지금은 뚱뚱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지만 사춘기 때에는 그것이 마음에 한이 맺혀서 어떨 때는 다리가 길어진 저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말고 다리를 짧게 만든 것이 누구이신지를 생각해봅니다. 부모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기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나의 외형이 머리가 크고 다리가 짧습니다. 전신사진을 보면 딱 3등신처럼 보여서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니 하나님께서도 결점이 많으신 분이실까요?

작가의 인격적 결점은 직접 만나서 대화하며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서 드러나는 장점과 단점을 얘기하면서 결점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점 투성이로 만드셨다면 작가이신 하나님도 결점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예를 들어 부모님이 돈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나를 그런 부모님에게서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그것이 나의 결점이 된다면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도 결점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는 결점이 있을 수가 없는데, 내 마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마다 결점으로 느껴지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이냐는 것이고, 또한 후천적인 성격과 인격 속에도 나타나는 결점이 있고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죄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죄의 현실을 결점이라는 단어로 해석함으로서 죄가 어떤 것이고, 십자가를 통해서 결점의 근원이 제거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해봅니다.

본문에서 솔로몬은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있는 인간의 마음을 외형화 시킨 성전을 결점 없이 완성시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모든 조건이 내 마음에서 결점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이고, 또한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에서도 결점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나라 부모 외모 출생지 같은 생래적 결점 요인이든지 나의 인격과 연관된 후천적 결점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근원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생래적인 것들은 결점이 아닙니다. 다리가 짧고 머리가 커서 3등신인 것도 결점이 아니라 다만 내 마음에서 결점으로 느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인격적인 결점과 생래적인 결점의 모든 것들이 하나의 근원에서 나오는 것인데, 대체 어떤 근원이 이러한 것들을 결점으로 느끼게 하는 것일까요?

나를 머리는 크고 다리는 짧게 3등신으로 만드신 분은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셔야 될 신의 자리에 다른 대상을 담을 때에, 그 신격화된 다른 것들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들을 결점 투성이로 바라보게 합니다. 마치 여당에서 어떠한 정책을 내놓아도 야당에서는 무조건 반대하고, 야당에서 무슨 정책을 내놓든지 여당에서는 무조건 반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은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인데, 내 마음이 다른 신을 끌어들여서 붙잡게 됨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결점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온 세상이 성형의 열풍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웬만큼 산다는 사람은 다들 성형을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는 불법적으로 성형하는 야매꾼까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머무는 청와대에조차 야매꾼이 드나드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마음에 다른 신을 품고 있기 때문에 나를 창조하신 본래의 신이신 하나님의 의도가 결점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나이에 비해서 외모도 늙어 보입니다. 비슷한 나이 대의 다른 목사님과 같이 있으면 제가 형님 정도가 아니라 삼촌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것도 결점이라면 결점이겠지만 이것을 결점으로 느끼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이로 인해 마음에서 한탄이 나온다면 제 마음에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모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신이 들어와 있을 때에는 정치권에서 여야가 서로에게 무조건적인 반대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신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난주에 교회개혁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진짜 개혁은 교황의 지배체제에 반대하거나 교회제도를 바꾸는 것으로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개혁에 대한 개념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그 중에서 제일 먼저 바뀌어야 될 개념은 바로 신에 대한 개념입니다.

신을 초월적인 절대능력을 가진 존재로서만 생각한다면 교회는 부패해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그러한 존재로서만 믿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열정과 소원을 이루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 사람을 만드시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판단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판단은 도덕적 윤리적 판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비어있게 만드셨기 때문에 마음은 비움을 채우기 위해 흡입력이 발동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어떤 것을 넣으면 좋을지를 판단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 마음에 충만해질 때에 너무 좋고 기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선함은 객관적인 기준이나 윤리적인 기준으로 옳거나 착하다는 것 이상의 개념입니다. 내 마음에 모셨을 때에 하나님처럼 좋은 분은 없다는 것을 선하시다는 말로서 표현했던 것입니다.

신의 개념은 창조의 과정에서 나타나는데 신의 자리가 있습니다. 이 신의 자리는 내 마음을 채워서 만족과 기쁨을 주는 대상이 들어오는 자리입니다. 믿음은 그러한 대상에 대한 마음가짐입니다. 단순히 교리를 배우는 것이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 교리적인 믿음 또한 바로 이 원초적인 마음가짐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믿음이 행위 이전의 믿음인 것은 하나님만이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구원은 돈이 많아지는 것일 것입니다. 자녀가 내게 기쁨과 만족을 준다고 믿는다면 자녀의 형통이 나의 구원이 됩니다. 구원의 특징은 만족과 기쁨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야 될 신의 자리에 다른 대상을 끌어들이고 신격화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나의 모든 결점이 발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면 머리가 크고 다리가 짧은 3등신이나 다른 사람보다 빨리 늙어가는 것도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결점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하나님으로 기뻐한다면 빨리 늙는 것도 감사의 제목이 될 수 있을지언정 결점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시면 내가 생각하는 소원과 열정들이 다 하나님의 뜻에서 나오는 것들이 됩니다. 모든 결점의 근원은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대상을 집어넣고 신격화함에 있습니다. 오늘 솔로몬의 이야기가 바로 그렇습니다.

 

솔로몬이 이토록 성전 건축에 열정을 들인 것은 자신의 마음을 성전의 모양대로 지키겠다는 결심이었고, 그렇게 했더니 왕으로서의 삶 전반에 걸쳐서 결점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업적을 통해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물론 솔로몬은 결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정략결혼을 했고 마지막에는 이방 여인들의 우상을 섬기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너무나 많은 건축 사업으로 인해 백성들의 세금과 노역의 부담이 커졌습니다. 물론 노역은 가나안 일곱 족속 중에 잔류민들이 맡았다고 할지라도, 결국 솔로몬이 죽고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에 과중한 부담이 발단이 되어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갈라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역대기에서는 전혀 이러한 실정을 이야기하지 않고 업적만을 이야기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성경을 역사책으로 본다면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열왕기서에서 나온 솔로몬의 실정이 역대기서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기록한 저자의 의도를 알아야합니다.

사무엘서는 사울과 다윗을 등장시켜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지켜지는 모습을 다윗이 드러내었습니다. 열왕기서는 사무엘서에서 드러난 다윗의 믿음의 모습을 기준으로 삼아서, 그 뒤를 잇는 왕들과 선민 백성들에게서 다윗의 믿음의 모습이 보여 지는 것이었는데, 결국 이들은 믿음을 지키는데 실패하여 망하고 맙니다. 한편 역대기서는 망한 뒤에 포로시절에 쓰인 책으로 다윗과 솔로몬의 역사를 통해서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에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의 모습을 기록한 것입니다.

단순히 다윗과 솔로몬의 치적이 아니라 이들의 역사적 이야기를 발췌해서 복음을 말하는 것이고,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과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역대기는 역사적인 이야기이지만 연대기적으로 나열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을 반영한 이야기를 위해서 역사적으로 필요한 부분만을 선택하여 사용했던 것입니다.

 

다시 오늘 말씀으로 돌아와 솔로몬이 성전을 결점 없이 지었다는 것은 곧 우리의 마음이 결점 없는 마음이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보고 성전을 생활화할 때에 우리의 마음에는 결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성전의 의미가 완성된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서 우리 마음에 결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모양이 우리의 마음의 모양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내 마음에 기쁨과 만족을 줄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내가 걱정하고 우울해하고 슬퍼하는 이유를 따져보면 내 마음이 무엇을 신격화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내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면 마음에서 아내를 신격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내는 내게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내가 가져야 될 기쁨은 아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창세전부터 있던 기쁨입니다. 그 하나님이 나의 기쁨이 되시지 않는 한 기쁨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창세전부터 하나님 아버지로 인해 기뻐하셨고 또한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창세전부터 예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의 자리로 우리를 끌어올리시는 것입니다.

자녀 때문에 걱정이라면 자녀를 신격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나를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다른 신을 마음에 모시고 있을 때에 거울을 보면 내 머리 끝부터 발끝 까지가 결점으로 보이고 내 삶의 형편도 다 결점으로 보이는데, 하나님이 모르시는 사이에 이러한 일이 일어났고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 내게 이런 형편을 주셨겠습니까?

이 모든 것들을 결점으로 느끼는 이유는 하나인데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을 신격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눈과 귀로 손으로 접하는 것들을 마음의 기쁨의 근원으로 채택하고 신격화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이 기쁨과 만족은 하나님만의 몫입니다. 만족과 기쁨을 주는 대상이 신입니다.

이 신의 자리는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만이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주십니다. 이 자리를 다른 것들에게 넘겨줄 때에 우리의 삶은 결점 투성이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서 다른 것을 신격화하려는 내 마음이 끊임없이 죽고,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만을 마음의 유일한 기쁨과 만족의 원천으로 믿으며 살아갈 때에 내 삶은 무결점의 삶으로 이루어져나갈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무결점의 삶을 여생동안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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