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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복음 효과를 위한 최종학력(?)_태승철

by 태승철 · 17-01-19 09:55 · 7,587
교회와 신앙이 생명력을 잃어가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다음 구절에 대한 오해일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 주님이신 예수님의 이름은 누구든지 입으로 부를 수 있지만 그렇게 했다고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효과가 실제로 나타나도록 예수 이름을 부르려면 조건이 필요합니다. 독특한 최종학력(?)입니다. 이 특별한 최종학력 없이 예수 이름 부르는 그 누구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복음효과를 위한 최종학력(?)

(역대하 9:1~31)

 

 

22.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의 모든 왕들보다 큰지라

23. 천하의 열왕이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보기 원하여

24. 각기 예물을 가지고 왔으니 곧 은 그릇과 금 그릇과 의복과 갑옷과 향품과 말과 노새라 해마다 정한 수가 있었더라

25. 솔로몬의 병거 메는 말의 외양간은 사천이요 마병은 만 이천 명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

26. 솔로몬이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블레셋 땅과 애굽 지경까지의 모든 왕을 다스렸으며

27.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 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하였더라

28. 솔로몬을 위하여 애굽과 각국에서 말들을 가져왔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복음효과를 위한 최종학력(?)>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복음효과를 위한 최종학력

요즘 최순실의 딸인 정유라의 학력 이야기가 화젯거리입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입학취소가 되어서 영구퇴학조치를 받게 되었고, 연쇄적으로 강남에 있는 청담고등학교에서도 3학년 때에 고작 17일 밖에 출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졸업불가능 판정이 나왔습니다. 결국은 대한민국 국민의 의무교육과정까지인 중학교 졸업자로 최종학력이 정해졌습니다.

군대도 입대할 때에 초등학교 졸업자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대기업에 입사할 때에는 대부분 최종학력을 4년제 대학을 명시하고 있으며, 특별한 기술 분야에서는 전문대학 이상이나 실업계 고등학교졸업자들로 명시가 됩니다.

또 다른 화젯거리로서 여인천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경원 의원, 이혜훈 의원, 조윤선 문체부 장관 등이 서로 사이가 안 좋으면서도 서울대 법대와 정치외교학과를 나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최종학력이 어떠냐에 따라서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갖기도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 복음을 수용함에 있어서도 최종학력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221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라고 하고 로마서 1013절에도 같은 말씀이 나오는데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누구든지 예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라는 이름 자체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그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불러서 구원의 효과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특별한 조건하에서 예수 이름을 불러야 구원이라는 효과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조건이 필요하다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과 대치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은, 단순히 그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른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격이라는 말 때문에 완전히 우리의 정통적인 신앙과는 대치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값도 없이 자격도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누구든지 서울대를 들어갈 수 있습니다라고 할 때에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만, 서울대학에서 필요로 하는 조건을 구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서울대학에서 필요로 하는 조건을 구비한 자는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입학을 위한 조건을 누구든지 구비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과 같은 예를 복음에도 적용해봅니다. ‘누구든지 예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습니다.’라는 말에는 예수 이름을 부르기 위한 자격이 필요합니다. 이 자격을 갖추면 누구든지 예수 이름을 부를 때에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서울대학이 요구하는 자격을 갖추면 누구나 서울대학에 들어갈 수 있듯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필요한 자격을 갖추면 누구나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조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서울대학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이 단계에서 이미 누구든지라는 말이 소용이 없어집니다. 한편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한 자격은 누구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이 자격이 없다면 그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효과를 위한 최종학력입니다. 이 최종학력의 준비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믿음의 효과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구원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최종학력이란 무엇일까요?

본문은 솔로몬의 찬란한 영광에 관한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엄청난 명성을 듣고 직접 방문하였습니다. 솔로몬의 지혜와 영광스러움과 부와 이스라엘 나라의 체제의 정비와 성전건축 왕궁건축 등의 소문이 주변의 온 나라로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스바 여왕도 보통 여자는 아니었습니다.

스바는 현재 남예멘의 지역에 위치한 사베안 왕국을 일컫는다고 학자들은 봅니다. 이 나라는 무역업을 통해 번영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요 무역품이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비싼 향료나 각종 보석 또는 황금과 그 공예품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치품에 대해서는 이골이 났을 이 여왕이 솔로몬의 영화를 보고 뒤집어집니다.

우리가 읽은 22절의 말씀을 보아도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의 모든 왕들보다 큰지라라는 말로서 주변의 모든 나라의 왕들이 솔로몬을 부러워 할 정도로 솔로몬의 영화가 극에 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그 보좌를 상아로 만들어서 금을 입혔는데 어떤 나라에도 이와 같은 것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전무후무한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솔로몬처럼 부귀영화를 얻으려면 신앙생활을 잘 하라는 말씀이겠습니까? 그런 말씀이라면 그대로 해서 제2 3의 솔로몬이 나타난 적은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그러한 약속을 위한 말씀이 아니고 우리를 약 올리기 위함도 아닙니다. 솔로몬의 영광은 하나의 과정을 뜻합니다.

고등학교 과정이나 대학교에 석사 박사 과정이 있듯이 솔로몬의 영광에는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군침 흘리며 좋아하는 가치들이 많이 있고 그 가치들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며 살아가는데, 그 성과에 대한 최대치의 성공이 솔로몬의 영광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역사상 이 세상 속에서 군침을 흘리는 가치들을 획득하는 일에서 솔로몬이 일등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재산을 현재의 돈으로 환산해서 세계적인 부자들과 비교해보아도 결코 뒤지지 않겠지만, 오늘 본문은 그런 비교보다는 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다 가진 일등이라는 상징성을 두고 솔로몬의 영화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영광이 과정으로 제시된 이유가 바로 최종학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역대기는 400년 후에 메시아로 오시게 될 예수님에 관한 복음의 이야기를 솔로몬을 통해서 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서에서는 다윗을 통해 나타난 복음적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이미 십자가의 정신이 다윗 에게 들어가서 생활 속에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 다윗의 믿음을 기준으로 후대의 왕과 선민들을 평가하였는데, 결국 그 기준에 합당하게 산 왕도 선민도 없었기에 나라가 망했습니다. 한편 역대기는 이 모든 사람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다윗의 신앙적 삶이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게 될 것임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영광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다윗의 자손으로서 세상에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복음의 효과인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솔로몬의 영광의 과정을 졸업한 자라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최종학력이 됩니다.

세상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 박사 후 과정 몇 개를 마치더라도 솔로몬의 영광의 과정을 졸업할 수는 없습니다. 솔로몬의 부귀영화 면에서 영광스러운 과정을 졸업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졸업은 끝냈다는 것입니다. 끝냈다는 것은 그것으로는 더 이상 아무런 만족과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고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깨닫는 자입니다.

전도서 11~3절을 보면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라고 했습니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여 얻는 모든 것들이 사람의 마음에 무슨 만족을 주며 무슨 기쁨을 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의 모든 노력이 허무할 수밖에 없음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솔로몬처럼 가져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까마득한 목표점만을 향해 갑니다. 솔로몬처럼 될 수 있다고 믿고 가는 사람은 없을지라도 방향은 그 영광을 향해 있습니다. 그 과정을 어느 정도까지 가다가 끝이 나고 가려고 하다가 끝이 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고 있는 한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더라도 복음의 효과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역대기가 오늘 솔로몬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그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고 누리게 됩니다. 다만 그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솔로몬의 영광이라는 과정을 졸업했다는 최종학력의 졸업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믿을 수 있겠고 누가 구원을 받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박사학위가 많아도 솔로몬의 지혜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고, 어떤 부자도 상아에 금을 입혀 보좌를 만들고 은이 돌처럼 흔했고 귀한 백향목이 길거리의 뽕나무처럼 흔하게 만들었던 솔로몬의 영화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러한 솔로몬의 부귀영화를 의미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졸업할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가지더라도,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성경에서는 반드시 이러한 과정을 졸업해야만 예수의 이름을 불러 복음의 효과인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졸업의 방법을 찾아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과 재판정의 귀족들 앞에서 나처럼 되라고 말했던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보기에는 왕과 총독과 귀족들조차도 유급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솔로몬의 영광의 과정을 졸업한 자로서, 그들에게 다음 단계인 복음으로 올 것을 촉구했던 것입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의 과정을 졸업한 자만이 복음을 통해 누리게 되는 기쁨의 출발점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솔로몬처럼 되기 위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복음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졸업에는 생각의 졸업과 체감의 졸업이 있습니다.

생각의 졸업은 생각으로라도 솔로몬의 영광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조차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이는 성령의 역사로서 가능합니다. 성령께서 임하셔서 이러한 생각을 선물로 주실 때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 속에서라도 믿어지는 졸업장이 있어야만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에 구원으로 이어지는 효과를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져다주시려는 구원은 근본적으로 만족과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만족이고 영원한 기쁨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영광은 다른 나라의 왕들이 볼 때에 이 땅에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가치들을 획득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최대치의 영광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7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십니다.

영화가 바로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창세전부터 가지셨던 영광과, 솔로몬이 이 땅에서의 가치를 일등으로 얻게 됨으로써 갖게 되는 영광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13절에서도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가지신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해지는 상태입니다. 이 기쁨은 주님의 영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우리가 그 영광에 참여함으로서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은 솔로몬의 땅의 영광과 다르게 하늘로부터 느낄 수 있는 영광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로 인해 느끼시는 기쁨인 것입니다. 이 기쁨은 이미 창세전부터 존재하던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과 성령님을 통해 느끼시던 그 기쁨에 참여시킬 자들을 만드시기 위해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렇게 창조된 우리가 그 기쁨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씀드린 조건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창세전에 하늘에서 누리시던 영원한 기쁨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오셨는데 그 기쁨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이 땅에서 기쁨을 준다고 믿어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졸업한 마음이라야 합니다.

아직도 돈이 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자녀가 일류대학에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좀 더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고 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졸업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억 만 번을 부를지라도 구원의 효과는 전혀 누릴 수 없습니다.

이 세상 가치로 인해서는 더 이상 기쁨과 만족을 느낄 수 없다는 생각의 졸업장이 있어야 하고, 실제로 이 세상 것들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체감의 졸업장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을 향해 나처럼 되라고 말했던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누리던 모든 권력과 부귀영화가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체감했기에 그러한 권유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졸업장이 없다면 복음은 내 것이 될 수 없고 또한 구원의 효과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주님께서 아버지로 인해 창세전부터 느끼셨던 기쁨에 우리 마음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 세상에서 솔로몬의 영광에 속한 티끌만큼이라도 갖기만을 바라며 침을 흘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을 통한 구원은 결코 주어질 수 없습니다.

 

앞에서 본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라는 말을 한 후에 예수님을 소개할 때에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부르는 것이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부르는 것은 곧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오늘 본문이 그토록 장엄하게 묘사하는 이 땅의 것들을 얻은 솔로몬의 영광에 대해서조차 죽은 것이고 졸업한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빌게이츠가 세계제일의 부자라고 하지만 십자가에서 죽은 나는 그가 졸업하지 못한 과정을 졸업한 것입니다. 빌게이츠의 재산이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생각으로라도 고백하고 인정함으로서 졸업하는 것입니다.

대선주자들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러나 나는 대통령이 주는 기쁨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서 졸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음으로서 솔로몬의 영광의 이유가 되었던 세상의 일등 가치들에 대해서 월반하고 졸업하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건강과 재물과 높은 학력과 형통과 승진을 주시기에 왜 그렇게 인색하신 걸까요? 하나님께서도 답답해서 죽을 지경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기만 한다면 이 모든 과정을 월반해서 졸업하고 창세전부터 있었던 하늘의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는데, 굳이 세상 것으로 인해 기뻐하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있으니 말입니다. 대학교 졸업장을 주시겠다는데 굳이 초등학교 졸업장을 달라는 모양새입니다.

여러분이 왜 돈이 없으신지 아십니까?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처럼 돈이 많았던 사람의 과정을 뛰어넘게 하시기 위해서 돈을 주시지 않고 지독하게 가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생한 것을 생각해보세요.

가수 비와 배우 김태희 씨가 결혼한다고 하는데 그런 선남선녀와 결혼하는 것보다도 더 큰 기쁨이 하늘의 기쁨으로 인해 주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최순실처럼 딸을 IOC위원까지 만들기 위해 나라 전체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기쁨으로 자녀를 키우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좋은 배우자를 찾겠다고 난리이지만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을 졸업하고 하늘의 기쁨으로 배우자를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졸업을 촉구하시는데 우리는 왜 유급생으로 남아있겠다고 아우성을 치는지 참으로 답답할 뿐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효과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솔로몬의 영광의 과정을 졸업했다는 졸업장이 최종학력으로 제출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부르고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최종학력 졸업장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원하시는 최종학력 졸업장을 제시할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