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0,1)복음방송

올리닫기 믿음의 내리닫기 유혹_태승철

작성일
17-02-16 09:54
작성자
태승철
조회
7,096
구약성경을 읽다가 생기는 근본적인 의문은, 왜 신앙적 변절은 유독 선민에게만 일어날까 하는 겁니다. 선민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가나안 족속들의 우상을 섬기는 일은 지겨우리만치 지속적으로 발생하는데 반해 이방민족이 전 국가적으로 기존의 우상숭배를 포기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다는 보고는 단 한 건이 없습니다.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유는 하나님 믿음이 올리닫기인 반면 세상 모든 종교의 신앙이란 내리닫기이기 때문입니다.

올리닫기 믿음의 내리닫기 유혹

(역대하 25:1~16)

 

 

14. 아마샤가 에돔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

1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마샤에게 진노하사 한 선지자를 그에게 보내시니 그가 이르되 저 백성의 신들이 그들의 백성을 왕의 손에서 능히 구원하지 못하였거늘 왕은 어찌하여 그 신들에게 구하나이까 하며

16. 선지자가 아직 그에게 말할 때에 왕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왕의 모사로 삼았느냐 그치라 어찌하여 맞으려 하느냐 하니 선지자가 그치며 이르되 왕이 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신 줄 아노라 하였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올리닫기 믿음의 내리닫기 유혹>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올리닫기 믿음의 내리닫기 유혹

오늘 본문의 내용을 좀 더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제목의 올리닫기와 내리닫기가 무엇인지 낱말의 뜻부터 알아봅니다.

내리닫기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하여 달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전적으로는 힘차게 마구 달리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사용 용례를 보면 그는 답답함에서 벗어나려고 무작정 앞으로 내리닫기만 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주저함과 머뭇거림 없이 지금 상태로부터 곧바로 달려 나가는 것입니다. 거꾸로 올리닫기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향하여 달리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선민 이스라엘의 신앙적 변절을 보는 것이 참으로 지겹습니다. 다윗의 혈통으로 왕위를 이어가는 남 왕국조차도 신앙적 변절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저는 유아세례를 받은 이후로 한 번도 다른 종교의 우상숭배를 해 본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대부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꼭 모태신앙이 아니더라도 신앙을 갖게 된 이후에 다른 종교로 돌아가거나 우상을 섬긴다거나 했던 적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구약의 선민들은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백성들이 전국가적으로 어쩌면 이렇게 쉽게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변절의 현상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한 이후로 한 번도 다른 종교를 기웃거려 본 적은 없어도, 사실 내용적으로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하나님을 변절하고 있는 상태와 똑같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구약이 중요한 것은 이 변절의 이유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 전체도 복음입니다. 구약은 다가올 복음 사건을 가리키고 있으며, 신약은 이미 일어난 복음 사건을 회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역대기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염두에 두고 구약에 일어났던 역사적 에피소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역사를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변절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한 번도 하나님을 변절한 적이 없는 것처럼 살아왔지만, 사실은 믿을 때부터 이미 변절자의 상태로 살아오며 믿는다고 착각해왔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목사나 총회장이나 교황조차도 변절자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쉽게 변절자의 모습으로 빠지게 되는 이유는 믿음의 내리닫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올리닫기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데, 믿음의 출발점에 서보면 예외 없이 내리닫기의 유혹이 다가옵니다. 이 내리닫기의 유혹을 정확하게 직시하지 못하고 되는대로 가다가는, 우리 모두가 다 내리닫기를 하며 내용적으로 우상숭배와 똑같은 일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질이 더 안 좋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남 왕국 유다의 9대 왕인 아마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일곱 살에 왕이 되었던 요아스 왕은 고모부이자 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의 지도하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잘 믿고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야다가 죽자 곧바로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숭배하게 됩니다. 또한 앞에서 본바와 같이 어려서부터 성전에 숨겨져서 자랐고 자기가 수리까지 했고 매일매일 번제를 드리던 성전을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인 아마샤도 아버지와 똑같은 전철을 밟습니다.

2절에 아마샤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내용은 요아스 왕이 배반자들에 의해서 살해당하자 아먀샤는 그 원수를 갚는데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고 그 당사자들만 죽이고 그 자녀들은 살려줍니다. 4절을 보면 신명기 2416절 말씀을 인용하며 그들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버지로 말미암아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각 사람은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새 뉴스를 보면 한 정치인이 청소년 아들의 비행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샤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반역죄를 자녀들에게까지는 묻지 않았는데 이런 면에서 여호와 앞에서 정직하게 행했다고 여겨집니다.

이러던 아마샤가 에돔 땅을 정벌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에돔은 다윗 왕 때 이후로 사실상 유다의 속국이었다가 독립을 했습니다. 이들을 다시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전쟁을 하는데 자국의 군대 삼십만 명에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은 백 달란트(3.4)를 주고 십만 명의 용병을 구해옵니다. 이렇게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선지자가 와서 아마샤를 말립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불안에 떨면서 북 왕국의 군대를 의지한다면 이 전쟁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마샤가 이미 지급한 백 달란트의 은을 아까워하자,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전쟁에 이기게 하시므로 은 백 달란트보다 더 많은 것들을 주실 것이라고 설득합니다. 아마샤는 이 말에 순종하여 고용했던 용병들을 돌려보냅니다. 또한 실제로 에돔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 발생합니다. 전쟁에 승리를 한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돌아올 때에 전리품으로 에돔 사람들의 신들을 가지고 옵니다. 그 당시 전쟁에서의 가장 상징적인 전리품은 그 나라와 민족이 숭배하던 우상을 빼앗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가져온 것만 해도 의아한데 14절에 보면 그것들을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경배하며 분향하였다고 합니다.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가나안 족속이나 이방민족들이 자기가 태어나면서부터 믿던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민족적으로 이방민족이 전 국가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섬기자고 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딱 하나 있는 선민의 나라는 이렇게 쉽게 우상숭배로 변절을 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의 말대로 하여 대승을 거두었는데 왜 패전국의 우상을 가져와서 섬겼던 것일까요? 15절을 보면 그가 이르되 저 백성의 신들이 그들의 백성을 왕의 손에서 능히 구원하지 못하였거늘 왕은 어찌하여 그 신들에게 구하나이까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전쟁을 신과 신의 싸움으로 보았습니다. 힘이 센 신이 자기 백성들을 통해서 승리를 쟁취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에 대한 관점이 이방족속들 사이에서는 팽배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으로 하여금 전쟁에서 승리해놓고 아마샤는 패전국의 신들을 가져다 놓고 자신의 신이라고 숭배했던 것입니다.

아마샤가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되시죠? 그러나 이러한 변절은 우리 안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불상 앞에 절하지 않고 여타의 종교로 바꾸지 않는다고 해서 변절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목사님이 되고 장로님이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는 어렵고 변절이 쉬운 이유를 바로 올리닫기와 내리닫기 말에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앞서 본대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일반 종교들에 대한 신앙의 출발점은 같습니다. 언제나 우리 인간들은 육체를 입고 태어날 때부터 원죄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손으로 만지는 세상의 것들을 마음에 담게 됩니다. 이것이 똑같은 출발점입니다. 이 출발점에서 보통의 종교들은 아무 생각 없이 내리닫기를 합니다.

내 마음에 돈이 들어오고 가정이나 나라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요새 뉴스를 보면 안팎으로 여러 문제들이 터지고 있습니다. 밖에서는 북한의 김정은이 미사일을 쏘고 일본에서는 독도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학교에서 가르치라는 강제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안에서는 대통령의 탄핵문제로 여야와 보수 진보의 부딪침으로 시끄럽고 대통령도 없는 상태로 가고 있으니 나라가 들어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마음 안으로 세상이 들어올 때에 내리달리는 것은 그것을 그대로 소원함을 뜻합니다.

마음에 돈이 들어오면 그대로 돈을 갖고 싶다는 소원에 따라서 행동도 합니다. 돈 버는 방법을 찾고 자기계발 방법을 찾습니다. 이제 내리달리는 중에 효험이 있다는 종교의 신을 붙잡으면 되는 것입니다. 나라가 걱정이라면 마음에 나라를 담고 그 상태에서 진보든 보수든 한쪽 편에 서서 내리달리면 편합니다. 마음에 자식을 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기준대로 내 자식이 형통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가지고 내리달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리달리는 과정에서 효험 있다는 종교의 신을 붙잡기도 하고, 교육방법을 바꾸고 좋은 학원을 찾기도 합니다. 종교를 믿든 무신론자이든 다 내리달리는 삶을 사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세상이 담기면 그 상태에서 아무 생각 없이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쉬운 출발을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미칠 노릇입니다. 마음에 돈이 담기면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하는 소원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소원이 생기면 내리달리고 싶어지는데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돈이 담긴 그 상태를 죽이라고 하십니다. 구약에서는 번제단에서 신약에서는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나의 죽음과 동일시하고 나서 다시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서 아예 하늘로 올리닫기를 하라는 것인데 이것이 어려운 점입니다.

아마샤 왕도 전쟁에서 이기자 그 전쟁의 즐거움을 마음에 품게 되었습니다. 왕으로서 적국에 이길 때보다 더 즐거울 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제는 북 왕국 이스라엘을 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한 전쟁의 승리가 마음에 담기자 그대로 내리닫기를 해버린 것입니다. 그럴 때에 섬길 신이 필요해지고, 마침 에돔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우상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의 신들은 마음 안에 세상 것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해집니다. 이 내리닫기 경쟁에서 1등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요즘 진보든 보수든 여당이든 야당이든 내리닫기를 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 경쟁에서 이기기를 바라며 신을 붙잡으면 됩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 분명히 그러한 이유에서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게 해달라며 기도하는 사람도 있고, 탄핵이 기각되게 해달라며 기도 중인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마샤와 똑같은 내리닫기를 하는 신앙입니다.

왕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마음에 담고 내리닫기를 시작하자 패전국의 우상 따위를 자신의 신으로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리닫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내리닫기를 하는 이 세상과 반대의 모습을 요구하십니다. 내리닫기 경쟁에서 1등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마음에서 하나님을 1등으로 모시는 것이 신앙이라고 하십니다. 마음에 돈을 담은 상태에서는 돈이 1등이 되고, 아마샤처럼 전쟁의 승리를 담으면 승리가 1등이 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내리닫기를 하려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우상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며 제동을 거십니다.

하나님께 돌아오기 위해서는 전쟁의 승리를 담고 있는 마음이 예루살렘 성전의 번제단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마음에 하나님 이외의 것을 담은 것 자체가 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1등하지 못하시는 상태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마음에서 자식이 1등으로, 나라를 1등으로, 건강을 1등으로 담고 마음껏 내리달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소원하며 내리달리지도 못하고 담지도 못합니다. 담았다가는 무조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1등으로 삼으라는 올리닫기 명령 때문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신앙의 변절자가 많은 것이고 오늘 본문에서처럼 타 종교를 향한 우상숭배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세상 것들이 저절로 담기고 그 상태에서 내리닫기를 하는 일은 너무나 쉽습니다. 그러나 내리닫기는 시작이 쉬울 뿐입니다.

돈을 마음에 담고 소원하여 내리닫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를 바라며 기도도 하고 충성도 합니다. 그렇게 사업을 하고 개업도 하는데 잘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자식을 담고 내리닫기를 하는데 뜻대로 쉽게 될까요? 나라를 담은 사람이 내리닫기를 합니다. 그런데 나라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심지어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서 정치 문제로 다투다 분통이 터진 나머지 자살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내리닫기는 시작이 쉽기에 유혹에 빠지지만, 내리닫기 과정에서 지옥을 살게 됩니다.

반대로 올리닫기는 시작은 어렵습니다. 제가 독일어를 공부할 때에 사람들이 하는 말이 영어는 시작이 쉬우나 나중이 어렵지만, 독일어는 시작이 어렵지만 나중은 쉬워진다고 합니다. 실제로 독일어를 공부해보니 그렇지도 않았지만 내리닫기와 올리닫기에도 그런 말을 적용할 수는 있습니다.

내리닫기는 시작은 쉽습니다. 마음에 세상이 담긴 대로 그대로 소원하면 됩니다. 비전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거침없이 내리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지옥의 장애들이 생겨납니다. 걱정 근심 불안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반대로 올리닫기는 시작은 어렵습니다. 마음에 세상이 담긴 것이 죄인 줄로 깨닫고 십자가 번제단에서 죽습니다. 그렇게 죽으면 부활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올리닫기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서 창세전부터 있었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남아있는 몸에 대해서는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께서 이 땅의 삶을 살아주시며 저절로 다 이루어져가는 것입니다.

올리닫기는 시작은 어렵지만 생애 전체를 하나님께서 나 대신 살아주시니 얼마나 쉽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 시작점에서 내리닫기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이렇게 많은 변절자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내용적으로는 실제로 하나님께 등 돌리고 하나님을 23차 내리닫기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채택하는 불신앙적 모습을 띄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내리닫기의 유혹을 극복하고 올리닫기의 신앙이 날마다 순간마다 진행됨으로써 마음은 하늘에서 영세 전부터 있던 기쁨가운데 몸은 땅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에덴가운데 거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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