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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내 삶을 썩게 하는 힘, 자기긍정_태승철

by 태승철 · 17-02-21 09:29 · 7,779
부정부패(不正腐敗)란 바르지 못하여 썩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부정(否定)함이 없어서 부패가 일어난다는 사실에는 눈감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궁극적으로 부정(不正)한 일이 자기긍정(自己肯定)입니다. 자기긍정으로 인해 썩음이 발생하여 악취가 나는 현상이 바로 기쁨과 감사가 사라지고 근심 걱정 불안 두려움 시기 질투 미움 등의 감정입니다. 자기긍정의 매력이 마귀의 속임수임을 깨닫는 순간 복음으로 인한 청명한 삶이 시작됩니다.

내 삶을 썩게 하는 힘, 자기긍정

(역대하 27:1~9)

 

 

1. 요담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루사요 사독의 딸이더라

2.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

3. 그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또 오벨 성벽을 많이 증축하고

4. 유다 산중에 성읍들을 건축하며 수풀 가운데에 견고한 진영들과 망대를 건축하고

5. 암몬 자손의 왕과 더불어 싸워 그들을 이겼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백 달란트와 밀 만 고르와 보리 만 고르를 바쳤고 제이년과 제삼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바쳤더라

6.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 삶을 썩게 하는 힘, 자기긍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 삶을 썩게 하는 힘, 자기긍정

요즘 모든 국민이 부정부패라는 단어를 눈앞에서 실질적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국정농단은 결국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부패현상입니다. 정경유착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일이 지속되는 가운데 뉴스를 볼 때마다 괴롭습니다. 부정부패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지향하는 것을 중요한 깨달음으로 표현하기 위한 이야깃거리가 아니라 실제로 보면 괴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자면 가장 근원적인 부정부패는 우리가 기뻐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부정부패로 인해서 정치적 부정부패, 정경유착의 부정부패, 사회적인 부정부패가 생겨난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여전히 다스리시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피조물로서의 인간에게 나타날 수 있는 최고의 부정부패는 감사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으며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 형편에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겠느냐? 역지사지로 내 형편이 되어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안에서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사는 인간으로서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는 부정부패의 근원적인 이유는 우리의 형편에 달린 것이 아니라 자기긍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나를 긍정하고 있기 때문에 부정부패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정(不正)의 바르지 못함은 나를 부정(否定)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나를 긍정하는 것이 부정(不正)입니다. 모든 부정부패는 나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언뜻 듣기에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기쁨과 감사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때에 생기는 것이지 어떻게 부정적인 마음을 가질 때에 생기는 것이냐고 질문할 수 있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마귀가 쳐놓은 덫 중에서 가장 탁월한 덫은 긍정의 힘입니다. 긍정의 힘은 속임수이고 유혹이며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괴로움은 스스로를 부정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긍정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마귀의 거짓말과 속임수를 유명한 목사님들이 힘차게 따랐습니다. 노먼 빈센트 필(Peale, Norman Vincent) 박사님의 긍정적 사고방식(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것이 긍정적 사고방식의 원조로 지금까지도 계속 유행하고 있는데 마귀의 유혹을 힘차게 추종하는 방식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이야기를 해주는데 내용을 살펴봅니다.

 

오늘 본문은 남 왕국 유다의 제11대 왕인 요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담의 일생을 불과 아홉 절의 짧은 본문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담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웃시야 왕의 아들입니다. 2~3절에 보면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 / 그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웃시야는 요담의 아버지인데 처음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함으로 형통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웃시야의 마음이 교만해져서 스스로 분향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일을 만류하려는 제사장들에게 역정을 낼 때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임하여 나병환자가 되어서 여생을 성전에서 격리된 채로 살다가 죽게 됩니다. 그것을 직접 본 아들 요담의 마음에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새겨졌는데, 제사장들의 일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기록한 대로 웃시야가 정직하게 행했을 때처럼 행하되 아버지와 같이 성전에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말 뒤에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다라는 말을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요담 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고, 아버지 웃시야 왕의 교만함을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정국가인 나라에서 왕이 이렇게 하나님을 잘 섬기는데 백성들이 어떻게 부패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담 왕의 길과 웃시야 왕을 통해서 백성들의 길을 비교해주고 있습니다. 웃시야의 전반부의 삶을 요담이 따랐고 백성들은 웃시야의 후반부의 교만한 삶을 따르고 있어서 부패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긍정과 자기부정에 대한 이야기가 됩니다.

자기부정이라면 도대체 나는 나의 어디를 부정해야 하는 것일까요? 반대로 자기긍정이라면 어느 부분을 긍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성전의 구조로 돌아가 보면 명확해집니다.

웃시야 왕의 전반부를 따르는 삶은 자기부정의 삶이고, 웃시야의 후반부를 따르는 삶은 자기긍정의 삶입니다.

성전의 구조를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성전의 구조는 창조주 하나님의 인간심리학이 집약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의 구조가 성전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성전은 지성소와 성소가 휘장으로 나뉘어져 있고 휘장 앞에 분향단이 있습니다. 또한 성전의 좌우 벽으로는 등대가 있고 떡 상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 상태를 그대로 나타내는 구조인데 우리 마음의 지성소에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합니다.

마음의 지성소 안에 무엇인가가 담기게 되면 반드시 분향단이 상징하는바 기도를 뜻하는 추구함이 나타나게 됩니다. 마음에 담은 것을 실제로 손에 쥐기 위해서 움직이려는 동력이 발생하는 것이고, 떡 상이 뜻하는 대로 그것으로 배부르기 원합니다. 등대는 마음의 지성소 안에 담은 것을 객관적으로 사회적으로 도덕적인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호불호를 판단하는 기준이 됨을 뜻합니다. 이 구조는 누구에게나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자아라고 할 수 있는 내가 남과는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나의 주체적인 인격성이 나타나는 부분은 바로 마음의 지성소에 무엇을 담느냐의 차이입니다. 그것은 선택이고 인격적 주체성이 나타나는 점입니다. 나도 돈을 담고 옆 사람도 똑같은 돈을 담았지만 그것은 주체적인 선택에 의해 결정된 것임으로 그곳에서 자기가 나타납니다. 그럴 때에 돈으로 만족하기 위해 분향단의 의미하는바 추구하게 되고 호불호의 판단 기준도 돈이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분향단과 떡 상과 등대로 상징되는 부분은 모든 인간이 똑같지만, 마음의 지성소 안에 무엇을 담느냐가 차이점이 되는 것이고 이것이 나의 인격성이 됩니다.

웃시야는 지성소를 문제 삼지 않고 분향단에 와서 스스로 분향을 했다는 것은 곧 자기긍정입니다. 웃시야는 왕으로서 마음의 지성소에 돈을 담았을 수도 있고 세력 확장이나 영토의 확장을 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어떠한 마음을 가졌든지 성전에 온 이상 제사장의 인도를 따라서 마음의 지성소에 무엇을 담았는지 검증받게 됩니다. 그런데 스스로 분향을 하려고 했다는 것은 자신의 인격성을 드러내는 지성소의 내용물이 무엇인지를 점검받기 원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긍정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돈이든 자식의 형통이든 마음의 지성소 안에 들어와 있으면 그것을 그대로 긍정하면서 배부르고 만족할 때까지 분향단의 추구함이 일어납니다. 호불호도 마음에 들어온 것들이 기준이 되는데 이것이 자기긍정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삶입니다.

법궤의 덮개가 속죄소라는 이름이 된 까닭은 바로 죄가 그곳에서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대상들을 마음의 지성소에 담았을 때에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돈 권력 자식 사업 건강 등 무엇을 담았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내 마음에 들어왔음을 긍정해버릴 때에 추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썩음이고 부패함이 됩니다. 마음의 지성소는 하나님의 이름만 들어와야 될 자리인데 그곳에 다른 것들을 들여놓음으로 인해서 더럽혀진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흰색(divine white)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께서 변화산에서 보여주셨던 그러한 흰색이 마음의 지성소의 본래 모습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에 세상 것들을 집어넣음으로 인해서 색이 얼룩지고 썩음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 썩음의 증거는 걱정 근심 불안 두려움 시기 질투로 나타나면서 감사가 없어지고 기쁨이 없어지는 곧 부정부패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요담은 그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요담이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였다고 했습니다. 윗문은 왕궁에서부터 성전 뜰로 들어가는 출입문입니다. 일찍이 할아버지 아마샤 왕 때에 북 왕국 이스라엘의 침입을 받아서 무너졌습니다. 이것을 다시 세웠다는 것은 요담은 성전에 들어갔지만 아버지와 같이 성전에서 자신을 긍정하기 위한 분향은 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웃시야의 말년의 자기긍정의 모습을 따라 부패하고 있었습니다. 이 부패가 무엇인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으나 동일한 내용을 기록한 열왕기하 15장에 보면 이 부패함이 곧 산당제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결코 산당제사를 드리기 위해 여호와의 이름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일찍이 사무엘도 그랬고 솔로몬도 기브온 산당에서 제사를 지낸 적이 있기 때문에 다른 우상 숭배에 비해 산당제사에 대한 경계심은 적었습니다. 이 제사의 가장 큰 매력은 자기긍정입니다.

산당제사에서는 성전의 지성소를 통해서 진단할 필요가 없고 번제단이 없습니다. 번제단은 단순한 제사가 아닌 내가 죽는 자기부정의 제사입니다. 반대로 산당제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뇌물을 바치는 제사입니다. 그곳에서 우상을 섬기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제사를 드렸지만 자기긍정의 마음에서 드려졌기 때문에 부패했다고 한 것입니다.

 

요즘 교인들이 마음의 지성소에는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을 담고 분향단에서 추구하는 방편으로 헌금도 많이 낸다면 이것이 산당제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여기에서 부패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을 담지 않고 이 세상 것을 담아도 아무도 그 점을 문제 삼지 않고 긍정을 해주는데 이것이 산당제사의 매력입니다.

노먼 빈센트 필 박사님이 말하는 긍정적 사고방식의 문제도 같습니다. 내 마음에 소원이 있다면 그것이 이루어진 것으로 믿고 바라보는 자기긍정을 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기쁨과 만족이 될 것이라고 믿어서 이루고 싶은 소원을 담는 것이 곧 자아가 됩니다. 큰 소원이든 작은 소원이든 이게 바로 나입니다. 외제차를 갖고 싶어 하는 나를 긍정해버리는 것입니다. 노먼 빈센트 필 박사님은 그러한 모습을 마음에 그리다 보면 어느덧 그러한 현실과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바로 걱정 불안 근심 두려움이 삶을 지배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또한 이것이 바로 마귀의 계책 중에 가장 탁월한 자기긍정의 계책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담은 성전 문을 건축하였습니다. 성전에 출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처럼 직접 분향단에서 분향을 하려 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긍정하고 추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산당제사도 마찬가지로 자기긍정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성전에서처럼 자신을 죽여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에서 벗어났던 요담은 번제와 함께 스스로를 죽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6절에서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라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 때에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평강과 기쁨과 만족과 감사가 삶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자아는 소원에서 비롯됨을 알았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전의 의미는 십자가에서 흡수되고 완성되었습니다. 이 십자가를 생활화하여 끊임없는 자기부정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면서 계속해서 소원을 갖습니다. 갖고 싶어 하고 이루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그러한 내가 죽었음을 끊임없이 인정해 나가야만 합니다. 눈만 뜨면 나는 세상에서 소원을 갖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서 소원을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 주님이 하늘에서 아버지로 인해 누리시는 기쁨과 만족이 나의 기쁨과 만족이 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6절의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만사도 평강 가운데 거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긍정은 매력적이지만 무서운 함정입니다. 십자가생활화를 통하여 자기부정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긍정해주시는 창조주의 긍정이 삶에 임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마귀의 덫인 자기긍정을 뿌리치게 하시고, 끊임없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소원함으로서 내 삶에 궁극적인 창조주 하나님의 긍정하심이 평강으로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