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0,1)복음방송

하나님은 결코 돕는 분이 아니시다_태승철

작성일
17-02-22 13:45
작성자
태승철
조회
7,553
사전은 '돕다'를 "남이 하는 일이 잘되도록 거들거나 힘을 보태다"라고 풀이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를 하나님은 결코 돕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는 일을 가로막아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남'이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은 언제나 이미 우리 마음이 하나님에 대해 '남'이 된 상태의 결과인데 하나님은 우리에 의해 강요 된 이 '남' 되심의 상태를 깨뜨리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돕는 분이 아니시다

(역대하 28:1~27)

 

 

22.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23.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

24. 아하스가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모아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부수고 또 여호와의 전 문들을 닫고 예루살렘 구석마다 제단을 쌓고

25.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다른 신에게 분향하여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더라

26. 아하스의 남은 시종 사적과 모든 행위는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은 결코 돕는 분이 아니시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돕는 분이 아니시다

즐거움 없이 인생을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소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를 따라서 생각하면 삶의 특징은 만족과 기쁨입니다. 만족과 기쁨이 없는 인생의 시간들은 소모와 낭비의 시간이 될 뿐이고, 또한 하나님의 판단 없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생각과 판단은 암중모색이며 착각일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크든 작든 소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지 기쁘기 싫어하고 만족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밀로서의 한 가지 절대적 진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소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방해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소원하고 계획하였으나 되지 않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막으시기 때문이고, 우리가 계획하고 하려는 일을 돕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그 능력과 지혜로 도우신다면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 없고 우리도 기쁘고 즐거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돕지 않으십니다.

돕다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남이 하는 일이 잘 되도록 거들거나 힘을 보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돕지 않으십니다. 사전적 의미대로 남이 하는 일이 잘 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남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남이 되어서 일을 하려 할 때에 돕지 않으십니다. 도와서 잘 되면 끝까지 남으로 남으려 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을 방해하시고 힘들게 하시고 곤경에 처하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요담 왕이 죽고 아하스 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22~23절을 보면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라고 합니다.

아하스 왕의 저지른 범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문자적으로 옮겨보면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라는 부분이 문제가 있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의 나를 돕게 하리라라는 구절에 있습니다. 오직 참 신은 하나님뿐이시지만 이방인들이 섬기는 가짜 신들을 포함하더라도 나를 돕게 하리라는 말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라는 말은 이차적이고 부차적인 잘못일 뿐입니다.

여기서 다메섹 신들이란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전쟁에 나갈 때에 가지고 갔던 이동식 제단에서 섬기는 신들입니다. 아하스는 앗수르에게 침공을 받기 전부터 엄청난 우상숭배를 자행하고 가나안 모든 종교에 빠져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유다를 북 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의 동맹군의 침략을 받게 하십니다. 이들에 의해 거의 패망하여 유다 사람들은 이십만 명이나 포로로 잡혀가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북 왕국 선지자 오뎃을 보내셔서 포로들을 다시 돌려보내게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유다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아하스가 뉘우치지 않자 이번에는 에돔과 블레셋이 침공하게 하십니다. 그러자 아하스는 성전과 왕궁의 기물을 모으고 부자들에게도 재물을 모아 앗수르에 넘기면서 도움을 청하지만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정복을 당합니다.

그런데도 뉘우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을 침공한 앗수르를 동경해서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의 제단을 여호와의 성전 안에 만들고 섬깁니다. 그 신들을 섬김으로서 신들이 자신을 앗수르의 왕처럼 도울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다메섹 신을 섬긴 것은 이차적인 잘못입니다. 더 본질적인 잘못은 이 나를 돕게 하겠다.’는 구절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 마음이 왜 잘못되었는가를 알기 위해 나를이라는 단어를 한 번 들여다보아야 하는데 어떤 상태의 나입니까? 사업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사업하는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직장인이라면 직장에서 승진하고 성과를 낼 수 있기 위해 업무를 돕는 하나님이기를 바랍니다. 엄마라면 나를 도와서 자식을 잘 되게 해주는 하나님이기를 바랍니다. 환자라면 나를 도와서 하나님이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태도를 용납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성전의 평면도를 머릿속에 그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십자가 생활화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야만 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십자가 생활화의 의미가 충만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성전의 평면도를 항상 보면서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것이 굉장한 도움이 됩니다.

성전에는 지성소와 성소가 있습니다.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고 말씀의 돌판이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에도 지성소가 있어서 말씀의 돌판으로 상징되는 가장 소중한 것을 담게 됩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내게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으리라고 믿어지는 대상입니다.

이것을 담게 되면 우리는 분향단이 뜻하는 대로 기도하고 계획하고 추구하고 소원하게 됩니다. 떡 상이 뜻하는 대로 그것으로 배부르고 만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등대가 뜻하는 대로 판단하게 되는데 그것을 얻게 하는 일은 좋은 일이 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나쁜 일이라며 판단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오늘 본문의 아하스 왕은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고 다메섹 신에게 도움을 구하고 있지만 그 근본적인 마음의 잘못은 똑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그런 식으로 도움을 요청한다면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담은 상태인 것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돈을 담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돈을 담으면 실제로 돈을 쥐어서 만족할 때까지 간격이 있는데 지성소에서 떡 상에 이르는 과정 중에 소원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지성소에 자식을 담았다면 떡 상은 자식의 형통함으로 만족하려 함입니다. 그 사이에서 소원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소원이 발생하는 과정 중에 사람에게든지 신에게든지 도움을 요청합니다. 우리는 마음의 지성소에 돈을 담으면 우리 마음이 돈으로 충만해져서 만족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돈으로 채워지는 것을 돕기를 원치 않으시고 당신으로 채우시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 이외의 것을 채운 상태에서 그것으로 인해 만족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고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소원은 지성소에 들여놓은 것으로 마음의 배를 채우는 것을 도우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으로 채우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으로 마음을 채우셔서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기뻐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으로 마음을 채움으로 기쁘고 만족하기를 위해 도움의 기도를 합니다.

 

아하스는 일찍이 북 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에게 침입을 받아서 패배하여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으나, 하나님의 사랑하심으로 인해서 포로를 돌려보내게 하시고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남의 상태가 된 마음을 뉘우치지 않자, 하나님께서 답답한 마음에서 에돔과 블레셋의 공격을 받게 하셨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찾지 않고 앗수르를 의지하지만 오히려 앗수르에게 나라를 수탈당하게 되는데도 앗수르의 신들을 섬겨서 그 신들로 하여금 자신을 돕게 하고자 합니다.

현실은 앗수르의 신들이 그들을 도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의 믿음을 보시기 위해 그들을 통해 섭리하셨을 뿐인데, 아하스는 여호와의 성전에 다메섹 신들의 제단을 쌓고 성전 문을 닫고 기구들을 다 치워버렸습니다. 이가 갈릴 정도로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악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22절에서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라고 하는데 우리도 그렇게 세상 것들에 대해 실패하며 살아가면서도 계속해서 그것들을 소원합니다. 백번 소원해서 한 번 이룰까 말까한 곤고한 삶을 살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버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앞의 6절에서도 나타납니다. ‘이는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는이라는 말은 북 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이 공격해서 남 유다 왕국을 초토화시킨 일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1~5절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지독하게 이방신들을 섬겼는지 그 모습이 나옵니다. 이방신들이 다 우상입니다. 바알을 만들고 섬기는 이유는 바알이 좋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알은 풍요와 다산을 주관하는 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마음에서 좋아하는 돈을 추구하기 위하여 바알을 섬겼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찾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의 지성소에 돈을 담고 떡 상까지 이르고 싶은데 그 사이에 소원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을 때에 하나님을 버리지 않은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대신에 돈을 마음의 지성소에 넣고 떡 상에 이르기 위해서 바알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으로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바알을 섬기는 이유는 마음의 지성소에 돈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버리는 일은 마음의 지성소에서 일어납니다.

내가 지금 자식의 문제로 인해서 기쁘지 않다면 그 순간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본래 기쁨과 만족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이 선민의 고백이어야만 합니다. 나의 기쁨과 만족이 자식으로 인해 좌우된다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돈을 마음의 지성소에서 붙잡는다면 돈을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나는 하나님을 버리게 됩니다. 외제차가 없음으로 인해서 마음에 서운함을 느낀다면 그 순간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진 사람은 외제차가 없다고 해서 서운하고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돕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일단 우리가 무엇인가를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있다면 마음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다른 것을 붙잡고 떡 상의 배부름과 만족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고, 다른 것을 붙잡고 등대의 판단을 가지려고 한다면 또한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삶을 돕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남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바랄 때에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우리 마음이 가득차기를 위해서 예수님이 도우시고 성령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데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하나님으로 배부를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면서 땅과 하늘을 잇는 통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교제하시면서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 마음이 주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고 주님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교제하시는 그 자리에 참여하게 됨으로서 아버지를 가지고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게 되는데 그 일을 주님과 성령님이 도우십니다.

이 일 외에 세상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남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마음에 세상을 품은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하나가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와 관련된 세상일은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말대로 갈라디아서 2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사업을 한다면 이전에는 마음의 지성소에서 사업이 잘 되기를 바라고 돈이 많이 벌리기를 바라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을 모시게 된다면 하나님으로 떡 상의 배부름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을 통해 판단하는 등대의 삶이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이 지상의 삶은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충만하게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수행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이때에 나를 통해서 해야 될 일이 있을 때에 내가 움직이는 것은 일하시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는 말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 내막은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당신의 계획을 수행해나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는 때는 땅에 있는 내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만족하기 위해 추구하고 소원할 때입니다. 이때에 성령님과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원래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윗과 같은 신앙의 선배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하나님께 기도해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여호사밧을 예로 들어보면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에 마음의 지성소에 국가의 안위가 아닌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 왕과 모든 백성이 금식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래서 적진을 향해서 성가대를 앞세우고 군대가 뒤따라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적군들이 진치고 있을지라도 우리 마음에서는 적들보다도 하나님이 먼저임을 드러냈던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그 적군들은 하나님께서 무찌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사밧 왕을 도우신 것이 아니고 그 일을 하나님의 일로서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일과 관계되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마음이 생긴다면 내가 마음속에 하나님 이외의 것을 담고 하나님과 남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끊임없이 죽으면서 주님이 아버지를 가지셨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되기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드릴 때에 예수님과 성령님이 도우셔서 아버지를 갖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 만족해지면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펼쳐나가시는 현장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돕는 대신에 우리를 채우시고 나를 통해 당신의 계획을 세우시려는 아버지의 뜻을 몰라 뵙고 평생 동안 아버지를 남으로 내치는 일만 반복하면서 아버지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이제는 온전히 아버지와 하나 되게 하시고 나를 통해서는 도우심이 아니라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삶이 이루어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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