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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먹어도 되는 포장지라고 막 먹나?_태승철

by 태승철 · 17-03-25 10:12 · 7,427
먹어도 되는 포장지는 주로 녹말 성분이었지요. 최근에는 우유 속 단백질인 카제인 성분의 포장용 필름이 제품화 단계에 있다고 합니다. 식품을 포장지 채로 먹어도 되는 거지요. 그러나 식용 포장지라고해서 그 내용물이 뭔지 모른 채 막 먹어서야 되겠습니까?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육체 연관성은 포장지와도 같습니다. 그 안에 그 사람만의 독특한 인격과 그가 이미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들이 내용물로 들어 있습니다. 약이라면 모를까 독이면 어떡하지요?

먹어도 되는 포장지라고 막 먹나?

(에스라 10:6~44)

 

 

6. 이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일어나 엘리아십의 아들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니라 그가 들어가서 사로잡혔던 자들의 죄를 근심하여 음식도 먹지 아니하며 물도 마시지 아니하더니

7. 유다와 예루살렘에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들에게 공포하기를 너희는 예루살렘으로 모이라

8. 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따라 삼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의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모임에서 쫓아내리라 하매

9.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들이 삼 일 내에 예루살렘에 모이니 때는 아홉째 달 이십일이라 무리가 하나님의 성전 앞 광장에 앉아서 이 일과 큰 비 때문에 떨고 있더니

10.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11.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

12. 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먹어도 되는 포장지라고 막 먹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먹어도 되는 포장지라고 막 먹나?’

우리가 먹는 약 중에 캡슐 형태의 약이 있습니다. 이러한 캡슐은 녹말로 만들어졌으므로 뱃속에서 녹말성분의 캡슐은 녹아버리고 약이 퍼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약 뿐만 아니라 식품에 관련된 포장지에도 사용되고 있었는데, 구멍도 잘 나고 공기와 접촉이 쉽게 일어나기 때문에 음식물을 보관하기 위해 탁월한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농무부의 연구원 두 명이 고민 끝에 우유의 단백질로 포장지를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우유의 단백질이 카제인입니다. 예를 들어 막대 치즈를 포장할 때에 카제인으로 포장하면 포장지채로 먹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 카제인을 스프레이로 뿌려서 개별 포장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슬라이스 치즈에 스프레이로 뿌려서 개별포장 한 후에 묶음으로 판매하는 것입니다. 우유의 단백질인 카제인 성분으로 포장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먹을 수가 있습니다. 물론 내용물의 맛을 저해하지 않기 위해 잘 처리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비유로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가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어서 내 삶의 테두리 안으로 들여놓는 것이 바로 먹을 수 있는 포장지의 식품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먹을 수 있는 포장지로 포장이 되어 있다고 해서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은 채로 먹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연관성을 통해서 사람을 파악합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혹은 나이는 몇이고 어느 단체에 속했는지, 국적은 어디이고 직장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성씨는 무엇이고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또한 어떤 자녀들이 있는지 등이 모두 육체 연관성에 속한 항목들입니다.

이러한 육체 연관성은 내 삶의 영역이 다른 사람을 담을 수 있게 해주는 포장지와도 같은 것입니다. 육체가 없는 귀신이나 혼령들은 나를 지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관계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육체 연관성으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에 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도 계속해서 당신의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율법을 주시면서 사람처럼 말하고 생각하는 인격자로 하늘에 존재하고 계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늘 아버지를 본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게 하는 메시아 속성을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이와 같은 육체 연관성이 포장지가 되어서 관계를 맺게 되면 내 삶은 그 사람을 먹는 것과 같게 됩니다.

문제는 겉으로 보았을 때에 도움이 되겠다고 여겨서 어떤 사람을 내 삶 안에 들여 놓았을 때에 실제로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어떠냐는 것입니다. 내 안에 들어온 육체 연관성의 포장지가 사라지게 되면 인격적 특성이라든지 이미 맺고 있었던 관계가 내 삶 안에서 퍼져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독일 수도 있고 약일 수도 있습니다.

어미두꺼비는 산란기가 되면 그 동안 무서워서 피해 다니던 뱀을 찾아가서 일부러 뱀에게 먹혀버립니다. 먹히면 삼켜진 채로 온 몸에서 독을 뿜어 댑니다. 뱀이 죽고 나면 산란된 알에서 깨어난 두꺼비의 새끼들이 죽은 뱀과 어미의 시체를 먹고 자란다고 합니다. 정말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어미두꺼비 같은 존재를 삼키는 바람에 독으로 죽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집사님은 돈을 잘 버는 남편과 살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장로까지 되신 분인데 이 분은 단순히 한 여자와 결혼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부인 집사님의 육체 연관성 안에는 사업을 하는 오빠가 있어서 남편이 벌어다 주는 모든 돈을 오빠에게 바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10년 동안 벌었던 돈이 모두 빠져나간 후였습니다. 그 일이 드러나자 그 부인 집사님은 자녀 셋을 놔두고 도망을 가서 지금도 찾질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는 나라에 대해서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그 자리는 대한민국 국민들 전체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또한 대통령의 육체 연관성 안에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내용물들이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역대 대통령들의 자녀들과 형제들이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면서 나라의 돈을 빼먹거나 부정을 저질렀던 것을 우리가 보아왔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51.6%라는 과반수이상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을 최순실과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절대불가분의 의존관계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대통령자리에 올렸더니 그 육체 연관성 안에 있었던 최순실이 온 나라에 악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광활한 제국을 형성했었던 칭기즈칸의 몽골이 좁쌀 같은 티벳 나라를 점령했을 때에 티벳의 라마 불교가 그 대제국의 중심부인 몽골의 궁성과 귀족사회를 점령해버렸습니다. 이렇듯 사람이든 단체든 내 삶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곧 그것들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그 안에 있던 내용물들이 내 안에서 퍼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과 결혼한 사람들의 명단을 살펴보았더니 114명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서 제사장이 18명 레위인과 노래하는 자가 10명 일반 백성이 86명이었습니다. 1차포로 귀환 때에 돌아온 5만 명 중에 114명이 이방여자와 결혼했다면 그들이 자녀들을 많이 낳았다 하더라도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오히려 80년이 지나면서 선민들의 불어나는 속도가 더 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방여자들과 그들이 낳은 아이들까지 다 내보기로 결정을 하는데 너무나 반인륜적인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학자들 간에는 이것을 유대주의로 보기도 합니다. 유대주의란 매우 엄격한 율법주의와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특성으로 하는 유대인의 사상입니다. 이러한 유대주의가 에스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비판을 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지금 상황만을 보면 그런 말을 들을 만합니다. 아내와 자녀들을 잘 타일러서 하나님을 믿게 해야지, 이 사람들을 다 내보내 버리면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그러나 이 문제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방 여자도 똑같은 인격자이기에 육체 연관성으로 보자면 말이 통하고 자녀와 남편을 사랑할 것이고 집안의 문제가 생기면 함께 걱정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연관성의 포장지가 녹아 없어질 때에 이방 여자가 이미 맺고 있었던 관계들이 내 삶으로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관계에서 이방의 문화와 우상과 가치관과 세계관이 같이 들어와서 퍼져나가게 됩니다.

처가와 왕래를 할 때에도 아내 쪽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방 문화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관계를 맺으면 또 다시 그 내용물들이 내 삶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앞서 예로 든 장로님의 삶에서 아내와 관계 맺고 있던 처남이 장로님의 돈을 다 가져가게 되었던 것처럼 그러한 영향력이 선민들의 삶에도 주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유대사회 안에 114명의 이방 여자가 들어와서 자녀를 낳고 키우며 살아가게 되는 것은 곧 그물처럼 퍼져있는 유대사회의 관계 속에 이들이 들어오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관계의 통로가 되어서 이방 여자들과 함께 들어온 내용물들이 다 퍼져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천신만고 끝에 지은 성전은 등진 채로 이방문화에 젖어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관계를 어떻게 맺고 살겠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14절에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합니다.

그 당시의 이방 세계는 기독교인이 단 한 명도 없는 세상으로 사도 바울 홀로 향했던 것인데 왜 이방 세계로 전도를 나갔던 것입니까?

에스라는 배타적 유대주의의 창시자가 아닙니다. 이방인 아내와 자녀까지 살려내기 위해서는 내보내야만 했던 것입니다. 남편이자 아빠였던 선민은 성전을 향해서 성전생활화를 집중적으로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방의 내용물을 가지고 있는 포장지인 아내를 통해 삶에서 퍼져나가던 독을 끊어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성전 생활화를 통해서 완전히 하나님으로 충만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어제 두 개의 하늘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성전의 생활화와 그 의미의 완성인 십자가를 생활화 할 때에 이 땅에서 사람과 관계를 할 때마다 그 사람이 들어와 있는 마음상태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426절에서 우리가 그토록 애틋하게 여기는 가족들을 향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같은 의미에서 마태복음 1036절을 보면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체 연관성 때문에 그들을 내 삶 안에 들여놓지만, 그것을 포장한 껍질이 녹아내릴 때에 아내나 남편이나 자녀들 마음에 담겨졌던 이 세상이 내게로 흘러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미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애틋한 가족들은 미워하라 하시고 오히려 내게 원수로 행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마음으로 붙잡고 있는 대상이 이 세상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도 마음으로 붙잡은 것입니다. 그 미워함을 내보내기 위해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마음으로 붙잡고 있는 가족들을 마음에서 내보내기 위해서 미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국 가족을 미워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길이 십자가에서 죽는 길입니다.

마태복음 162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내가 져야 할 그 십자가를 주님이 지셨습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내 십자가이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다니고 그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어서 내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올라가고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마음이 내려와서 당신의 뜻을 펼쳐 나가실 때에 인간관계는 하나님에 의해서 주도되는 것입니다.

회사를 들어가면 철저하게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내 마음을 하나님께로 보냅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마음이 직장에 있는 나에게로 내려오십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나를 먹게 하실 사람들을 선택하실 것입니다. 육체의 연관성을 통해 나를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이는 사람이 있을 때에, 나의 육체의 껍데기가 그 사람 속에서 녹아 없어지면 내가 맺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 사람 안에서 드러나고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는 한 장로님께서 고백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복음을 생활화하는 삶을 살다보니 3년 만에 지금까지 맺고 살던 모든 인간관계가 다 끊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골프 치는 친구들과 고등학교 동창들을 비롯하여 그렇게 맺어왔던 관계들이 끊어지고 완전히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사람들과 말이 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삶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렇게 이전의 관계를 다 끊은 채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과만 모여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세계로 전도를 나갔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리켜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지 않으셨다면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4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도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열심히 십자가를 생활화하여 마음을 하늘로 보내고 대신 하나님의 마음이 땅에 오시게 함으로서 두 개의 하늘을 얻는 것입니다. 두 개의 하늘과 관계를 맺는 일에 주력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나를 먹을 자들을 선별하셔서 나타나게 하실 것이고 관계 맺게 하실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받아서 뿔뿔이 흩어지고 안디옥까지 갔을 때에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방 세계로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두 개의 하늘을 얻는 일이 중단되면 무조건 세상에 대해서는 끊고 다시 하늘에 집중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와 관계를 맺을 자들을 선별하시고 나를 먹는 자를 내 앞으로 보내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가 날로 공고해져서 내가 많은 사람의 먹잇감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