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0,1)복음방송

마귀와의 동행을 그치려면_태승철

작성일
17-03-28 09:25
작성자
태승철
조회
7,541
"혼자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야 멀리 간다" 공감 백배지요. 그러나 '빨리'나 '멀리' 보다 중요한 일이 '바름'입니다. 바른길 가노라보면 혼자일 때도 있고, 함께 라서 마음 놓다가 참담한 끝을 보게도 됩니다. 타인과의 동행 이전에 모든 사람은 각자가 이미 예외 없이 마귀와 동행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 상태를 간과하여 전제한 채로 '함께'를 강조하면 바벨탑 사건이 재현 됩니다. 각자가 우선 마귀와의 동행을 끝내는 것이 바르고 아름다운 동행의 시작입니다.

마귀와의 동행을 그치려면

(느헤미야 1:1~11)

 

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2.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5.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6.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7.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8.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9.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마귀와의 동행을 그치려면>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마귀와의 동행을 그치려면

중동지역에서의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시리아나 레바논 난민들을 유럽이 얼마나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가 한창 뜨거운 이슈였습니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박애정신에 근거하여 국가의 여건이 허락하는 한 많은 난민을 수용해야 한다는 연설을 하면서 혼자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야 멀리 간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을 인용했습니다. 공감이 가는 귀한 속담입니다.

유럽이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고 잘 살겠다고 한다면 빨리 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 난민들이 주위에 포진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불행하면 자신들의 행복도 길게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백만 명이 넘는 난민을 받아들일 때에 독일에도 많은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정치인으로서 훌륭한 기개가 보이는 연설을 하여 이 속담이 인구에 회자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속담의 맥락을 바꾸어 놓고 보면 문제가 있습니다. 빨리 혹은 멀리 간다는 말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은 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바른 길을 가겠다고 애쓰다보면 그 길을 혼자 가야 하는 외로운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른 길이라면 혼자서라도 가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에 따라다녔던 제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혼자 십자가를 지셔야 했지만 그 길이 바른 길이었습니다.

한편 함께하는 것이 때로는 큰 함정으로 작용할 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할 때에 우리는 마음에 안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함께함이 바름을 대체할 수는 없기에 참담한 끝을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이미 마귀와의 동행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원죄 하에서 태어난 인간의 운명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이미 마귀와 동행하고 있으면서 타인과 연합하고 협조하려고합니다. 요즘 정치권에서도 연정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데, 그렇게 함께해서 안심하는 바람에 그 끝은 더욱 더 참담한 결과가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마귀와 동행하고 있는 사실을 모르고 사람들끼리의 연합을 강조할 때에 제2 3의 바벨탑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벨탑 사건은 인류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인간들의 연합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사건에 의해서 인류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마귀와의 동행을 그칠 때에 사람들끼리의 연합도 진정으로 아름답고 멋진 것이 될 수 있으며, 참다운 의미에서 함께함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느헤미야는 3차 포로귀환을 주도한 지도자입니다. 1차 포로귀환이 BC 537년에 스룹바벨과 예수아에 의해서 일어났고, 2차 포로귀환은 그로부터 80년 뒤에 제사장 겸 학사이었던 에스라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또 이로부터 14년 뒤에 경건한 행정가였던 느헤미야에 의해서 3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에서 왕이 마시는 포도주를 담당하는 술 관원이었습니다. 이는 잠자리를 담당하는 자, 음식을 담당하는 자와 함께 굉장히 높은 관직에 해당하는 직분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직에 있었던 느헤미야가 3차 포로귀환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오게 되는 내용이 느헤미야서입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네 개의 수도 중 수산성에 있었습니다. 그 때에 느헤미야가 12차 포로귀환 자들에게 대해 궁금해 하던 차에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라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러한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4절에서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라고 크게 상심합니다.

이미 팔레스타인 땅은 온갖 이방민족의 박물관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단일민족이었던 남 왕국 유다는 바벨론의 의해서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망했는데, 앗수르의 이민정책에 의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많은 이방민족들로 혼합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환자들이 영토를 주장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방민족이 자리 잡고 사는 중에 포로귀환자들이 끼어든 셈이었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이전처럼 나라의 경계를 확정하고 군사력을 키워서 제도를 정비하는 나라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3차에 걸친 귀환이 1차에 오만여 명, 2차에 만여 명 육만 명 정도가 100여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느헤미야는 무엇을 기대하고 이렇게 놀라서 상심했던 것일까요? 일반적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했을 것입니다. 이미 이방인들이 자리 잡고 살고 있는데 그곳을 우리 땅이라고 주장해봐야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당연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느헤미야는 귀환자들의 소문을 듣고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할 정도로 상심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성전이 재건되었다는 말은 들었고 성전 생활화를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전 생활화를 통해서 선민들 각자가 하늘을 얻기를 기대했습니다. 성전 생활화는 선민들 각자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만으로 기쁨을 찾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17절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던 것처럼, 선민들도 성전 생활화를 통하여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과 기쁨은 묶여있어서 기쁨을 찾으려는 것이 곧 사랑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이 아닌 돈으로 기뻐하려고 했을 때에 성전 생활화를 통해 회개하고 다시금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기뻐하십니다. 또한 하박국 선지자가 오직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고 한 것 같이 되었다면 귀환한 자들에게 내려오신 하늘의 힘이 단단하고 강력하게 퍼져나갔을 것이라고 느헤미야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에게 들려온 소식은 귀환한 자들이 여러 민족들에게 큰 환난과 능욕과 수탈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는 것을 듣게 됩니다.

이에 대해 느헤미야는 9절에서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똘똘 뭉쳐서 성전 생활화를 함으로 하늘 기운이 내려오고 그로 인하여 선민의 영역이 확보되고 확장되어가는 삶 대신에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이방인과 섞이고 함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메르켈 총리가 시리아 난민에 대해서 함께할 때에 멀리 간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이 상황에서는 반대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방 족속을 위해서라도 함께하면 멀리갈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방 족속들에게 하늘의 기운을 전하기 위해서라도 그들과 섞여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과 함께 살게 되면서 구박과 압제를 당하게 되었음을 예루살렘 성이 무너졌다는 말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예루살렘 성이 무너졌다는 것은 곧 선민들이 이방사람들처럼 마귀와 동행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에서 느헤미야는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이라는 단서를 붙였던 것입니다. 마귀와의 동행을 끝내야만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마귀와의 동행은 에덴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내 마음을 채워줄 만족과 기쁨의 대상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기쁨을 상징하는 에덴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곧 기쁨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만족과 기쁨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생명의 특징이 만족과 기쁨입니다. 그러나 에덴에서 쫓겨나면서 인간들은 마귀와의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좋거나 나쁜 것을 스스로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의 판단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 벌면 기쁘겠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면 이것이 곧 마귀와의 동행입니다. 자식을 잘 키워서 기뻐하려 한다면 그것도 마귀와의 동행입니다. 목회를 잘해서 숫자적으로 부흥하고 큰 예배당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마귀와의 동행입니다. 목회 현장에서조차 마귀와의 동행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내 만족과 기쁨은 하나님께만 있다고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사업이 안 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내 기쁨이 좌우되지 않고,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만 기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곧 돌아오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업이 잘 되어서 기뻐하려는 마음이 생길 때에도 내 마음의 진정한 만족과 기쁨은 하나님으로만 채워지는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었다고 기뻐한다면 그것 또한 마귀와의 동행이기 때문입니다.

몸에 병이 나도 그 상태에 마음이 빨려 들어가서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몸을 어떻게 인도하실지 2차적인 문제입니다. 우선은 내 마음이 몸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만족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전의 완성인 십자가를 생활화하며 기도하며 근심으로 가득 찬 마음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마음이 자신만만하고 기고만장할 때에도 죽어야만 합니다. 건강하다고 기뻐하는 것은 우로 치우치는 것이고, 병들었다고 슬퍼하는 것은 좌로 치우치는 것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어떤 환경이 주어질지라도 상관없이 하늘의 하나님으로만 기뻐하고 만족하기 위해 하나님을 추구한다면 율법은 저절로 지켜집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의 가치로 만족하기 원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율법은 멀고 부담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율법은 가벼워지고 세상을 사랑하면 율법은 무거워집니다.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라는 기도를 하는데 성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와 동행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금하셨는데, 하나님 이외에 것으로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시기 위해 택한 성전에 와서 생활하는 자들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시고, 예수님께도 또한 하나님에 대해 내 사랑하는 아버지시요 내 기뻐하는 분이시다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기쁨으로 귀결되는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대상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기쁨으로 귀결되는 사랑을 하겠다고 결심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기쁨의 원리를 가지고 살아갈 때에 그들이 모인 곳이 선민의 공동체가 되고 함께 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함께 가게 될 때에 주변의 사람들도 따라가는 함께함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마귀와의 동행이 끝나야만 합니다. 마귀와의 동행이 끝나지 않는다면 가족이 함께해도 기쁠 수 없습니다. 회사에서 동료들과 함께해도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나라와 나라들이 싸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과 중국이 싸우고 일본과 중국이 싸우고 북한과 남한이 대치하고 있습니다. 나라 안에서도 평안하지 않습니다. 미국은 미국대로 오바마 케어와 트럼프 케어로 시끄럽고 일본은 아베정권의 부정과 연루되어서 시끄럽습니다. 남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다고 해서 남한 안에서만이라도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서로 으르렁대며 싸우고 있는데 마귀와의 동행을 각자가 끝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으십니까? 선민의 공동체의 행복감을 누리고 싶으십니까? 각자가 마귀와의 동행을 끝내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것을 반드시 기억하시고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서 이 땅에서 만족과 기쁨을 찾으려는 마귀와의 동행을 중단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마귀와 동행을 하면서도 믿음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착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불러주시고 우리의 죽음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대하여서만 산 자로 살아 갈 수 있도록 십자가 생활화로 무너진 성벽을 수축하게 하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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