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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예루살렘성과 만리장성의 차이_태승철

by 태승철 · 17-03-29 14:13 · 7,777
주전 220년에 진시황이 건축한 만리장성은 폐쇄와 단절을 상징하는 반면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로마가도는 개방과 소통을 상징한다는 시오노 나나미의 통찰은 여전히 빛이 납니다. 그러나 어떤 탁월한 작가라도 예루살렘성이 무엇을 상징하는 지를 알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같은 성이지만 만리장성과는 달리 예루살렘성은 단절과 동시에 로마가도의 소통을 함께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통을 위하여 단절을 꾀하는 이율배반의 성(城)인 겁니다.

예루살렘성과 만리장성의 차이

(느헤미야 2:1~20)

 

1.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2.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3.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하니

4.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5.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6. 그 때에 왕후도 왕 곁에 앉아 있었더라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좋게 여기시기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루살렘성과 만리장성의 차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루살렘성과 만리장성의 차이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10권을 보면 비슷한 시기에 로마와 중국에서 큰 사업을 했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국에서는 BC 220년쯤에 진시황이 북쪽의 흉노족을 막기 위하여 만리장성을 건축하였고, 로마에서는 10km에 달하는 로마가도를 건설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는 만리장성은 폐쇄와 단절을 상징하며 반면에 로마가도는 개방과 소통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놀랍고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성에 대해서는 믿음이 없다면 그 어떤 통찰력을 가진 작가라도 도저히 판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같은 성이지만 예루살렘성은 만리장성과는 건축의 의도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만리장성은 밖에서 안으로 침투하려는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서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성은 안에서 밖으로 나가려고 지은 성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성벽을 높이 쌓아야만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나가고 싶으면 성문을 열고 나가면 되고, 개방적이 되고 싶으면 로마가도처럼 길을 놓아야 할 텐데 대체 왜 나가기 위해서 성을 쌓았다는 것일까요? 단절을 위한 성벽이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였기 때문입니다. 단절이 되어야만 소통할 수 있다는 이율배반적인 성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진시황은 단절과 폐쇄를 위하여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로마는 개방과 소통을 위하여 로마가도를 깔았습니다. 그러나 선민 이스라엘은 진정한 소통을 위하여 예루살렘성을 쌓았는데 무슨 얘기인지 본문을 통해서 봅니다.

 

BC 444년 니산월은 느헤미야가 유다 땅의 보고를 듣고서 울며 기도하기를 시작한지 4개월이 되던 때였습니다. 왕의 술 관원으로 섬기던 느헤미야는 왕에게 자신의 의중을 털어놓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느헤미야의 안색이 좋지 못함을 알게 된 왕이 그 이유를 묻자 느헤미야는 정치적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 예루살렘이라고 하지 않고 빙 둘러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라고 설명합니다. 학자들의 소견을 빌리자면 당시의 페르시아 왕가에서는 조상들의 묘소를 중요시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정황을 알았던 느헤미야는 왕의 공감을 얻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언급하지 않고 둘러서 말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말을 했기 때문에 허락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셨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어쨌든 이 일로 인하여 귀환의 허락을 받은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하에 있는 예루살렘 근방의 숲을 관리하는 관원에게서 필요한 목재를 쓸 수 있는 조서까지 받아와서 예루살렘성벽을 재건하게 됩니다.

앞서 우리가 느헤미야가 유다 민족이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이방민족에게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어려움을 겪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성벽을 쌓는 것은 자연히 외부 세력으로부터의 폐쇄와 단절과 방어적 행동으로 보여 집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예루살렘성벽의 의미는 만리장성이나 고구려시대나 고려시대의 천리장성 같은 방어적 성격의 성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예루살렘성벽의 건축목적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려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넘어가려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댐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단 수문으로 방출하는 댐이 아니라 물이 충만하게 고여서 흘러넘치도록 하는 댐입니다. 댐에 계속해서 물이 차오르면 나중에는 흘러넘칠 것입니다. 예루살렘성벽은 이러한 기능을 하도록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로마가도처럼 길을 깔아서 밖으로 나간다 해도 진정한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벽을 쌓아서 넘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곧 각 사람이 옹달샘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이 이 땅에서 샘솟는 옹달샘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성전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성 안에 살면서 성전 생활화를 합니다. 그것은 곧 성전에서 상번제가 드려질 때에 내가 번제물인 어린양과 함께 죽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비록 예루살렘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을지라도 상번제가 드려지는 동안에 내가 죽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서 세상의 가치를 붙잡고 그것을 실제로 얻어서 마음의 공백을 채움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내가 죽는 것이 성전 생활화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이전에는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와 감람나무가 무성하여 열매가 풍성한 것이 기쁨과 만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생활화함으로서 그런 것들이 아닌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이 계심으로 인하여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밭에 식물이 없으며 외양간의 소가 없고 우리에 양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만족할 수 있게 바뀌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늘의 하나님으로 기뻐할 수 있게 되면, 그 사람의 육체는 하늘 기운이 내려와 샘솟는 옹달샘이 됩니다.

칠십 명의 제자들이 나가서 귀신을 쫒아내고 기뻐하며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할 때에 누가복음 1020절에서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땅의 일로 기뻐하지 말고 하늘에서 기쁨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 사람의 육체는 하늘이 샘 솟는 옹달샘이 됩니다.

예루살렘성벽 안에 모여 살던 사람들 각자가 옹달샘이 되어서 물을 채우다 보면 나중에는 흘러넘치게 됩니다. 이렇게 흘러넘칠 때에 세상의 기운이 가득한 곳곳으로 하늘의 기운이 퍼져나가는 소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러한 하늘과 땅의 진정한 소통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차단과 단절이 우선되어야만 한다는 예루살렘성의 이율배반적 성격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폐쇄와 단절을 상징하는 성벽이 있어야만 하늘과 땅의 소통이 가능한 것일까요?

산 속에 옹달샘이 있습니다. 제가 오르는 오대산 소금강에도 옹달샘이 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리면 계곡물이 넘쳐서 샘이 묻혀버립니다. 갑자기 비가 많이 오면 상류에서 낙엽이라든지 유기물들이 떠내려 와서 옹달샘을 덮어버립니다. 이렇게 되지 않도록 옹달샘 주위를 우물처럼 보수하면 물이 범람해도 벽에 막혀서 옹달샘의 물은 항상 깨끗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깨끗한 옹달샘을 마시기 위해서는 단절이 필요한 것입니다.

일찍이 바알과 아세라 우상숭배가 만연하여 선민의 나라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바알 숭배는 곧 온 세상이 향하는 대로 돈이 최고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돈 벌어 부자 되는 것이 행복의 근원이요 기쁨의 원천으로 믿는 믿음의 표현이 바알 숭배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도 이러한 흐름에 휩쓸려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통해서 BC 586년에 남 왕국 유다를 망하게 하셨습니다. 그 때에 예루살렘성전과 성벽이 모두 무너졌습니다. 이는 성전과 성벽이 지닌 영적인 의미가 사라졌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성벽은 단절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돈을 추구하려는 급물살에 빠져있습니다. 성벽은 그 급물살을 막아내는 단절을 뜻합니다. 돈이라는 급물살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최고로 섬기며 하나님으로 기뻐하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의 원인을 달리하기 위해서 세상과의 단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941~42절에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성전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성 안에 사는 사람들이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어서 나오는 성전정화사건에 있습니다.

성벽 안에 살던 백성들은 물론이고 성전 안에서 일하던 제사장들조차도 제사를 드리기 위한 번제물을 파는 장사꾼과 결탁하여 이익금을 챙기려고 장사꾼들을 성전 안에 들여놓았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교회가 돈이라는 가치에 완전히 먹혀버린 것과 같은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시면서 예루살렘성전과 성벽의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라고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실제로 AD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그것이 실현되었습니다.

 

지금 교회가 사람을 끌어 모으기 위해 세상 방식을 도입하고 있는데 그러나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성벽으로 차단되어야만 하는 곳입니다. 교회 안에서만은 모인 모든 사람들의 기쁨이 무화과나무 감람나무 포도나무의 열매도 아니고 밭의 소출도 아니고 양과 소의 수가 아닙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만 기뻐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모여야 합니다. 세상 가치로 기쁘지 못해 안달하던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고, 교회의 울타리 즉 예루살렘 성벽 안의 사람들의 모임이 영적 이유가 되어야 하고 각자가 하늘 옹달샘이 돼야 합니다.

돈 못 벌어 걱정하는 집안에서 내가 하늘의 옹달샘이 되어서 넘쳐나는 하늘의 기운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로 인해서 돈으로 걱정하던 가족들이 하늘 기운을 만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보다 강력한 성벽은 없습니다.

돈 건강 형통 성공 인기 등으로 기뻐하려는 이 세상의 흐름이 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성벽을 쌓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끊임없이 바라보면서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이고 이럴 때에 내 안에 하늘의 기운이 넘쳐나게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예루살렘성벽을 쌓아야 합니다. 하늘 기운이 세상을 향하여 개방되고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세상과 단절된 댐과 옹달샘이 될 때에 진정한 하늘과 땅의 소통과 개방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소통과 하나님의 뜻의 길을 여는 개방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가지 못한다고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 한 사람이라도 내 마음의 예루살렘성벽을 쌓아야만 합니다. 내 마음이 하늘이 솟는 옹달샘이 되어서 하늘로 기뻐하는 동안에 땅에서는 내 육체를 통해 하늘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갈 것입니다. 이러한 소통의 주인공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잊지 않게 해주셔서 내 마음이 든든한 성벽으로 세상이 차단되고, 하늘로 기뻐하며 하늘 기운이 흘러넘쳐서 가는 곳마다 하늘과 땅의 소통과 개방의 역사가 일어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