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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첫인상 10초 안에 마음의 벽 쌓기_태승철

by 태승철 · 17-03-30 09:50 · 7,629
미국의 이미지 전문가들에 의하면 사람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첫인상이 만나고 나서 불과 약 6초에서 11초 만에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민은 첫인상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타인의 마음에 비치는 내 첫인상은 하나님이 결정하실 것입니다. 나는 그 첫인상이 결정되는 10초 어간에, 그 무엇도 받지도 않고 주지도 않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의 벽을 쌓아야 합니다. 사실 첫인상뿐 아니라 모든 만남에서 십자가 생활화는 벽 쌓기로 나타납니다.

첫인상 10초 안에 마음의 벽 쌓기

(느헤미야 3:1~2)

 

 

1.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2. 그 다음은 여리고 사람들이 건축하였고 또 그 다음은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 건축하였으며

 

 

오늘 말씀 중심으로 <첫인상 10초 안에 마음의 벽 쌓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첫인상 10초 안에 마음의 벽 쌓기

첫인상은 앞으로의 인간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요소입니다. 속담에도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첫인상 하나로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첫인상이 좋아서 계약을 성사하여 막대한 돈을 벌어 들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미지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자면 이렇게 중요한 첫인상은 만나서 6초에서 11초 사이에 결정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첫인상이 결정되고 나면 이후의 관계에 지대한 변수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첫인상을 좋게 보이기 위해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고 여러 가지 방법론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선민들은 첫인상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다만 첫인상이 결정되는 10여초 동안에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과 마음의 벽을 쌓아야 합니다. 세간에서는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며 소통의 부재를 문제 삼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부부 간에, 사장과 직원들 간에, 대통령과 장관들 간에 대화가 없는 것으로 인해서 말이 많습니다.

이렇게 대화와 소통을 중시하는 보편적 관점으로부터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욕을 많이 먹기도 합니다. 멕시코 국경에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장벽을 쌓겠다고 하는데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만 벽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북 간, 세대 간, 계층 간, 여야 간 등에도 벽이 있습니다. 마치 인생의 불행은 전부 이 벽으로부터 기인한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사람들은 많은 문제에 있어서 벽을 주시합니다.

인도의 비폭력 인권 운동가인 비노바 바베(Vinoba Bhave, 1895-1982)이 세상 최고의 일은 벽에 문을 내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참 맞는 말처럼 느껴집니다.

88올림픽 때에도 전 세계를 향해서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이라는 가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가 더욱 잘 살고 서로 사랑하는 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벽을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선민은 벽을 쌓는 사람들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공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뜻하는 것이 그러합니다. 당시의 시대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선민의 정체성이 갈급하게 요청되는 시기였습니다. 나라의 국경도 없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군사도 없었고 나라다운 체제가 갖추어지지도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의 통치 아래에서 성전 생활화를 해야 하는 선민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의 성벽 쌓기를 통해서 그 정체성을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선민은 곧 이 세상에서 벽 쌓기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사람을 만납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는 첫인상이 되겠지만, 만났던 사람을 또 만날 일이 더 많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을 만나는 10초 순간에 벽을 쌓는 자들이 바로 선민인데 무슨 말일까요?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선을 긋는 것이고 마음으로 벽을 쌓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이 온전하게 성립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 안에서 세상 사람들에 대해선 긋기와 벽 쌓기가 포함되어야만 합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10초 안에 그 사람에 대해 마음에 벽을 쌓겠다는 깨달음과 결심이 없다면 믿음이 아니고 믿음이 유지될 수도 없습니다. ‘10라는 것은 만나자마자 첫 번째로 해야 될 일을 뜻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신앙인일 수는 없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과 마음의 벽을 쌓고 다름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16절에서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께 속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마음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은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누군가를 만날 때에 그 사람이 세상에 속해 있다면 선을 긋고 벽을 쌓아야 합니다. 그들과 벽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믿는 사람이라면 믿지 않는 사람과 공감대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4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십니다. 평안은 만족과 즐거움과 감사 등의 긍정적인 감정의 복합 상태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라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을 때에 이 세상으로부터는 평안을 얻지 못하게 됨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반드시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평안을 받아서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만나면 마음에서는 이 사람을 통해 만족과 기쁨에 보탬이 되는 쪽을 지향하게 됩니다. 내게 유익이 되는 쪽으로 자동적으로 움직여 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밥을 사주고 선물을 하더라도 결국 그것은 내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받고 싶을 때에나 주고 싶을 때에나 동일하게 내 마음에서는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사람에게서 만족과 기쁨이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마음의 평안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다는 깨달음을 잊지 않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서 무슨 대화를 하든지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내 마음의 평안을 이루는 기쁨과 만족과 행복감은 이 사람과는 무관하기에 나는 받을 것이 없습니다. 내 마음의 진정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은 주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받을 것도 줄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은 그가 원하는 것을 내가 주더라도 그것이 참 평안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된 평안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자로서는 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면서 10초간 담을 쌓는 것인데 줄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내 평안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깨지지 않는 한 마음의 즐거움과 기쁨과 만족은 깨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벽을 쌓는 이유는 평안을 주관하시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나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며, 내 마음의 평안은 만나는 사람과 무관하게 하늘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자들의 인간관계의 모습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면서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죽는 것은 곧 그에게 기쁨과 만족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고, 또한 내가 그에게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에 대해 죽는 것이고 벽을 쌓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 이상의 벽은 없습니다.

그렇게 벽을 쌓으면 내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것이 10초 안에 이루어져야 하고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계시고 아버지가 계신 하늘나라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고작 10초 동안에 십자가를 기억하기만 한다면 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면 이제부터 소통의 단계가 나타납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고 싶어 하시는 계획이 있으실 때에는 나를 통해서 그 사람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기로 계획하신 것이 있다면 그 사람을 통해서 내게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끼리 서로 필요로 하여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관계를 주관해가시며 연결하는 끈이 되십니다. 열두 제자가 있었지만 그 중에는 가룟 유다처럼 떨어져나가야만 하는 관계도 있었고, 나머지 열한 제자처럼 예수님께 붙어있는 관계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가룟 유다에 대해서 떠나보내시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셨을 뿐입니다. 제자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벽을 쌓고 계셨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도 순교 현장에서 돌로 치는 사람들에게 벽을 쌓았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의 평안은 그들이 돌 대신 돈이나 떡을 준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업이 실패한다고 해서 평안이 깨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려야 할 평안은 위에 계신 주님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사람뿐만이 아니라 사업에 대해서도 상황에 대해서도 직장생활 등에 대해서도 벽을 쌓는 것입니다. 그렇게 스데반 집사님이 사람들에 대해 벽을 쌓자 하늘이 열리고 그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얼굴이 천사처럼 빛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돌로 치는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용서임을 깨닫고, 그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관계의 소통의 원형입니다.

 

사람들은 부부가 이혼하는 문제에 대해서 소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반대로 너무 소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기쁨을 기대하고, 아내는 남편에게서 만족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하나님 사이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공백을 남편과 아내가 채워줄 수 없습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수로 하나님 사이즈의 마음의 공백을 자식이 채워줄 수 있습니까? 아주 원활하게 기대하기도 하고 주려고도 하지만 그것으로 참 평안을 얻지 못해 나타나는 결과가 이혼일 뿐입니다. 문제는 부부가 벽을 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평안은 배우자나 부모나 자식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평안은 주님으로부터만 옵니다. 내가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도 없고 받을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배우자와 자식에게 진정한 평안과 인생의 길을 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인간끼리 소통하며 평안을 얻겠다는 생각은 너무나 큰 교만입니다.

평안을 얻을 대상으로서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은 곧 그를 신격화 하는 것이고, 배우자를 신격화 할 때에 나타나는 결과는 이혼일 뿐입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기대했던 기쁨과 만족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벌면 벌수록 사람이 망가지는 이유는 돈에 대해 벽을 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평안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평안은 오직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우자에 대해서 십자가로 벽을 쌓고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가지면, 하나님께서는 배우자에 대해서 필요한 것들을 나를 통해서 주실 것입니다. 비록 배우자가 아직 하나님으로 평안을 누리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내겐 손해가 없습니다. 내게 공급되는 하늘의 평안은 무한대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내 몫은 하나님을 가짐으로서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짐으로 누리는 평안에 대해서 배우자는 보탤 수도 없고 감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부관계입니다.

이렇듯 인간관계는 서로가 소통하며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붙잡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관계를 주도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나와 관계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평안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지라도, 그들도 언젠가는 선민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를 통해서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선민으로 확인된다면 그로 인해서 우리도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만난다면 10초 안에 그 사람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마음에 벽 쌓기를 해야 합니다. 내가 이 사람으로부터 어떠한 기쁨과 만족을 얻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 기쁨과 만족은 위로부터만 주어지는 것임을 깨닫고 그 사람을 대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시려는 것을 나를 통해 주실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 사람도 선민으로서 확인될 기회가 주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맺어야 할 인간관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사람을 만나든 사물을 만나든 사건을 만나든 상황을 만나든 벽 쌓기의 달인들로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