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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입각지만 바꿔도 완전 딴판이다_태승철

by 태승철 · 17-05-18 09:41 · 7,529
입각지(立脚地)란 내 생각이 근거로 하는 처지요, 내가 지금 서서 만물을 바라보는 자리입니다. 각각의 입각지에서 서로 다른 관점도 발생하지요. 기존의 입각지에서 조금도 발을 떼지 않은 채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믿음 이후에도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믿음은 기존의 입각지에 발을 붙이고서 내가 살고 있던 세상에 하나님을 초청하는 것이 아니라, 입각지를 바꾸어서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입각지만 바꿔도 완전 딴판이다

(욥기 6:1~30)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3.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4.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5.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6.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7. 내 마음이 이런 것을 만지기도 싫어하나니 꺼리는 음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8.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 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9.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

10.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입각지만 바꿔도 완전 딴판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입각지만 바꿔도 완전 딴판이다

제가 밴쿠버에서 목회할 때에 한 장로님 가정이 생각납니다. 장로님께서 밴쿠버로 이민을 원하셨는데 부인되시는 권사님은 원치를 않으셨습니다. 이민을 추진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장로님이 꾀를 내셔서 캐나다 지역의 로키 산맥을 관광을 하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아름답고 웅장한 로키산맥을 바라보면서 권사님은 이민을 결정하게 됩니다. 물론 로키산맥과 밴쿠버는 거리가 떨어져있지만 로키산맥을 통해서 이민을 선택하시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제가 교회 부흥회를 위해서 한국에서 선배 목사님을 모셔온 적이 있었는데 김동호 목사님이십니다. 짬짬이 목사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시내 구경도 하고 식사도 하였는데 별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밴쿠버가 어떠시냐고 물었더니 태 목사! 이런 시골에서 어떻게 사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밴쿠버에서 가장 큰 길을 킹스웨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면이나 읍 같은 느낌이 듭니다. 물론 그곳을 벗어나면 아름다운 곳도 많지만, 하필이면 읍면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을 지나가던 중이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셨던 것입니다.

또 제가 강릉에 왔을 때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습니다. 저희 아파트 아래층에 사시는 아주머니에게는 남자 아이가 두 명이 있는데, 초등학교를 마치고 밴쿠버로 유학을 갔습니다. 밴쿠버의 교육시스템이 좋아서 아들 둘을 조기유학을 보내고 왔다 갔다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분은 이분대로 밴쿠버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교육시스템으로 밴쿠버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입각지(立脚地)에 따라 보이는 모습은 완전히 딴판이 됩니다. 입각지는 내 마음이 서 있는 처지이고 장소입니다. 사람은 마음이 서 있는 곳으로부터 사방을 바라보면서 생각하고 분석하고 판단을 합니다. 서 있는 위치가 어디인가에 따라서 완전히 딴 판인 세상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사과 주산지인 아오모리 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해에 태풍으로 인해서 90%의 열매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과수원 주인들이 땅에 떨어진 열매를 보며 울고 있는데, 한 과수원 주인은 떨어지지 않은 10%의 사과를 바라보며 합격 사과라는 이름을 붙이고 10배 이상의 가격으로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그 모진 비바람과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으니 합격할 수 있다는 의미인데 관점을 바꾼 것입니다. 떨어진 사과에 마음을 두고 바라보면 망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떨어지지 않은 사과에 마음을 두고 바라볼 때에 합격 사과라는 전혀 다른 판도가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엘리바스의 책망에 대해 욥이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욥에게는 엘리바스의 말이 적용 되지도 않았고 그 말은 다 틀린 말에 불과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당한 재앙과 환란을 드러나지 않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말했습니다. 열 명의 자녀가 죽고 그 많던 재산이 사라졌으며 건강마저 잃고 아내는 도망친 상황으로 인해서 사회에서 가장 큰 자라고 일컬어 졌던 욥이 가장 티끌 같은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고서야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마주한 처지에서 생일을 저주하고 죽음을 동경하고 살아있음을 한탄하는 교만을 떨지 말고 하나님의 형벌 받음에 주의하여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이 그럴싸하기에 우리도 엘리바스의 말을 보면 잘못을 찾아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하나님께서 형벌을 내리셨다는 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도 옆집에서 세 명의 자녀가 한꺼번에 죽었다고 한다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렇게 큰 재앙을 받게 되었을지 생각할 것입니다. 혹은 많은 재산을 다 잃어버렸더라도 같은 생각을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삼성의 이재용 씨가 구치소에 수감된 채로 재판을 받고 있는데, 그로 인해서 삼성이 휘청거리게 된다면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욥은 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엘리바스는 또한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이 참담한 상황에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욥을 책망합니다. 얼핏 듣기에 이것이야 말로 복음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서로 다른 입각지에 의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엘리바스의 말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우리도 생각의 입각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형벌은 내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상황을 형벌로 받아들인 엘리바스의 입각지는 바로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녀와 재산과 건강과 명성은 귀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잃는 것을 형벌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입각지에 서서 재산과 자녀를 가장 소중하게 느끼는 관점 자체가 죄악입니다.

 

그렇다면 욥은 어떠한 입각지에 서있었던 것일까요?

욥의 한 말을 보면 기가 막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본문 8~9절을 보면 이전의 죽음을 동경하던 고백을 반복하고, 10절에서는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이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죽여주시면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다고 자신이 의롭다는 말을 노골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바스가 보기에는 욥에게 하나님의 형벌로 재난과 환란이 주어진 것이지만, 욥은 자신이 형벌을 받을 만큼의 죄악을 저지른 적이 없으며 의롭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라는 말은 스스로가 깨끗하고 흠이 없다는 표현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금까지 해왔던 더 이상의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욥의 입각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음이 처해 있으면서 주어지는 모든 상황을 바라보는 지점이 어디인가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라는 말씀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욥은 BC 2000년 아브라함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여겨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때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500년 전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거나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셔서 면대면 관계하셨습니다. 복의 근원이 될 것을 약속하시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갈 것을 명하기도 하셨으며 이삭을 낳게 될 것을 약속하시고 이후에는 그 이삭을 바치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따라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욥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브라함처럼 1:1의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듣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주관자이시자 창조자이시고 전능자이심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1:1로 상대할 수 있는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들 중의 하나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욥은 하나님에 대해서 취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취했다고 여기며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선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그 시대에 다른 곳에 살고 있었던 욥에게 또 무슨 말씀을 하셨다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욥은 하나님을 전능자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전능자라는 말을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능자라는 말에는 창조하신 세계를 통치하시고 섭리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역사의 주관자의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과 1:1로 대면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께 마음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보낸 상태에서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역사의 주관자 되심과 전지전능하심에 푹 빠져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빠져들어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입각지로 바라볼 때에 누리는 축복 중에 단 하나도 자기의 공로가 없음을 깨닫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일 뿐임을 압니다. 그래서 하나도 내 것으로 취하지를 않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산과 자녀와 아내와 명예를 가졌기에 그것들은 욥의 마음에서 정이 들고 사랑으로 연결이 되어서 그것들이 없어질 때에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욥의 생각만큼은 언제나 하나님의 입각지에 있었기 때문에 주어지는 모든 나쁜 일조차도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시며 역사의 주관자 되시고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마음에서 고통스럽든지 즐겁든지 항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 마음이 주관자 하나님을 먼저 붙잡아서 입각지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욥은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에 죽을 지경이라도 그 상황을 따를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의 주관자 되심을 믿기에 이 상황을 고쳐달라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게 주어진 상황이 하나님의 주관하심의 바깥에서 일어날 수가 없으며, 전지전능하신 분이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일일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이 세상의 입각지에서 보았기 때문에 욥에게 일어난 재앙을 형벌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욥의 입각지에서 바라볼 때에 진짜 형벌은 이 세상의 삶을 내가 주관자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의 주관자 되심이 입각지가 되지 못하는 상태야말로 형벌이었던 것입니다. 욥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이 하나님이었습니다. 귀로 듣기만 하던 하나님이었고 아브라함처럼 1:1로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 내에서 욥은 하나님을 잊지 않고 최선의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욥의 입각지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을 입각지로 삼아 세상을 살아가는 욥으로서는 자녀가 죽고, 재산을 잃고, 건강을 잃고, 아내가 떠나가고, 명예가 사라진 상태일지라도 이것을 형벌로 여길 수가 없었습니다. 다 잃었어도 하나님을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잃었지만 자녀는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가져가실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믿은 것입니다. 재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욥은 엘리바스의 말을 이해하고 수긍할 수가 없었습니다.

 

15절을 보면 욥은 엘리바스의 말을 개울(와디)과 같다고 합니다. 홍수기에는 불어나서 강처럼 되었다가, 갈수기에는 바싹 말라서 물이 전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엘리바스의 말이 실제로는 전혀 마음에 와 닿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마음을 두고 바라보면 무언가 조금만 잘못 되어도 내가 하나님께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보다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보다 건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입각지에서 하나님을 호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마음에 초대받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직 하나님이 입각지가 되어서 세상을 바라볼 때에 딴판의 세상이 펼쳐지게 됩니다.

내게 재앙과 환란이 주어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벌이 아닙니다. 어제 말씀드렸듯이 이미 세상을 좋아하고 있는 상태가 죄입니다. 내가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하는 것이 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인 맞춤형의 사랑을 하시기 위해 내게서 돈을 가져가시고 부자가 되지 않게 하실 뿐입니다. 형벌이나 재앙이 아닌 하나님의 맞춤형 사랑 때문입니다.

내가 죄를 져서 사업이 망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해서 돈이 사라진 것이 아니고 돈을 벌어서 기쁘고 만족하려고 했던 것이 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돈을 가져가신 것입니다. 돈 버는 방법에 있어서 잘못 행하는 많은 범죄자들이 있습니다. 정경유착으로 재벌이 된 사람들은 모두 잘못 된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돈을 그대로 남겨두십니다. 그들에게 향하는 하나님이 사랑이 작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환란은 하나님 사랑의 크기에 비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항상 돈을 비롯한 세상의 가치들과는 무관하게 빈곤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의 나의 죽음이 자발적으로 된다면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뜻만큼 주어지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끌어들이실 것이고, 그 밖의 이 세상의 가치들도 마찬가지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십자가에 입각지를 둘 때에 나는 세상의 가치들에 대해 죽은 자가 됩니다.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는 세상에 대해 죽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 기쁨과 슬픔은 좌우되지 않는다는 결심으로 부활과 승천을 향해 마음의 방향을 돌려야만 합니다. 십자가 입각지를 놓치지 않고 살아갈 때에 세상은 딴판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입각지를 십자가로 옮김으로서 상상할 수도 없는 상상 이상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