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books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우울함, 기쁨거리 바꾸기 기회_태승철

by 태승철 · 17-05-19 10:39 · 7,702
우울함과 기쁨은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지양합니다. 이런 변증법적인 관계는 이 둘이 운명적으로 하나의 뿌리를 두고 있음에 연유합니다. 즉 기쁨거리와 슬픔거리는 하나라는 거지요. 하나의 거리가 잘 되면 기쁘고 안 되면 우울하게 됩니다. 이점이 기쁨의 소리인 복음 수용에도 결정적 의미를 갖습니다. 복음이 주는 기쁨은 기존의 기쁨과 슬픔의 거리 위에서 우울함을 기쁨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아예 기쁨거리 그 자체를 바꿈에 있는 겁니다.

우울함, 기쁨거리 바꾸기 기회

(욥기 7:1~21)

 

 

7.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8.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9.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10.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우울함, 기쁨거리 바꾸기 기회>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우울함, 기쁨거리 바꾸기 기회

2014년에 우울증 기쁨으로 바꾸기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어느 신부님께서 쓰신 책인데 우울증을 진단하고 치료해서 기쁨으로 바꿔가는 내용입니다. 우울증은 무서운 병으로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고 무능력하게 합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슬프고 희망이 없고 작은 일에도 크게 실망하고 의기소침합니다. 또한 항상 피곤하고 식욕도 없고 가슴이 답답하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다보니 신체의 면역기능도 약해지는 등의 여러 가지 증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 우울증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자의식입니다.

쓸모가 없으니 이 세상을 살아갈 이유도 없고 살아갈 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울증이 언제 생기는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이 책을 쓴 신부님은 여기에 대해서 여섯 가지의 예를 듭니다.

첫째,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거부할 때입니다. 나는 지독하게 사랑하는데 상대방이 나를 거부하면 우울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둘째, 실패할 때입니다. 사업에서 꼭 이루어야만 하는 프로젝트를 시도했는데 실패할 때입니다.

셋째, 상실할 때입니다. 욥기에서 보았듯이 소중하다고 여기던 소유물을 잃을 때 우울해집니다.

넷째, 불필요한 비교를 할 때입니다. 불필요하게 비교를 하든지 비교를 당할 때에 열등감이 생겨 우울증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실망하고 절망할 때입니다. 다시 말해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을 때입니다.

여섯째, 신체에 이상이 있을 때입니다. 몸에 질병이 생기면 당연히 우울해집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찾아온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여섯 가지 방법을 제안합니다. 음악 치료, 휴식과 운동 치료, 수면 치료, 적당한 영양과 음식물 섭취, 인지행동 치료, 마지막으로 영적 치료를 통해서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부당했을 때에 우울증이 생기는 것은 맞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백년해로를 한다고 해서 우울증이 없어집니까? 또한 실패할 때에 우울증이 생길 수 있지만, 사업의 프로젝트에 성공한다고 해서 우울증은 멀리 떠나는 것일까요? 상실할 때에 우울증이 생긴다는데 그러면 내가 보유한 것들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으면 우울증은 오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객관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상태에서도 우울증으로 죽어갈 수 있습니다. 저는 영락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길 때에 그러한 권사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자녀들도 모두 외국의 일류대학 출신이고 어마어마한 직장들을 다녔습니다. 남편도 그렇게 훌륭한 분일 수 없는데 우울증으로 혼자 죽어가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우울증에 대한 태도가 바뀌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우울증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울증이 주어지면 그것을 기쁨으로 만들려고 할 필요가 없고 우울증꺼리 자체를 바꾸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돈을 벌고 싶은데 돈이 벌리지 않아서 우울합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돈 때문에 우울해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기쁨과 우울함은 똑같이 돈이라는 요소에 매여 있습니다. 이 우울함을 느낄 때에 왜 근심이 있고 우울한지를 살펴볼 수 있는데, 걱정꺼리와 염려꺼리가 곧 기쁨꺼리도 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이 꺼리를 바꾸어야만 합니다. 이 꺼리를 유지하며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려하지 말고 꺼리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복음은 곧 기쁨의 소리입니다. 그런데 돈이나 건강 성공 등의 기존의 기쁨꺼리와 슬픔꺼리를 유지한 채로 복음을 이용해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려 하는 것은 결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이는 것은 기존의 기쁨꺼리와 슬픔꺼리를 다른 것으로 바꾼다는 것이지, 복음의 힘을 통해서 슬픔꺼리를 기쁨꺼리로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세상에 기쁨꺼리와 슬픔꺼리를 두고 있는 자의 우울함은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는 것은 우울함을 기쁨으로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그 꺼리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 기쁨꺼리로부터 하늘 기쁨꺼리로 교체할 때에 일어나는 과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과정을 통과할 때의 마음상태를 욥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과정이 없으면 기쁨꺼리는 바뀔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욥의 마음의 변화 과정을 통과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욥기서의 핵심적 주제는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에 어떠한 변화의 과정을 요구하는지를 보여주려 함입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에 마음에 변화가 일어날 것인데, 그 변화가 어떤 내용이냐를 욥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비극적 재앙과 환란에 대해서 욥이 가지게 되는 마음 상태가 우리가 십자가를 가질 때에 되어야 하는 마음 상태입니다.

1~10절까지를 보면 욥이 인생의 허망함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11절부터 마음의 관심은 죽음에 집중합니다. 욥의 마음은 남은 삶에 대해서 고민하거나 미래의 희망을 찾기보다는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죽음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인정하고 역사와 삶의 주관자로서 인정하는 자는 어떤 경우에서도 자살은 범죄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관계에서의 죽음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욥의 유일한 관심사는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죽음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 우울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보자면 우울함의 극치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이 기쁨꺼리 교체를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과정이며, 십자가를 붙잡을 때에 우리에게 나타나야만 하는 마음 상태입니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처참한 재앙 속에 묻힌 욥에게 희망을 주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희망은 재산과 자녀와 건강을 잃었고 아내마저 떠나갔으며 사회적으로도 매장되다시피 하여 명성도 잃었지만, 이것을 하나님의 형벌로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회복시켜주실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형벌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자신에게 소중한 것임을 전제로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욥은 이 희망을 거부합니다. 앞선 3장에서부터 욥은 재산과 가족과 명예 같은 것들을 모두 허망한 것으로서 받아들였기 때문에 오직 죽음에 몰입하고 있는데 특이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십자가를 붙잡은 우리도 가져야만 하는 세상을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러한 극단적 우울함이 없으면 십자가를 붙잡은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 제가 너무 지나치게 몰아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34~36절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라고 하십니다.

즉 세상을 미워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고, 딸이 어머니와 원수처럼 여기는 것은 곧 기쁨꺼리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바꾸는 과정입니다. 또 이어지는 37절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십니다.

욥은 십자가 사건을 모른 채로 모든 소유물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회복하려는 희망을 갖기보다는 이 모든 것에 대해서 허망함을 느끼며 오히려 죽음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필수적으로 마음에서 거쳐야만 하는 단계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기쁨과 슬픔의 꺼리가 하늘기쁨으로 바뀔 수가 없습니다.

마가복음 1029~30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 /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욥의 마음 상태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부모나 지식이나 형제자매나 집이나 전토를 다 버리면 이 세상에서 기쁨꺼리가 없기 때문에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이려면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0절의 그렇게 세상의 기쁨꺼리를 하늘의 기쁨꺼리로 바꾼 자들의 삶은 완전히 하나님의 몫이며 하나님의 과제와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과제가 되었기에 오히려 버린 것들을 백배나 받고 영생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426~27절에서도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곧 이 세상에 대한 관계에 대해서는 마음을 죽음에만 몰입시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세상의 기쁨꺼리가 하늘의 기쁨꺼리로 교체 될 수 없습니다.

욥은 가족과 재산과 건강을 잃고 아내는 떠나가고 친구마저도 잃어버렸습니다. 몸은 살아있어도 사회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 죽음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합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우울함의 극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세상의 삶을 미워하며 죽음에만 몰입해야 되는 이유는 바로 기쁨꺼리를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의 기쁨꺼리 대신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이러한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관계할 때에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기쁨꺼리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기쁨꺼리이기 때문에 없을 때에는 슬픔꺼리도 되고 우울함의 이유도 됩니다. 그것을 유지하면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목사님들이 목회에 기쁨의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사람 수가 늘지 않을 때에 슬퍼하고, 그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기 위해 하나님께 능력을 받기 위해 삼각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붙잡고 씨름을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못한 상태일 뿐입니다.

목회하는 목사님들의 기쁨꺼리는 하늘에 있어야만 하고 하나님이 기쁨꺼리라야 합니다. 교인이 한두 명 일지라도 그들 앞에서 목사님은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여야 합니다. 교인이 늘어나는 것에서 기쁨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목회 현장에서의 과제는 죽음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친구를 만날 때에도 몰입해야 될 과제는 죽음입니다. 그 자리가 하나님의 몫이 되고 하나님의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친구와 술이라도 한 잔하면서 이야기하다 보면 삶의 짐도 가벼워지는 것 같고 스트레스도 풀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쁨을 기대해서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가 아닙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배우자 자식 친구 사업 등에서 기대했던 기쁨을 하나님께로 옮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대해서는 모든 생각이 죽음으로 몰입 될 정도로 철저한 우울함의 단계를 경험해야만 하는데 이것이 곧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의 마음 상태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음만을 관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뒷부분에 보면 하나님이 한 순간도 나를 잊지 않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84절을 보면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라는 찬양이 나옵니다. 욥은 인간이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관심을 두시면서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라고 반대방향으로 나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24시간 지켜보시지만 많은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우리 삶에서 많은 CCTV들이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지만 그것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욥은 괴로움 속에서 하나님이 24시간 지켜보고 계시는 것 자체를 힘들어 하면서도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기쁨과 슬픔꺼리를 세상으로부터 하늘로 바꾸기 위한 또 하나의 조건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보고 계시지만, 그러한 하나님을 침 삼킬 동안도 잊지 않았던 욥의 마음이 특별한 것입니다. 침 삼킬 동안도 하나님이 욥을 잊지 않으시고, 침 삼킬 동안도 욥이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항상 잊지 않고 하나님을 기쁨꺼리로 여길 때에야 사도 바울이 말했던 것과 같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쁨꺼리가 되시기 위하여 준비하고 계시지만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내 생각이 하나님께 가있지 않다면 어떻게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세상을 향한 극단의 우울함을 가지고 죽음에만 몰입하는 마음의 상태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날마다 어떤 순간에도 이 세상에 대해서는 죽음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자연스럽게 생각의 대상은 하나님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부활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우리의 마음은 하늘에 앉힌바 되어서 하나님을 기쁨꺼리로 삼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럴 때에 이 세상의 삶은 100% 하나님의 통치영역이 될 것이며, 몸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장갑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어질 것입니다. 우울함을 기쁨으로 바꾸려하지 말고 기쁨꺼리를 바꾸는 기회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세상을 향한 우울함이 죽음으로 몰입될 정도로 치닫게 하시며,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나의 기쁨꺼리로 모시는 역사가 매일 반복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