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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나는 망하지 않았다_태승철

by 태승철 · 17-05-20 10:10 · 7,697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사주팔자에서 공망(空亡)의 사주가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텅 비고 모조리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여 쌓아 놓아도 덧없이 사라지고 텅 빌 것이라는 거지요. 욥의 상황을 사주로 말하자면 아주 전형적인 공망의 사주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복음에서 보자면 공망의 사주란 어느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때문에 모든 사람의 삶의 현장인 이 세상은 적어도 삶의 기간 중에는 망함이 없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망하지 않았다

(욥기 8:1~22)

 

 

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3.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4.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5.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나는 망하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나는 망하지 않았다

망함은 죽음을 기점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적어도 세상을 사는 기간 동안에는 망할 수가 없습니다. 사업을 실패했다고 해서 망한 것은 아닙니다. 불치병에 걸렸다고 해서 망한 것도 아닙니다. 자녀가 불통에 막혀있다고 해도 망하지 않았고 앞으로 죽을 때까지는 망할 수 없습니다. 망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내 생각을 지배하는 사탄의 역사입니다.

예를 들어 사회적으로 큰 범죄를 저질러서 재판을 받아 감옥에 갇혀서 종신형을 살게 되었어도 망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망한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사탄의 꾐에 빠지게 된 것이지 정말로 망한 것은 아닙니다. ‘망했다고 생각하라는 사탄의 덫에 걸릴 수는 있지만 망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에 대한 형벌로 주시는 망함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주(四柱)는 인생의 운명을 점치는 것입니다. 인생의 네 개의 기둥으로 빗대어 점치는 이유는 사람의 인생을 집에 비유한 것입니다. 태어난 생년월일시를 집을 받치는 네 개의 기둥으로 여깁니다. 이 기둥들을 2개의 문자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10천간(天干)12지지(地支)를 짝을 맞추어 쓰게 됩니다.

위의 10천간(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아래는 12지지(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로 짝을 맞추어서 씁니다. 위는 10개이고 아래는 12개로 두 글자는 비게 됩니다. 사주가 이 비는 부분에 해당되면 그 사주를 공망(空亡)이라고 합니다. 위의 10천간은 하늘을 뜻하고 아래의 12지지는 땅을 뜻하는데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두 글자는 공망이 됩니다.

예를 들어 나의 사주가 하늘이 없는 공망에 속한다면 땅의 뜻으로 돈을 열심히 모아도 하늘의 뜻이 없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벌었다가도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또한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을지라도 공망의 사주라면 지위나 명예가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주를 볼 때에 가장 싫어하는 것이 공망의 사주입니다. 팔자(八字)의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접하고 있는 욥의 상황에 굳이 사주팔자의 관점을 들이대면 욥의 생년월일시를 따져볼 것도 없이 공망의 사주입니다. 그 막대한 재산과 열 명의 자녀들과 건강과 명예를 한 순간에 다 잃었습니다. 아내도 떠나버리고 친구들도 욥과 같은 마음을 가져주는 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공망의 사주가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지금 이 욥의 상황을 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욥기서의 몸통이 되는 친구들과의 논쟁의 요점은 욥이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형벌을 받았다는 주장입니다. 오늘은 엘리바스에 이어서 빌닷이라는 새로운 친구가 등장하는데, 빌닷도 엘리바스와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는 그 죄악에 대한 형벌을 내리시고, 의인에게는 은총과 평강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죄인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시작은 미약했을 지라도 나중에는 창대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빌닷이 하는 말에서 잘못된 점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벌을 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또한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들을 축복해 주실 것이고, 의인에게는 평강을 허락해주시리라는 것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문제는 욥이 당하는 고난이 순전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경외했음에도 받은 고난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욥처럼 온전하게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엄청난 고난이 허락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 욥에게 내려진 재앙은 욥의 특권과도 같은 것입니다. 1장의 천상회의 때로 돌이켜보면 이 시험이 너무 아프고 괴롭지만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빌닷과 엘리바스의 관점에서 잘못된 것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인류의 오해가 등장합니다. 사주팔자에서 공망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복으로 여기는 것들을 가질 수 없는 운명을 뜻합니다. 공망은 아무리 노력하고 시도를 해도 다 사라져버리고 마는 사주이기에, 이것을 희석시키고 약화시키기 위해서 이런 저런 주술적 방법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도 사주팔자의 개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에 실패하면 먼저 그의 잘못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여당도 아니고 야당도 아닙니다. 복음을 위해 종사하는 사람이 진보나 보수를 지지할 수가 없습니다. 공산주의와 복음은 공존할 수 없지만 공산주의자에게도 복음은 열려있습니다. 히틀러와 같은 극우를 지향하는 자들에게도 복음은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진보나 보수나 어느 한편에 친화되어야 될 자격과 권한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해보자면 지금 박근혜전대통령이 탄핵을 당해 감옥에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년 형을 받게 된다면 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은 잘못된 정치를 한 죄의 대가로 생각하고 망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관점에서는 망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국정농단의 주역인 최순실 씨가 만약 종신형을 받아 살게 된다고 할지라도 인생이 망한 것은 아닙니다.

이 지구는 망함이 없는 공간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욥에게 일어난 현상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빌닷이나 많은 신앙인들이 이 생각을 벗어버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는 망함이 존재하지 않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욥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사람인데도 해당이 될까요?

구약시대의 신앙은 앞으로 일어날 복음 사건을 바라보면서 가는 신앙이었습니다. 십자가 사건과 예수님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이끄시는 신앙인들의 마음은 십자가를 향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내용이자 원리입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의 사람들은 십자가를 되돌아보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에 이 세상에 망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빌닷은 이러한 시야를 가지지 못한 채 욥이 망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망했다는 것은 이제까지 걸어온 길이 잘못되었다고 보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죄악에 대한 형벌을 내리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눈앞에서 살아가지만 공의의 하나님께서 도저히 용납하실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르며 살아갑니다. 그 자리에서 즉사해야 맞는 죄악을 범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 사람으로부터 지구 종말에 마지막으로 태어날 인간의 죄악까지도 그 모든 형벌은 주님의 십자가로 쏟아졌습니다. 십자가로 형벌이 쏟아졌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보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마피아의 보스가 마약을 팔고 인신매매를 하여 사람들의 인생을 망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죄악에 대한 형벌은 마피아 보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보스가 어느 날 암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보스가 죗값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암을 주신 것은 그 죄악에 맞춘 사랑을 주신 것이지, 그를 망하게 하시려는 형벌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의 큰 오해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이 세상적인 기준에서 잘못되고 망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형벌로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것들을 마음속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이 없어지면 망했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를 최고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자녀의 불통을 망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권력에 오르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감옥에 들어가서 재판받아 형을 받게 된 박근혜 씨를 망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일이 안 풀리는 것을 사주팔자를 들어가며 공망으로 이름 붙인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께 대들던 장로님이 사업이 망하게 되면 많은 교인들이 그 장로님이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망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이해하는 이유는 내가 돈과 사업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유일한 기쁨거리로 모셔 들이기를 바라고 소원하는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감옥에 들어간 박근혜 씨를 보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오히려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아무것도 없는 자기처럼 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관직도 재산도 명성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자가 예수를 전하다가 붙잡혀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왕 앞에서 자기처럼 되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그립바 왕이 이대로 세상적인 형통을 누리다가는 진짜로 망해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망함은 죽기 전까지 하나님을 최고의 존재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쁨으로 인정하고 모셔 들이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한 번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사랑하지 못한 채 삶이 끝나버리는 것이야말로 진짜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좋은 분으로 느끼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놓치는 것이야 말로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졌는데 이 세상에서 돈 잃고 건강을 잃는다고 해서 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서 주어지는 죄악에 대한 형벌로서의 망함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업이 망했습니까? 하나님의 큰 사랑이 임하는 중입니다. 사업을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던 죄악의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다 대통령이나 장관 같은 높은 자리에 오르기를 꿈꾸지만 실제로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었던 사람들도 감옥에 들어가고 차라리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받지 않았을 수치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도 망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고통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이냐, 고통을 수반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이냐는 것입니다. 나의 죄로 인한 형벌은 전부 십자가의 주님께 향했습니다. 그럴 때에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죄인 맞춤형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욥은 이러한 아픔에 대처하는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햇빛과 비가 악인에게도 내리고 의인에게도 내리듯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만 내려옵니다. 죄악에 대한 모든 형벌은 주님께서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16~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고민은 어떻게 해야 고통 없는 사랑을 받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방법은 오직 십자가입니다. 죄악 됨이 여전히 살아서 기세등등하게 피어오르는 나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과 승천에 연합하여서 의인의 상태를 이루어야 합니다. 의인의 상태는 곧 하나님을 유일한 기쁨거리로 인정하는 상태이며 하나님을 열망하는 상태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되는 은총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욥의 상태를 십자가에서 자발적으로 수행해 나가야 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들에 대한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이세요. 그렇게 하나님보다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야 말로 죄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죄악에 맞추어진 사랑을 하시기 위해서는 자녀들에게 문제를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극성일수록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아프게도 하실 수 있을 것이고, 심하면 먼저 데려가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24시간 사업에 몰두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도 사업 때문에 믿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랑 방법은 죄인 맞춤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업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시기 위해서 사업을 빼앗아 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에 사업을 사랑하던 마음은 아픔을 느낄 것입니다.

이러한 아픔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사업에 대해 죽어야만 합니다. 사업장에서 사업이 아닌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쁨이시지 어떻게 사업이 잘 되는 것이 기쁨일 수 있겠냐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잘 안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고백을 반복하면서 의인의 상황이 되어갑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해 질 때에 우리의 삶에서는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했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고백이 날마다 이어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나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불통과 재앙과 환란이 찾아오더라도 망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한 번도 사랑해 볼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곧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시기 위해 허락하신 은혜입니다.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에 전념하면서 고통 없는 하나님 사랑을 충만히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망함이 없는 세상에서 고통 대신에 평강으로 삶을 살기 위해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에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