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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죄인스러움'만이 죄인의 살 길_태승철

by 태승철 · 17-05-23 10:18 · 7,449
아담으로 인한 유전죄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무척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피할 수 없게 주어진 상황이고, 또 조금만 깊이 보면 이 사실 자체가 근본적으로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면 가장 올바른 삶의 방식은 죄인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죄인이 죄인스러운 것이 바로 의로움의 시작입니다. 생의 문제는 태생적 죄인 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죄인으로 태어난 자들이 의인스럽게 살고 있음에 있는 것이지요.

죄인스러움만이 죄인의 살 길

(욥기 9:1~35)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3.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11.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12.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

13.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밑에 굴복하겠거든

14.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

15.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16.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죄인스러움'만이 죄인의 살 길>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죄인스러움'만이 죄인의 살 길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진심으로 대답을 해보시지요. 여러분이 10억을 받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단 죄를 짓고 1년 정도 감옥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1년 정도 감옥에 들어가야만 하는 범죄가 어느 정도일까요? 요즘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된 뉴스에서 비선의료 성형외과 의사 부인이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뇌물을 준 것 때문에 1년 징역을 언도 받았습니다. 경제수석에게 비싼 백이나 비싼 술을 뇌물로 바친 것 때문에 징역을 언도받았습니다. 이 정도 범죄를 저지르고 1년간 징역살이를 하고나면 10억을 준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실 1년에 10억을 벌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10억은 월급쟁이가 평생 벌어도 모을 수없는 돈입니다. 그런데 1년 징역살이를 하면 그 돈을 얻게 된다면 어떨까요? 징역살이를 한다고 해서 굶어죽는 것도 아니니 그까짓 1년 금방 지나가지 않겠습니까?

이 문제를 학생들에게 물어봤더니 초등학생은 17%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직 돈에 눈을 뜬 아이들이 적습니다. 그러나 중학생은 무려 39%로 늘어납니다. 고등학생은 무려 56%가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대학생 이상의 청년들에게 물었다면 아마 60~70%도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이 돈이 10억이 아닌 50억이나 100억이었다면 거의 100%가 다 한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죄를 지으면 죄인 됨의 자각이 발생하고 1년간 징역살이를 해야 하는 죄인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의 매력이 죄인 됨의 마음의 자각을 깔아뭉개고 넘어가게 합니다.

 

오늘 제목에서 채택한 죄인스러움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자랑스럽다, 당황스럽다, 쑥스럽다, 자연스럽다, 성스럽다, 의심스럽다와 같이 ‘~스럽다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단어는 많이 있지만 죄인스럽다는 말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꼭 필요한 말입니다. 죄인스러움은 죄인이라는 자각이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에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죄인 됨의 자각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죄를 지어서 10억을 벌겠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에 의해서 이 범죄에 대한 자각이 깔아뭉개지기 때문에 죄인스러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징역살이는 사회적으로 범법한 자들에게 가하는 가장 대표적인 벌입니다. 징역살이의 특징은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주체성과 주도권을 빼앗는 것입니다. 하고 싶고 먹고 싶고 가고 싶어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산책하고 운동하는 것조차도 정해진 시간에 강제적으로 끌려 나와서 운동장에서만 해야 합니다. 이것이 강제적으로 부가된 죄인스러움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죄인스러움을 가질 때에 삶에 대한 주체성과 주도권은 사라지고 맙니다.

처녀가 아기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죄인스러움을 거부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처녀가 임신을 했다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무조건 잘못했다고 땅에 납작 엎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죄인스럽게 행동하지 못하고 자꾸 어떤 이유를 대면서 죄가 없다고 항변을 합니다.

죄인 됨의 가장 큰 특징은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말이 없어지는 것은 곧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고 이것은 곧 주체성 포기를 뜻합니다. 내가 정말로 죄인임을 깨달으면 주체성은 활성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인 된 자각 자체를 깔아뭉개고 죄스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까, 사회에서는 징역살이를 통해서 강제적으로 죄스러움을 부가하여 주체성을 억제시키는 것입니다. 삶에 대해 주도적일 수 있는 입장을 제거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온 인류를 향해서 말씀하고 있는 죄인 됨은 무엇일까요?

마음에 하나님 이외의 대상을 더 좋아하고 사랑하기 위해 담은 상태입니다. 부부는 배우자를 마음에 담고 부모는 자녀를 담습니다. 형제자매를 담을 수도 있고 친구나 애인을 담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돈이나 권력이나 지위를 담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예술이나 학문을 담을 수도 있는데 하나님보다 먼저 마음에 담았다면 죄가 됩니다.

이것이 죄인 것을 알면 죄의 자각이 나타납니다. 마음에 자녀를 담은 것을 죄로 아는 자각이 나타나면, 자식에 대해서 주도적인 주체성이 억제되는 상태가 죄인스러움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자식을 담은 것이 죄인 줄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주체적으로 자녀를 키우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내 자녀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만 하고, 일류대학을 들어갈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공급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죄인스러움이 없어져버리고 마는데 이것이 인생의 불행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이 이 문제를 심각하고 깊은 차원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앞서 빌닷이 욥의 고난을 죄악에 의한 하나님의 형벌이 주어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욥이 그 말을 받아서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부분과 그 아랫부분을 계속 읽어보면 욥은 다시금 자신의 의를 주장합니다. 어떻게 하나의 고백 속에서 이렇게 이율배반적인 언사가 들어갈 수가 있을까요? 욥은 하나님이 자랑하실 만큼 순전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이었는데, 앞부분에서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뒤에서는 자신이 의로운데도 고난과 재앙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분명히 욥의 생각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것을 욥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욥이 지금 유전 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전 죄는 곧 본성적으로 마음에 하나님 이외의 것을 담으려는 성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향을 따라서 배우자를 담고 자녀를 담고 돈을 담습니다. 그것들이 기쁨과 만족을 줄 것이라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욥도 어쩔 수 없이 마음에 열 명의 자녀들과 재산을 담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욥이 달랐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음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를 지켜보고 계심을 인정한 것이고, 그 앞에서 내가 살아야 된다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유전 죄를 타고 나서 마음에 하나님 이외의 것을 담는 죄인이라면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인 됨의 사실을 알고 죄인스럽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욥의 의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얻게 되는 의가 아직 나타나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욥의 의를 인정해주시는 것은 이러한 모습이었습니다. 죄인임을 자각하고 죄인스럽게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열 명의 자녀가 없어진 이유는 욥이 우리와 똑같이 열 명의 자녀를 마음에 담았다는 것입니다. 유전 죄의 성향 때문에 눈에 보이는 자녀들을 마음에 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담으려 해서 담아지는 것이 아니고 유전 죄로 인해서 이미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 막대한 재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러한 상태가 죄임을 알았습니다. 그 자각이 말로 행동으로 나타나며 욥은 자신의 주체성을 억제시켜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들을 몰수하셨을 때에 욥은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말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비방할 때에도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1~12절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라고 합니다. 이처럼 욥의 의로움은 죄인스러움에 있었습니다.

죄인스러움은 절대로 주도적이고 주체적으로 삶을 맞이하지 않습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앞에 계시기 때문에 비록 자녀나 재산을 마음에 담았을지라도 그것이 죄인 됨을 아는 것입니다. 자녀가 좋지만 자녀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고 스스로 징역살이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아하는 것들이 있어도 죄인이기 때문에 주도적이고 주체적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주체성과 주도성을 감옥에 가두고 징역살이를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욥의 뛰어남이 있습니다.

아직 십자가가 제시되지 않았기에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공간도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을 눈으로 뵙고 마음을 채울 대상으로 관계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전 죄가 작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724절에서 사도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했던 그 죄악에 의해서 자녀나 재산을 좋아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욥은 이것이 죄악임을 알고 항상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좋아해야 하지만 듣기만 했던 하나님을 좋아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기에 그러한 상태를 죄송하게 생각하여 죄인 됨의 자각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자녀들과 재산이 모두 없어졌는데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가져가셨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욥이 재산을 모으는 과정에서는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스스로 재산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욥은 재산과 자녀와 건강과 명예와 생애의 문제들에 대해서 주체성을 완전히 억제시키고 징역살이를 했습니다. 이것이 죄인스러운 것입니다. 죄인이라면 말이 없어야 하고 죄인이라면 주체성이 억눌려 있어야 합니다.

죄인스러움을 잃은 죄인은 말과 생각이 많아집니다. 내 자녀를 이렇게 키울까 저렇게 키울까 고민하고, 자기가 정해놓은 대로 이루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자녀를 먼저 마음에 담은 것이 죄인데 그러한 자각이 없이 의인스러움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욥 같은 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유전 죄의 성향 때문에 무엇이든 마음에 담으면 주체적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건강을 담으면 몸에 좋은 약들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주도적이고 주체적인 성향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무엇인가를 담았을 때에 스스로 주체성을 억누르는 욥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나도 모르게 이 세상 것을 마음에 담습니다. 그럴 때에 삶은 자동적으로 주체적이 되어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계획하고 소원하고 추진합니다. 욥이 주체성을 억제했던 것처럼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해야만 합니다. 이 세상 것을 담고 있는 주체적인 나를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욥에게 임한 하나님의 칭의이고 이것이 바로 의로움의 시작입니다. 죄인이라는 자각을 하고 죄인스럽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주체성이 죽을 때에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세상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세상 것을 담을 수가 없고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만 담을 수 있습니다. 승천하신 주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셔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주십니다. 그럴 때에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주인 되심이 나타나시게 될 것입니다.

나의 주체성 없이도 삶은 이끌려져 나가는 것입니다. 내 속에 하나님을 담고 있으면 자녀와 재산과 건강과 같은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께서 그 뜻에 맞게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물론 모두가 솔로몬이 되고 다윗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살다가 박해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도 있지만 하나님으로 만족한 자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의로움의 시작은 죄인 됨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 자각이 생각과 판단과 말과 행동에 나타나는 죄인이면 죄인스러워야 합니다.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충분히 죄인 됨의 자각을 통한 죄인스러움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욥이 마지막에 하나님을 뵙고 누렸던 축복이 우리에게도 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유전 죄의 성향을 따라 오늘도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이외의 세상 것을 담고 살아갈 것입니다. 이 상태를 죄로 알아서 나의 생각과 행동과 말에서 죄인스러움이 나타나게 하시고, 주님의 십자가의 도움을 받아 나의 주체성이 완전히 죽는 축복을 경험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