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books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지금에 생각과 행위를 최적화하기_태승철

by 태승철 · 17-06-20 21:50 · 7,244
미래의 목표를 향하여 열정을 가지고 달려가는 삶은 훌륭하지도 아름답지도 부럽지도 않습니다. 단지 애처로울 뿐입니다. 성공은 미래 목표의 성취 여부가 아니라 지금의 판단과 생각과 말과 행위의 최적화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주어지는 지금의 상황과 대상에 대하여 내 판단과 생각과 말과 행동이 반복적으로 최적화 되면 됩니다. 최적화 된 지금들이 모인 삶이 성공이지요. 가장 적합한 판단과 생각과 말과 행동의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지금에 생각과 행위를 최적화하기

(욥기 28:1~28)

 

 

23.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24. 이는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살피시며

25.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며 물의 분량을 정하시며

26. 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음이라

27. 그 때에 그가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탐구하셨고

28.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지금에 생각과 행위를 최적화하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지금에 생각과 행위를 최적화하기

새 정부 들어서 인사청문회에 관한 이야기로 연일 시끄럽습니다. 대통령은 조각(組閣)을 위한 적합한 인물을 지명하는데, 국회의원들은 청문회에서 그들의 흠집을 찾아냅니다. 뉴스를 통해 이러한 모습을 보다보면 대체 누가 잡음 없이 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을지에 대해 어려움이 느껴집니다. 여소야대의 상황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협조를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야당이 극심하게 반대하면서 대치국면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데 걱정이 됩니다. 인수위원회도 없이 출범해서 국내외적으로 산적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섭리를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청문회를 보면 후보자들의 말과 과거의 글과 행동에 대한 것을 추궁하는데 후회도 많을 것입니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기어코 사퇴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 마음속에는 아마 왜 그렇게까지 행동을 했고 왜 그런 글을 썼는지 후회를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생각과 판단과 글과 행동에 대해서 청문회를 한다면 나는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결국 청문회에서 살펴보는 것은 생각과 말과 글과 행동이 그 당시에 적합한 것이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 당시로는 적합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최적으로 믿어서 행한 판단과 생각과 말과 행동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생각하고 말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며 살아야 하는데 오늘의 행동이 일주일 뒤에, 한 달 뒤에 혹은 더 먼 미래에도 적합하였다고 판단되면 좋으련만 부적합한 것이었다고 판정이 된다면 어떨까요? 단순히 부적합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는 오늘에 미치기 때문입니다. 즉 미래에 어떻게 결과 될 것인가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지금 내게 주어지는 상황이나 삶의 조건이나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 최적화된 생각과 판단과 말과 행동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가 매우 중요해집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삶을 살아갈 때에 미래의 목표를 향하여 열정을 가지고 달리라고 아우성을 치며 충고합니다. 목표가 없는 삶은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만 애처로운 일입니다. 인생의 성공은 미래에 설정한 목표의 성취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상황과 대상에 대한 나의 반응이 적합한지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반복적으로 지금에 대해 최적화된 판단과 생각을 할 수 있으면 인생은 굳이 미래를 보지 않더라도 성공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불행을 느끼고 마음에는 기쁨과 감사가 없고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다면 결국 과거에 최적화되지 못한 대응을 했기 때문이며 지금도 최적화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한 결과가 지금 나타났다고 할지라도 지금부터라도 그에 대한 가장 좋고 올바른 최적화된 반응을 할 수만 있다면 걱정은 없을 것입니다. 최적은 가장 올바르고 좋은 것입니다. 매 순간마다 가장 적합한 판단과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은 대화의 화제를 지혜에 관한 것으로 바꿉니다. 이제까지는 친구들의 비판에 반론을 제기해왔지만 결론을 지혜로 내립니다. 재앙이 임한 욥의 상황에 대해서 친구들의 판단은 오류투성이였고, 더욱 큰 문제는 그들의 말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욥은 이들의 태도가 단순히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친구들 마음속에 들어있는 지속적인 성향이 잘못된 판단을 하도록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욥에게 질투나 시기를 가지고 욥의 문제에 대해서만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또 잘못된 생각과 판단을 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만드는 기질적 성향이 마음속에 있었다는 것인데 바로 지혜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나 대상에 대해 최적화 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생각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앞장에서 핵인(核人, 뉴클리어맨)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인격의 핵과 관련 되어서 욥은 지혜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먼저 욥은 1~11절까지 광산채굴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 옛날의 광산업은 지금보다도 조야하고 소박한 작업을 통해서 금 은 철 동을 채취하였습니다. 그 길은 솔개도 알지 못하고 매의 눈도 보지 못하고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알 수 없는데 인간들은 그것을 찾아낸다는 것입니다. 굴을 파고 밧줄을 내려가며 땅속 깊은 곳에서 갖은 보화를 캐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지혜는 이렇게 땅을 파서 보화를 캐내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채굴 작업과 같은 노력과 각오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2~22절까지는 어떤 보화를 통해서도 그 지혜를 살 수 없음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지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채굴할 수도 없고 대가를 지불하고 살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지혜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 경외와 악에서 떠남이 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인격의 핵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에 채우기 위해서 향자적(向自的)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첫 번째 관계하는 상대와 마음이 결합하는 것이 인격의 핵이 됩니다.

마음과 결합된 대상이 돈이면 판단은 돈에 의존하게 됩니다. 내게 돈을 벌게 하는 사람이나 돈을 벌 수 있는 상황이 좋은 것입니다. 자녀를 기르면서도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고,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인지 아닌지를 통해 직업을 선택하게 합니다. 아내와 남편이 대화를 할 때에도 돈 버는 것을 선악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이처럼 모든 생각과 판단과 말과 행동은 인격의 핵에서 나오게 됩니다.

지혜가 없는 것은 곧 최적화된 생각과 판단과 말과 행동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들과 마음이 결합하여 인격의 핵을 이루게 되면 최적화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인간은 마음이 결합하는 첫 번째 대상에 대해 경외심을 갖게 됩니다. 경외심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워하는 이유는 내게서 없어질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집안의 쓰레기가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영국에서 화재로 많은 사람이 죽어서 안타깝게 여기지만, 내 마음에서 진심으로 간절한 슬픔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생명이 나의 마음과 연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인간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마음과 첫 번째로 연합된 대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지는 것이 가장 무섭다면 돈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가 없어지는 것이 가장 무섭다면 자녀를 경외하고 있는 것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 최고라면 건강에 대해 경외심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경외를 추상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첫 번째가 아닌 상태를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경외입니다.

 

욥이 재산을 잃고 자녀들이 죽고 아내는 떠나가고 건강을 잃고 친구들이 비난하고 사회적으로 명성이 사라졌을 때에도, 진정으로 두려워한 것은 하나님의 주체성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활동하시는 역사와 주체성이 결별 될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의 첫 번째 대상으로 삼는 연합이 바로 지혜라는 것입니다. 비록 욥은 아직 하나님과는 만나지 못한 상태이지만 이러한 사고의 발전을 통해서 욥기 마지막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루게 됩니다.

욥은 친구들이 어리석은 말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의아함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유가 지혜가 없기 때문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들은 유식했고 인정받는 사람들인데도 왜 그들에게는 지혜가 없었을까요? 바로 이 세상 바깥에 계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주체성을 마음과 연합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대해 역사하시지만 그 일하심은 하늘이 땅에 임한 것이지 이 세상에 속해있는 것이 아닙니다. 욥은 악에서 떠남을 지혜라고 했습니다.

악은 마음이 결합할 첫 번째 대상으로 하나님 아닌 돈이나 자녀나 건강 취직과 결혼 등과 같은 이 세상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합하여 판단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사는 것이 곧 범죄입니다. 하나님보다 나라를 사랑해서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을 할지라도 오히려 그 모든 일은 나라에 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자녀를 먼저 붙들어서 자녀를 위해 판단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자녀를 향해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 자녀들의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애인을 사랑하여 마음에서 애인을 첫 번째로 삼으면 오히려 그 애인에 대해 최적화된 반응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최적화되지 못한 반응은 곧 악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매순간 주어지는 지금에 대해서 어떻게 최적화할 수 있습니까?

지혜는 배워야 하고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 생활화로 가능한 것입니다. 최적화를 위해서는 먼저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끌려가는 마음이 죽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나의 마음이 죽었음을 고백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가장 최적의 결단이고 마음의 움직임이고 생각입니다. 포기하거나 체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함을 통하여,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의 길을 따라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기쁨과 평강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평강을 누리며 지금을 바라보면 눈앞에 보이는 상황과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뜻을 말씀하실 것이고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적화된 말과 행동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쁘기 전에는 어느 것에 대해서도 판단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으로 온전히 만족하고 평강을 누리기 전에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소원하고 계획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모조리 악이고 오류이며 실수이고 착각입니다. 하나님으로 온전히 만족해서 지금 문제가 문제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리는 기도하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돈이 없는 상황으로 인해 걱정과 두려움이 생겨나고 그로인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것들은 모두 적합하지 않은 일입니다. 지금보다 더 큰 불행을 가져올 뿐입니다.

최적의 움직임은 어떤 일 앞에서도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문제의 해결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운명적으로 하나님 외에는 기쁨과 만족이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평강이 주어지면 최적화된 생각과 판단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을 통해 흘러나와 결실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내게 주어져있는 지금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십자가 생활화로 최적화된 생각과 판단과 말과 행동을 함으로서 이 최적화의 작업이 죽을 때까지 날마다 순간마다 반복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