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0,1)복음방송

내 마음의 콩밭을 찾아서_태승철

작성일
17-06-21 10:08
작성자
태승철
조회
7,239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소작인이 몸은 주인의 논이나 보리밭에 있는데, 마음은 자신의 콩밭에 가 있음을 지적하는 비판적인 뉘앙스의 속담이지요. 여기서 한 번 이 속담의 취지를 뒤집어서 '마음은 콩밭에 가 있어야 한다'로 바꿀 수는 없을까요? 십자가복음 신앙이 요구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몸이 있는 곳에서 마음이 매몰되어서는 복음신앙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아직 마음의 콩밭을 찾지 못한 욥을 통해 내 마음의 콩밭을 찾아봅니다.

내 마음의 콩밭을 찾아서

(욥기 29:1~25)

 

1. 욥이 풍자하여 이르되

2. 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

3. 그 때에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치었고 내가 그의 빛을 힘입어 암흑에서도 걸어다녔느니라

4. 내가 원기 왕성하던 날과 같이 지내기를 원하노라 그 때에는 하나님이 내 장막에 기름을 발라 주셨도다

5. 그 때에는 전능자가 아직도 나와 함께 계셨으며 나의 젊은이들이 나를 둘러 있었으며

6. 젖으로 내 발자취를 씻으며 바위가 나를 위하여 기름 시내를 쏟아냈으며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 마음의 콩밭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 마음의 콩밭을 찾아서

마음은 콩밭에 가있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의미는 몸이 만나고 있는 상황이나 사건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는데, 마음은 과제와는 상관없이 엉뚱한 곳에 가있는 경우가 있음을 일컫는 비판적 뉘앙스의 속담입니다.

이 속담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선시대에는 소작인들이 많았습니다. 소작료가 비싸다보니 집 주변의 빈터나 논두렁 밭두렁에 콩을 심었습니다. 이 콩은 세를 낼 필요가 없는 온전한 내 것이 됩니다. 그런데 추수 때가 되면 지주의 논밭 일이 바빠서 도저히 자신의 콩밭에서 수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편 콩은 서리하기에 매우 좋은 작물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소작인이 몸은 지주의 논밭에 와 있지만 마음은 자신의 콩밭에 가 있습니다. 누가 콩을 서리해가지는 않을지, 대체 언제 추수를 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우리의 신앙에 빗대어 이야기해보면 이 마음의 구조가 좀 더 명확해집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 때에 소작인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삶의 터전과 조건이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숨, 가족, 나라, 세상 등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이 모든 역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내가 소작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실제로는 주인이 오셔서 농사를 짓고 계십니다. 단 내 몸과 생각과 언어를 이용해서 농사를 지으십니다.

그렇다면 나의 콩밭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이 나의 콩밭이고 하나님이 나의 콩입니다. 내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나의 기업과 몫으로서 하나님을 온전히 갖도록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정상인데 사람들은 콩밭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마음이 콩밭에 있다가 아니라 마음은 콩밭에 있어야 한다.’라고 말해야만 하는 처지입니다. 이렇게 강조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도록 운명적으로 마음을 둘 곳은 하늘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소작농 주제에 자기 콩밭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주인의 농사일에 더 관심을 쏟고 살아갑니다. 주인의 것으로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데 이것이 우리의 신앙형태입니다.

 

욥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욥은 변론을 끝내고 29~31장에서 독백을 합니다. 29장은 고난 받기 이전의 복된 삶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0장은 현재의 고난 받는 삶의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31장에서는 다시 자신의 무죄함에 대한 호소가 나타납니다.

291~6절까지는 하나님이 보호하셨음을 믿는 과거에 대한 회고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보호로 윤택한 삶을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7~17절까지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사회적 칭송을 받았던 회상이 나타납니다. 18~20절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에서 만수무강을 확신했던 기억을 더듬고 있습니다. 21~25절까지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에서 사회적으로 지도자의 삶을 살았음을 회고합니다. 마음이 과거의 윤택했던 상황을 콩밭삼아 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욥의 이 상태를 사도 바울과 비교해보면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드러납니다. 먼저 빌립보서 411~13절을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을 보면 자신의 몸이 처한 비천한 상태나 풍부한 상태가 마음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족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단순히 적은 것으로도 만족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몸이 처한 비천함이나 풍부함과 접촉하기 전에 마음이 예수님 십자가의 길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음을 뜻합니다. 마음이 하늘의 기쁨으로 만족한 상태에서 이 땅의 풍부함을 마주하면 낭비가 없고 나를 위해 씀이 없습니다. 또한 하늘로 기뻐하는 가운데서 비천함을 마주하면 불평과 원망이 없고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족은 몸이 처한 상황과 무관하게, 마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길을 따라 올라가서 하늘로 만족하는 비결을 터득했기에 어떠한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재앙이 임하기 전의 상태를 회상하며 마음을 두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욥이 이 세상에서 마음 붙일만한 좋은 것들을 모두 상실하게 된 것을 보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다시 돌려주실 것을 기대하지도 못하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욥에게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체적으로 결정하신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들을 돌려달라는 간청조차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이 자연적으로 세상 바깥으로 몰려가게 되어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자 소망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욥에게 한 가지 딜레마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을 생각으로 바라며 소망하는 단계까지 왔지만 하나님은 아직 욥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두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막혔으니 마음은 이 세상 안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빈 채로 존재할 수가 없고 무엇인가를 잡아당겨서 채워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만족과 기쁨을 향한 몸부림입니다. 하나님을 소망했지만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보이지 않자 욥의 마음은 재앙이 없던 옛날로 돌아갑니다. 과거를 콩밭으로 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해주시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일까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의 길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두드러지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갇혀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소망하는 단계에 이르렀던 욥의 신앙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께 도달할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도 욥의 처지가 되어서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음을 알게 될 때에, 마음은 세상 바깥에 계신 하나님을 찾고 만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욥과는 다르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께서 복음의 길이 되어주십니다.

욥은 이 세상 것을 다 잃고 나서 마음이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은 더 이상 세상에서 만족과 기쁨거리를 찾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늘 죽는다고 강조하는 마음의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만족거리나 기쁨거리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세상 바깥을 향하고 죽었지만 길이 없어서 답답하고 숨이 막혀서 질식 상태인 자들에게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은 기쁨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어야 십자가는 복음이 됩니다.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소작인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 땅은 내 것이 아니기에 우리의 마음은 하늘 콩밭에 가 있어야 합니다. 이 땅은 내 손으로 농사를 짓지만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만족과 기쁨의 문제는 결코 이 세상에서 해결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 땅에서도 기쁘고 만족할 수 있다고 우리를 속였습니다. 이 속임수가 원죄로 작용하며 이 땅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게 합니다. 그러나 온전히 우리 몫인 콩밭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콩밭이고 이 세상 것은 주인의 밭이기에 나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로 결론이 될 것은 분명한데, 어떻게 살아야 십자가 생활화가 되는 것일까요? 눈으로 보는 것에 어떻게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자꾸 안 된다는 쪽으로 생각을 몰아가는 것이 우리의 단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육체의 눈으로 보면서도 보이지 않고 귀로 들으면서도 들리지 않고 입으로 먹으면서도 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마음을 보내지 않는 것은 사람의 일상적인 삶에서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서삼경의 대학에도 심부재언(心不在焉)이면 시이불견(視而不見)하며 청이불문(聽而不聞)하며 식이부지기미(食而不知其味)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라는 뜻으로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마음을 담아서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생활화를 할 때에 마음을 십자가에 두어야 합니다. 유일하게 이 땅에서 내 것으로 주어진 것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빠지는 머리카락 하나 조차도 내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콩밭입니다. 이 콩밭에 마음을 두고 자녀를 보고 사업을 보고 건강을 보세요. 아무리 내가 건강을 챙겨도 내 것이 아닙니다. 자녀도 돈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소작농에 불과하기 때문에 마음을 콩밭에 두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쇠고기를 먹으려면 소가 죽어야만 합니다. 쌀로 밥을 지어먹기 위해서도 벼가 죽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이와 같이 내 마음의 먹거리가 되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서 마음이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면 세상을 눈으로 보아도 보이지를 않고, 귀로 들어도 들리지 않게 됩니다. 반대로 마음이 돈에 가 있으면 돈 이외에는 다른 것들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를 않습니다. 판검사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사명보다 돈을 좇게 됩니다.

 

이 복음의 길을 욥의 마음과 비교해봅니다. 지금 욥의 마음은 하나님을 소망했다가도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의 길이 열리지 않자 과거로 돌아가려 합니다. 과거에 누릴 복을 다시 누릴 것이라 기대하지도 않았기에, 갈 곳 없는 마음이 어쩔 수 없이 재앙 이전의 과거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비어있기에 무엇인가를 마음의 콩밭으로 삼으려합니다. 마음은 채워짐으로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막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고, 반대로 이 길이 열렸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십자가 사건이 왜 진정한 복음인가를 욥을 통해 다른 언어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보아야합니다. 마음을 사업장에 둘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일은 망하든 흥하든 지주이신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흥한다고 좋아할 필요가 없고 망한다고 싫어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풍부와 비천 모두에 마음이 거할 수 있는 이유는 마음의 만족은 하늘에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이 땅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주체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자신들의 한 일로 인해 하나님의 평가를 받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다만 욥에게는 아직 하늘로 가는 길이 막혀있었기에 하나님이 하신 일중에서 좋았던 때를 마음의 콩밭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 점을 유의하신다면 우리에게 허락된 하늘의 길인 십자가가 얼마나 감사한지를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내 콩밭인 주님의 죽으심을 끊임없이 먹어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임을 인정하는 동안에 내가 보고 듣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나의 유일한 이 땅에서의 콩밭은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서 이 세상 모든 순간에 죽은 자가 되고, 하나님을 향해서만 산 자로서 이 세상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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