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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하나님은 잔소리 대신 수술하신다_태승철

by 태승철 · 17-06-23 09:57 · 7,677
지금의 삶의 처지는 앞선 행동의 결과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행동에 대해 늘 부모, 선생, 선배, 상사 등으로부터 잔소리가 따라다닙니다. 철이 들면 기특하게도 윗사람이 잔소리하기 전에 내가 나 자신에게 잔소리를 하게 되지요. 즉 자발적으로 행동을 바꾸려 합니다. 하지만 행동을 바꾸려 하는 한 행동은 바뀌지 않고 그래서 행동을 바꾸려는 모든 시도는 잔소리 수준에 그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 변화를 위한 잔소리 대신 곧장 마음을 수술하십니다.

하나님은 잔소리 대신 수술하신다

(욥기 31:1~40)

 

 

1.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2.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의 전능자께서 주시는 기업이 무엇이겠느냐

3. 불의한 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불행이 아니겠느냐

4. 그가 내 길을 살피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은 잔소리 대신 수술하신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은 잔소리 대신 수술하신다

욥은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삶의 현장에서 주체적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살았습니다. 오늘 읽은 부분 이후에 8절까지는 자신에게 거짓과 탐심이 없었음을 고백하고, 9~12절까지는 단지 마음만으로도 간음죄를 지어본 적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13~15절까지는 갑의 위치에 서 있을 때에 을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인권을 무시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갑과 을 모두가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이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갑질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16~23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두려워서라도 사회적 약자의 형편을 돌보지 않았던 적이 없으며, 24절부터는 재물을 포함하여 우상숭배 한 적도 없으며, 29절부터는 원수와 나그네들에게 해악을 끼친 적이 없고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33절부터는 사회적으로 인간세상에서 죄를 저지르고는 그것을 감추려고 했던 적이 없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지금의 처지를 과거 행동에 대한 결과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잘못된 행동이 나타날 때에 늘 윗사람들은 아랫사람에게 잔소리를 합니다.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나쁜 결과가 열매로 맺히기 때문에 행동을 교정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철이 들었다는 것은 곧 다른 사람이 잔소리를 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원하는 만큼 행동을 바꾸는 사람도 없고, 설령 행동을 바꾼다고 해도 원하는 삶의 결과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삶의 결과는 곧 궁극적인 기쁨이고 만족이고 행복입니다. 행동을 바꿈으로서 만족하고 기쁨을 누릴 줄로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성공한 사람이나 탁월한 사상가들 심지어 종교가들까지도 나서서 행동을 바꾸라고 하지만 모두 잔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행동을 바꾼다고 해서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과 행복에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습니다.

대신에 성경은 행동을 바꾸라고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 말에 의문을 가지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구약성경 전체가 율법으로 이루어져 있고, 복음의 시대에 전해진 신약성경에서조차도 행동을 바꾸라는 명령은 얼마든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행동을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행동은 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행동이 나타남은 마치 병의 증상과도 같기 때문에 이러한 증상이 없으려면 우선 병이 없어야 합니다. 병원에서도 단순히 증상을 고치려는 것이 아니라 병의 근원을 고칩니다. 성경이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바뀌어 진 행동을 이야기 하는 것은 행동을 바꾸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나타나는 이유로 들어가서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행동과 결과만을 중시하지 행동 자체가 결과라는 것에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행동의 이유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행동을 바꾸는 것 자체는 의미가 없고 잔소리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행동을 바꾸려고 하지도 않으시고 바꾸라고 하지도 않으십니다. 오히려 행동을 결정하는 이유의 차원으로 올라가서 수술을 해버리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수술대에 우리를 올려놓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행동이 바뀌게 되지만 행동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는 우리가 염두 할 바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요약해보면 욥이 행위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의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의롭게 행하지 않았다면 이 재앙이 내게 마땅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마치 이전에 친구들이 말했던 것처럼 죄악에 상응하는 형벌이 내린다는 인과응보의 기계적 적용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욥이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기에 그에 따른 형벌을 받을 이유가 없음을 반복하여 주장하는 이유는, 언급된 악한 행위들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맹세하기 위함입니다.

욥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보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욥이 기억하지 못하는 잘못이 있다하더라도, 이토록 처참한 재앙이 내려야 될 일을 한 적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욥이 어떠한 악한 일을 해서 이러한 재앙이 주어졌다면 우리 같은 범죄의 제조기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없어졌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전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즉 욥에게 내린 재앙과 행위에는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도식화해보자면 우리에게는 마음의 차원, 행위의 차원, 결과의 차원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행위와 결과의 단계에 주목할 뿐, 앞선 마음의 단계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마음의 단계에 직접 수술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이 의롭게 살았음을 주장하는데, 사람들의 보기에 욥의 이 현실은 그렇게 의롭게 산 사람의 결과물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재산을 잃고 자녀들은 몰살되었고 건강도 잃었으며 친구들에게는 비난을 받으며 사회적인 명성과 존경도 땅에 곤두박질 쳐졌고 아내와는 결별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편이 실제로는 욥의 행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행위의 결과로서 지금의 처지가 주어졌다고 믿었기에, 행위를 바꾸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지속합니다. 그런데 삶의 처지는 행동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이 이러한 일을 당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음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수술이 가해지고 있기 때문에 주어진 현실입니다. 욥에게 주어진 현실은 형벌로서의 재앙이 아닌 마음의 수술이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이 점을 더 들여다보기 위해 마음과 행위와 결과라는 도식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말씀을 나누어봅니다.

먼저 행위는 생각과 말과 육체적 행동을 포함합니다. 생각과 말도 나의 움직임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에 흡입력을 가지고 있어서, 마주 대하는 소중한 것들을 담으려고 합니다. 원수를 담을 수도 있지만 그 원수는 곧 내게서 소중한 가치를 빼앗아 가는 자들이기 때문에 마음에 담고 미워하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에는 내게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소중한 것들이 담겨지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과로서 주어지는 삶의 형편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도식에서 성공과 형통과 행복을 위한 우리들의 몸부림과 노력은 행위의 단계와 그에 따른 결과 단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두 단계를 주로 생각하면서 올바르고 적합한 행위에는 그에 상응하는 복과 상이 주어질 것이고, 그릇되고 악한 행위에는 화와 벌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자기계발서는 곧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나의 행동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속승진이라는 삶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을 바꾸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러한 우리의 행동을 바꾸는 것이 삶의 처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동했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고, 잘못했기 때문에 사기를 당하는 현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에서 행동을 바꾼다고 해서 삶에서 원하는 행복과 만족은 결코 주어지지 않습니다. 욥이 행위적 차원에서의 의로움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렇게 의롭게 살았더라도 재앙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재앙은 행위와 연관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수술이라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주체적으로 활동하심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믿었던 욥에게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들 가운데서 소중한 것을 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유전죄적 성향이기 때문에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욥의 마음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녀나 아내가 담길 수밖에 없었고 건강이나 재산이 담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명성이나 존귀하게 여김 받는 인간관계들도 마음에 담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마음에 소중한 것들이 담긴 상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들을 수는 있지만 결코 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곧 하나님을 상대자로 관계하면서 마음에 담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보면 욥의 생애 전체가 설교를 위해 만들어진 의도적인 삶으로까지 보일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욥이 행위적 차원에서 어떠한 악도 행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늘 자기의 삶은 하나님의 주체성에 의해 이끌려져 가고 하나님이 살고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즉 자신의 주체성을 부인함으로서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위와 삶의 처지와의 관계 이전에 마음의 차원에서 들여다보자면 세상을 담았던 욥의 마음에 하나님을 담을 수 없었습니다. 티끌이라도 마음에 담겨있다면 하나님을 담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보고 마음에 하나님을 담기 위해서는 마음에 담겼던 모든 것들을 내보내야만 했습니다. 그것을 위해 고통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자녀들을 마음에 담고 있는 동안에 마음에 살이 되어서 유착되었습니다. 이것을 내보내기 위해서는 유착되어 살이 되어버린 조직을 떼어내는 수술이 이루어져만 했습니다. 아쉽게도 마음에는 마취가 없기 때문에 욥은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마음의 수술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일반적으로 행위의 결과로 삶이 주어진다고 믿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욥은 행위의 잘못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재앙이 주어졌습니다. 이 재앙의 의미는 마음의 수술이라는 것입니다. 행위나 행동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수술해서 하나님을 뵙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수술이 십자가를 붙잡았을 때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마음으로 십자가를 붙잡고 바라보면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순간을 엑스레이로 찍는다면 어떨까요?

우리의 마음에 담겨져 살이 되어 버린 것들이 수술을 통해 끊어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욥의 처지는 마치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았을 때에 수술상황을 엑스레이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단순하게 십자가를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단지 죄 사함을 받았다라는 한 문장으로 마무리를 지으려고 합니다.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이 확정된 자가 마음에 돈이나 자녀를 비롯한 이 세상의 소중한 것들을 담고, 그것들이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행동만 바꾸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정말로 십자가를 아는 자들일까요? 마찬가지로 처지가 힘들어지면 행동을 바꾸려는 것으로 회개도 합니다. 회개는 내 마음의 수술인데도 불구하고 행동만을 바꾸려고 합니다.

무엇인가 일이 안 풀리면 잘못한 줄로 알고 행동을 바꾸어서 안 나가던 교회도 나가려 하고, 안 하던 기도나 구제도 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봐주셔서 돈을 벌게 해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작 마음의 수술은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단계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는데, 계속해서 행동만 바꾸려고 한다면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행동을 바꾸려는 것을 회개로 생각하고 계속해서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곧 마음에서 일어나는 수술입니다.

이 수술이 일어나는 방법은 십자가를 붙잡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십자가를 계속해서 바라볼 때에 자녀가 죽지 않아도 마음을 비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십자가를 계속해서 바라보지 않는 동안에는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마음에 들어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내버려두면 마음의 살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욥에게서 재앙이라는 수술로 끊어내셨던 것이 우리에게는 아픔 없이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십자가를 계속 바라보면서 내가 이 세상에서 죽었음을 고백할 때에 욥이 보고 있었던 하나님의 주체적인 활동하심이 내 삶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체적 활동이 나타날 때에 그 결과에 대해서도 우리는 오직 십자가로 죽어야 합니다. 그것을 또 마음에 받아들인다면 살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욥에게 재산이나 자녀와 명성도 결국은 하나님이 일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자연스럽게 비어있던 욥의 마음에 담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에 접촉하는 소중한 것들을 담으려 하고 소중하지 않은 것들은 밀어내려고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욥에게서 일어난 재앙의 수술이 끊임없이 계속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의 성향은 이 땅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들을 자꾸만 담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세상을 담을 때에 하나님을 담을 수 없게 되고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관계는 끝나게 됩니다. 그러면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주체적인 역사하심도 끝나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단지 나의 악함에 대한 섭리의 차원에서만 역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단지 십자가라는 수술대에 올라가야 합니다. 마음의 수술이 되어 하나님이 들어오시면 하나님으로 배부름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도 말도 행위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쁜 상태에서 나오는 것들이 되어서 다 변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행동을 바꾸라고 하시지 않고, 다만 우리의 마음을 수술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술이 마음껏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마음을 내어드릴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행동을 바꿈으로서 삶의 형편을 바꾸어보려는 불신앙을 중단하게 하시고, 주님의 십자가를 지속적으로 붙잡음으로서 하나님의 수술이 가능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내주하심이 가능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