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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십자가 주기도(4)-양식과 용서_태승철

by 태승철 · 17-07-21 15:13 · 7,209
보통 주기도문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앞부분은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한 간구이고 그 다음 일용할 양식과 용서 등에 관한 부분은 개인의 신앙생활과 육신의 필요를 위한 간구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주의 기도는 하나의 통으로 짜여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 같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함과 죄의 용서를 구함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하여, 소리가 나도록 땅에서도 손뼉을 마주치게 해달라는 간구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주기도(4)-양식과 용서

(마태복음 6:11~12)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 주기도(4)-양식과 용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 주기도(4)-양식과 용서

주기도문을 보편적으로 보는 이해의 틀은 9~10절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부분은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한 간구로 이해하고, 11~12절의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구절은 개인의 신앙생활과 육신의 필요에 대한 간구로 구분하여 이해합니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하신 기도는 예수님에 의해서 육신에 필요한 간구임이 거부됩니다.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에 이어서 나오는 25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31절에서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32절에서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앞부분 7~8절에서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라고 하셨으므로 33절의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육신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에 대해서 앞뒤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기에, 주기도문 도중에서 그런 기도를 가르치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초대 교부들은 이 일용할 양식을 영적으로 해석하였습니다. 말씀과 성찬식 때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조차도 예수님의 의도와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간구는 앞서 말씀하신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에 대한 간구와 이 땅에 사는 나 자신을 위한 간구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으로 짜여 있습니다. 나 자신의 존재 이유조차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에 다 가있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 위해 하나의 통으로서 짜인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는 하늘나라가 임하고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가장 필수적인 이야기입니다. 하늘나라가 임하고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손이 임하실 때에 이 땅에 있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손과 손뼉을 마주쳐서 소리가 나게 할 것인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가 실제로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만 하기 때문에,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뜻이 이루어질 때에 나는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를 가지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나는 그것과는 별도로 내게 필요한 먹을 것도 구하고 인간관계도 이루며 살아가겠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은 곧 그 뜻이 내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나에게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앞서 주기도문에 대해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 부분의 내용을 참고하시면서 오늘은 한 걸음 더 들어가 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 가장 우선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이 땅은 나 개인의 삶의 영역을 말하는 것으로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물론 아프리카에도 인도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우선은 내 삶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의 육체가 살아있어야만 합니다.

육체가 살아있다라는 것은 곧 하늘의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 땅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에서 결정된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우리의 육체입니다. 일용한 양식은 곧 이 육체를 살아가게 하는 필수요소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하는 것은 내가 먹고 살게 해달라는 간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앞의 이야기와 맞물려서 하늘에서 결정된 일들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조건으로서 이 몸이 살아있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있게 해주셨는데 굳이 살아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내 몸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남북통일을 이루시려는 계획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뛰어난 학력, 탁월한 정치력, 스펙, 재력, 집안 같은 것들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무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A라는 사람을 통해 남북통일을 이루시려고 하시지만 A는 그 사실조차 알 필요가 없고 그러한 일을 비전으로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도록 내어드리면 됩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교육을 시킬 때에도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스펙을 갖추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느냐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도 몸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 몸 하나를 하나님께 내어드리면 될 뿐입니다. 그 몸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몸을 드릴 수 있는 아이로 키우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의 몸을 쥐시고 하늘에서 결정하신 일을 땅에서 이루시기 위해서 끌고 가실 것이고, 필요하다면 대학에도 들어가게 하실 것이고 돈도 벌게 하실 것입니다. 혹시 대학이나 돈이 없이도 충분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학력도 집안도 재산도 아무것도 없으셨으나 몸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는 내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하늘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모든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또한 내 몸이 살아있는 이유는 그렇게 하늘에서 이루시고자 결정하신 뜻이 움직이는 통로로서 살아있는 것임을 고백하고, 내 몸을 내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용하시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사실 이 세상을 살면서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미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나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운명론처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발적인 참여로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일입니다.

이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이유가 하늘에서 결정된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함이라는 단 하나에 국한시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살아있기 위해서는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양식을 먹으며 살아가는 이유는 하늘에서 결정된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통로임을 알고 하나님께 내 몸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자꾸만 내 몸을 사용하고 주관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못 생겨도 상관없고 설령 장애나 지병이 있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살아있는 이유는 하늘에서 이루시려는 뜻이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정된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전제에서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는 먹고 살 것을 바라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나의 주체성을 십자가에서 죽임으로서 내 몸이 온전하게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 몸 하나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재산 학벌 가문 외모 능력 스펙 등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스펙이 어마어마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버드대학이나 옥스퍼드대학을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통해서 이루시려는 하늘의 뜻이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일이라면, 그 사람이 하나님께 몸을 드릴 때에 장사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오히려 하버드대학 나온 것 때문에 부풀어 오른 자의식으로 불행했던 사람이, 시장에서 장사를 할 때에는 평강이 찾아오고 에덴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반면에 시골에서 중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농사짓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대학총장으로 세우실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면, 별의별 과정을 다 거치게 하시면서 총장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60이 되고 70이 되고 80이 되도록 아직도 내 몸을 하늘에서 결정된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위해서 내드린 적이 없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의 기도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해야 하는 기도입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인해 내 몸이 살아야 되는 이유는 바로 하늘에서 결정된 뜻들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몸이 살아있어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 몸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듯이 나도 죽기 전에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뜻이 이루어지는 본격적인 무대입니다. 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를 사하여 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인 것은 내게 죄지은 자의 관계에서만 끝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내 죄가 용서받지 못합니다.

저는 하루에 꼭 시간을 정해놓고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드린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계속해서 주기도문의 내용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간구를 드립니다. 여러분도 꼭 그렇게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주기도문 한 구절을 읽고 멈춘 후에 그 구절의 내용을 묵상합니다. 그 묵상한 내용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다보면 한 시간 반, 두 시간, 세 시간이 쉽게 넘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드리려는 내용이 간단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걸립니다.

보통 라고 하면 헬라어로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 단어는 정해진 과녁으로부터 빗나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 죄라는 단어가 두 번 등장합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짓는 죄가 있고 내가 하나님께 짓는 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죄를 모두 일반적으로 쓰이는 하마르티아가 아닌 오페이레마타(ὀφείλημα)로 썼습니다. 오페이레마타는 빚진다, 부채를 가진다, 손해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 본문을 직역하자면 우리가 우리에게 손해를 끼친 자를 사해준 것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끼친 손해를 사해주시옵고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누가복음에서는 이 내용을 좀 바꾸어 오페이레마타와 하마르티아를 섞어 사용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손해를 끼친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빗나간 것을 용서해 주십옵고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죄는 하마르티아가 적절하지만 손해를 끼친다는 뜻의 오페이레마타를 써도 오늘 본문의 이해에 큰 문제가 없기에 그대로 마태복음의 내용을 따라가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는 것으로 배워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자면 내게 손해 끼친 자를 내가 용서함으로서만 하나님께 나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과 충돌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구원은 용서가 전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구절 때문에 주기도문을 못하겠다고 하는 분까지도 본 적이 있습니다. 오히려 상당히 정직한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 없이 넘어가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부분은 볼수록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고 하더니, 우리가 우리에게 손해를 끼친 자를 용서해야만 하나님께서도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고 하십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친한 친구가 한명 있습니다. 그 친구가 위급한 상황이라는 말을 듣고 시간 당 5,000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몇 년 동안 모은 천만 원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종적을 감추어버렸습니다. 배신을 당했고 사기를 당한 것입니다. 그 친구는 내게 엄청난 빚을 졌고 손해를 끼친 것입니다. 이 주기도문대로 한다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제가 천만 원을 친구에게 사기 당했으나 그를 용서해주겠사오니, 하나님께서도 저의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맞물려 들어간다면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가까이에는 배우자에 대해서도 원망이 생길 수 있습니다. 원망이 생기는 이유는 저 남자, 저 여자로 인해 내가 충족되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친지나 직장상사가 내게 손해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손해는 재물에 대한 것만이 아닙니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도 손해이고, 명예를 건드리는 것도 손해이고, 승진을 빼앗긴 것도 손해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뉴스를 볼 때에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졸속 위안부 협의를 이행하라고 우기는 일본의 아베도 손해를 끼치는 셈입니다.

이 모든 손해를 느끼며 갖는 억울함과 원망과 근심걱정을 다 용서할 때만 내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면 누가 용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천만 원을 떼어먹은 친구에 대한 배신감과 원망과 분노가 마음에 가득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의 설교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므로 죄를 용서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멘 합니다. 친구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가득 찬 상태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이 내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교리대로 하자면 오늘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내게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있는 한 하나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셈입니다. 이 구절은 기도문일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자체를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하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이 연관이 대단히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손해가 성립하는 시점은 언제일까요? 우리에게서 손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귀중하게 여겨지는 가치가 있어야만 합니다. 시간 당 5,000원을 받는 사람이 천만 원을 모으려면 몇 년이 걸렸을 것이고 그 돈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 소중한 것을 잃었기 때문에 내 마음에 분노가 생기는 것입니다. 반면에 내가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내게 손해를 끼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안 쓰는 가구나 잡동사니들은 딱지를 붙여서 버립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집어간다고 해서 억울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내게 손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마음에서 소중하지 않은 것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누가 가져가든 말든 손해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손해가 발생하지 않으니 원망도 생기지 않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돌로 치던 자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에는 육체의 목숨이 소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만 원을 마음에 담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에게는 천만 원이 인생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곧 천만 원을 마음에 담고 있는 이 상태가 하마르티아입니다.

세상과 하나님과 나의 삼각관계에서 마음은 공백을 채우기 위해 무엇인가를 붙잡으려고 화살처럼 날아갑니다. 내게 기쁨과 만족을 채워줄 것이라고 믿어지는 것을 향해서 붙잡게 됩니다. 그런데 이 청년의 마음은 하나님이 아닌 돈 천만 원을 향해 날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빗나간 죄로서의 하마르티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손해를 끼치게 된 이유는 본래 그 청년의 마음은 하나님의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돈 천만 원을 채움으로서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고 하나님께서 손해를 입으신 것이고 하나님의 자리를 도둑질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대신에 다른 것을 앉힐 때에 다른 사람이 나에게 손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내게 소중한 것이 있어야 손해는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손해가 성립해야 내게 죄를 짓는 자들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 소중한 것이 100% 이 세상의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 어떤 사람도 내게 손해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처럼 스데반 집사님처럼 요셉처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렸고 보디발의 아내는 누명을 씌워서 감옥으로 보냈지만 원수를 갚을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5020절에서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총리가 되었을 때에 그 아래에 보디발이 있었을 것이고 충분히 그 아내를 처단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에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 하나님 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들어간 것이 억울한 일임을 객관적으로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는 마치 다른 세상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처럼 감옥 생활을 충실하게 했던 것입니다. 마음에 소중한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에 다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동안에 나는 항상 방어를 해야 합니다. 내게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대로 말하자면 내게 손해를 입히는 자들을 벌해야 하고 그런 짓을 못하게 방어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게 소중한 것이 하나님이면 손해를 입힐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과녁을 향해 정확하게 날아가는 것이고 하마르티아가 없어진 상태입니다. 반면에 이 세상의 것을 소중하게 여길 때에 내게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들을 경계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나의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와 몰래 사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귀던 남자가 나에게 와서 저런 나쁜 여자랑 사귀느냐고 여자 친구를 욕한다면 얼마나 어이가 없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내 돈을 빼앗아간 사람에게 억울해 하며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돈으로 기뻐하면서 돈 바람을 피우다 걸린 것을 억울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이 가능하고 어떻게 용서받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내가 회사를 다니는 사람일지라도 소중한 것이라고는 하늘에서 결정된 하나님의 뜻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승진 대상에서 밀려났을지라도 화가 나지 않습니다. 승진을 못했는데도 웃고 다닙니다. 그렇게 웃는 나를 통하여 회사에 대한 하늘의 뜻이 땅으로 내려와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회사 시장 학교 장소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 손해를 끼칠 때에 죄는 성립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서 이 땅에 있는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때에 용서도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소중하게 여겨서 세상 것들을 마음 밖으로 몰아냄으로서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창세기 2212절에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나님께 칭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독자까지도 아끼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이 더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부모의 도리를 내팽개쳤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더 아깝게 여겼기 때문에 자녀를 아까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자녀를 아꼈다면 자녀를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내게 결정적인 손해를 입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현장에서 하나님을 선택함으로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붙잡음으로 우리는 이 세상의 소중한 것들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만을 소중하게 여기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소중하면 내게서 이 세상의 어떤 것들을 빼앗아가고 상실하게 하고 손해를 끼친다 할지라도 다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내게서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은 곧 하마르티아의 죄가 정지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되어야만 내 안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고 모욕하는 상황일지라도, 내 마음에는 아무런 원망이 생기지 않는 것은 스데반 집사님처럼 대단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 붙잡고 세상에 대해서 죽는 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세상은 내버려 두고 하나님만을 마음에 모시고 있으면 그런 사람들과 함께 존재하는 공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내려오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내 주변에는 나를 모욕하는 과장, 나를 우습게 여기는 사장, 내 외모를 놀리는 사람, 내 학력을 천시하는 회사동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 아니고 체면이나 자존심도 아닙니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에 그들은 내게 어떠한 손해도 끼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기도는 그러한 생각을 이 기도에 담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사오니 내 마음에는 그 어느 것도 소중히 여기지 않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떤 손해를 끼칠지라도 내가 그들 모두에 대해서 용서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 한 분만을 소중히 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제일 소중한 상태가 되셨을 때에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고, 내가 기도하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 관계에서 내가 얼마나 화를 내고 원망을 많이 하는지를 보면,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멀어졌는지가 나타납니다. 누구도 원망스럽지 않다면 내 안에 하나님이 충만하게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어떤 것도 마음에 담지 않아서 어떤 사람도 내게 손해를 끼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을 원망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는 그들의 행위가 잘못 된 것임을 압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처럼 그들의 객관적 잘못이 용서 받을 수 있기를 기도는 하여도 그들에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원조가 바로 주기도문이며 그것을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두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탄탄한 준비를 해서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제 몸은 양식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이 몸이 살아있는 이유는 하늘에서 결정 된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오니, 제 몸 하나 완전히 붙잡으시고 완전히 성취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 모든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사람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만을 소중하게 여겨서 그 누구도 내게 손해를 끼칠 수 없게 하시고, 손해를 입히려는 사람에 대해서 용서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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