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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십자가와 교회(5)-자기 십자가의 행복_태승철

by 태승철 · 17-10-17 10:31 · 6,635
우선 급한 김에 말씀 드리자면, '자기 십자가' 지기보다 더 기쁘고 즐겁고 편안하고 행복한 일은 이 세상엔 결코 없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따르려면 꼭 지고 가야할 '자기 십자가!' 평생 신앙인으로 살아도 아직까지 그 개념이 명료하지 않거나 오해로 싸여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의 개념이 분명하지 않다면 신앙인으로의 삶은 애당초 글렀습니다. 자기 십자가 지고 예수 따름은 특별한 사명자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지요. 모든 교인의 일상이어야 합니다.

십자가와 교회(5)-자기 십자가의 행복

(마태복음 16:24~28)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오늘 말씀으로 <십자가와 교회(5)-자기 십자가의 행복>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와 교회(5)-자기 십자가의 행복

오늘 핵심적인 말씀은 24절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됩니다. 그런데 평생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자기 십자가라는 말에 대해서 명확하지 못했습니다. 어렴풋하게 아는 것 같기는 한데 콕 집어서 말하기가 힘이 듭니다.

교회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 전체가 곧 교회입니다. 앞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하는 자들이 교회를 이룬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에 비추어보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교회를 이루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생각할 때에 언제나 십자가부터 떠올려야 하는데 십자가는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집니다.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로마시대 때에나 그 외의 시대 때에도 십자가에서 죽은 자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십자가는 반드시 부활과 승천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교회는 이 역사적인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연쇄적 사건 위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교회를 생각할 때에는 예배당 건물이나 예배당에 출석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십자가로부터 이어지는 부활과 승천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만드신 십자가 너머의 부활과 승천의 공간에 마음이 머무는 모임입니다. 몸은 예배당 안에 있을지라도 마음이 십자가 너머의 부활과 승천의 공간 안에 있지 있으면 교회 밖에 있는 자입니다.

성경에서 모이기에 힘쓰라고 하신 것은 마음의 모임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 마음의 모임이 전제되어야 참 교회 안에서의 모임이 이루어집니다. 육체가 있는 장소는 상관이 없습니다. 심지어 겨울날 모일 곳이 공원의 화장실이라도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이 십자가 너머에 모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천억 짜리 예배당 안에 있을지라도 마음이 십자가 너머의 공간에 머물지 못한다면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십자가 너머로 보내는 이유는 이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만 살기 위해서이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은 하나님 크기로 만들어진 마음의 공백을 세상의 것으로 채워서 만족과 기쁨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만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크기로 만들어진 마음의 공백을 하나님만으로 채워서 만족과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게 채운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영생을 얻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만족과 기쁨을 얻더라도 일시적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돈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돈으로 만족을 얻고 기뻐할지라도 결국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와 같이 되고 맙니다. 거지 나사로는 천국을 갔지만 부자는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기억하면서 다시 한 번 24절을 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특별한 사명을 주신 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바로 교인의 삶입니다.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서 일어나야 될 일상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는데 오늘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대체 어떤 뜻으로 하신 것일까요?

우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여러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편안하고 가장 즐거운 일이고 궁극적으로 결과적으로 온전한 행복을 보장하는 일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야 말로 가장 편안하고 가장 즐거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직장을 얻어서 직장생활에 앞서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주식 투자나 부동산 투자로 부자 되기 전에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 일은 편안하면서도 나의 미래와 나의 인생의 결과를 가장 완벽하게 보장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스펙을 쌓기 전에 먼저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고, 노후보장을 준비하기 이전에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보다 확실한 미래 설계는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은 편안하고 즐겁고 행복하고 가장 확실한 미래를 가져다줍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평생을 신앙생활하면서 내내 들어온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라는 개념 자체가 아직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고통에 초점을 맞춰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나도 그러한 고난을 감내할 때에 신앙인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서 이해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나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자기희생적인 수고와 환란 등을 일컫거나,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임하였던 박해와 핍박을 인내하는 것으로 자기 십자가로 이해합니다. 혹은 2차 대전 때에 히틀러에게 반대하던 고백교회의 역경 등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정부 데모가 한창이던 군사정권 때에 민주주의와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사회적 참여를 강조하던 교회들과 신앙인들은 그것을 자기 십자가로 여기고 주장하였습니다. 아니면 일상적인 삶에서 감당해야만 하는 부담이나 과제를 일컫기도 합니다. 남편을 평생 원수처럼 여겼던 분이 신앙을 가지고 이제 남편을 십자가로 여깁니다. 말썽쟁이 자녀를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할 자기 십자가로 여기기도 합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나 시동생들을 자기 십자가로 여기고, 직장인들은 못 된 직장상사들을 십자가로 여깁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자기 십자가는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따져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리스도로서 나를 대신하여 지신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인데 다시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다시 져야한다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공로는 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는 굉장히 축소되고 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지 내 죄 사함을 위한 것이고, 죄 사함 받은 자로서 나도 이제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과 고난을 십자가로 지고 감내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 단 하나뿐인 예수님의 교회에 있어서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지신 유일한 십자가를 각자가 자신의 십자가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각자가 자기 십자가로 만들기 위해서는 일정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만들어서 지고 따를 수 있으며,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일이기에 편안하고 즐겁고 행복하다는 것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고와 고난을 연상하며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도 그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은 교인들의 일상이 되어야만 합니다. 시장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이 일을 하는 자들이 곧 교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형벌과 저주의 자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다는 십자가 형벌과 저주를 받은 사람에게는 그에 마땅한 극악한 죄와 잘못과 오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극악한 십자가 형벌에 합당한 죄악은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은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십자가 형벌을 받기에 합당한 죄가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고통과 모욕과 수치를 당해야 될 이유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형벌은 이루어졌는데 죄의 자리는 텅 비어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텅 빈자리에 나의 잘못과 오류와 죄악을 끼워 넣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께 끼워 넣음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죽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나는 손 하나 까딱한 적이 없습니다. 채찍 한 번 맞은 적이 없고 살점 하나 떨어지지 않았고 못에 박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악이 없으신 예수님의 빈자리에 나의 죄악 된 인격을 끼워 넣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져야 할 자기 십자가입니다.

시어머니가 나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를 전하다가 당하는 핍박조차도 나의 십자가는 아닙니다. 앞서 말씀대로 우리가 따라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루어내신 결과입니다. 우리가 전도자로서 핍박을 받을 지라도 그것은 성령님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는 것이고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허락하신 상황일 뿐입니다. 그것이 나의 십자가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죄악이 없는 텅 빈 자리에 우리의 죄악을 끼워 넣도록 우리 각자를 초정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갈 때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십자가가 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그렇게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서 부활과 승천의 길을 따르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는 부활과 승천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악이 없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에 들어가서 예수님과의 연합을 이루기만 한다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곧 나의 부활과 승천이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가지시는 교제에 나도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서 그 다음 단계로 이어질 한 가지 특별한 논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죄가 없으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로 삼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정확히 말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자기 죄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의 죄를 모르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죄 없는 예수님께 내 죄를 끼워 넣어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악으로 장악 된 나를 예수님께 지불함으로서만 십자가를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나의 죄인 됨을 발견할 수 없다면 십자가를 내 것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410절을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사는 동안에 한 순간도 예외 없이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져야 함을 뜻합니다. 사도 바울은 왜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녔던 것일까요?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죄인 됨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인 된 나를 발견하는 사람만이 십자가에 죄를 지불하여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바울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짊어지고 다녔다는 것은 항상 자신의 죄인 됨을 잊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고린도전서 1531절에서도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했습니다. ‘나의 자랑이란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죽는 이유는 날마다 죄인임을 발견하여 주님의 텅 빈 죄의 자리에 자신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절에서도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했습니다. 항상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다녔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역사적 사건은 일어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마음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밝히 보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마음으로 돈을 보고 무병장수를 봅니다. 자녀의 형통을 보고 승진과 취직과 결혼을 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사도 바울을 따르는 교인들은 마음속으로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죄가 무엇이기에 날마다 십자가에 달려야 하고,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녀야 하고, 시장에서든 직장에서든 마음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죄가 없으면 십자가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가 없는 자는 없기에 죄를 발견하는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죄를 발견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만드는 것을 일상화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15절에서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라고 한 후에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한탄하였습니다. 몸을 입고 있는 동안 우리의 마음은 몸을 통해 만나는 세상 것들을 담고 생각하고 그것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려고 합니다. 골로새서 31~2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라고 했고 빌립보서 318~19절에서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라고 했습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죄악입니다.

하나님 크기로 만들어진 마음에는 하나님만이 들어오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이 세상 것을 담아서 만족하고 기뻐하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죄악입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곳에 세상 것이 담기는 순간 더러움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청결은 곧 있어야 될 것이 있어야 될 곳에 있는 것입니다. 옆에서 밥을 먹는 자녀조차도 내 마음에 들여놓아야 할 대상은 아닙니다. 마음은 하나님만이 계셔야 할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있지 말아야 될 것이 있을 때에 더러움이 생깁니다. 그렇게 될 때에 자녀에 대한 염려와 생각들이 부패함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자녀를 통해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한 것이 영적인 간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럽고 추악한 죄악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마음으로 더럽고 부패하고 추악한 죄악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동은 단지 마음에서 일어난 죄악의 열매와 결과일 뿐입니다. 마음을 고치지 않는 한 행동은 바뀌지 않습니다. 윤리를 주장하여도 윤리는 개선되지 않습니다. 마음에 누구를 들여놓고 무엇을 들여놓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누구로 기뻐하고 무엇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려 하느냐가 바뀌지 않는 한 행동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가진 죄악이고 더러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땅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너무나 어려운 일처럼 여겨지지만 실상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돈만을 생각하는 이유는 돈으로만 만족과 기쁨이 주어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어머니에게는 자나 깨나 자녀가 최우선입니다. 남편과 말할 때에도 서로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오직 자녀에 대한 이야기만 합니다. 사업에 매진하는 사람은 자나 깨나 사업만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인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유독 하나님만을 어렵게 여깁니다. 이미 세상 것들의 생각은 잘만하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에는 인간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업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업만을 생각합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녀만 생각하고,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만 생각하게 됩니다. 다만 우리 안에는 원죄라는 세상 친화적인 체질이 있어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큼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 십자가로 만들 때에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한 것처럼 마음은 선을 행하고 싶지만 몸은 악으로 끌려감과 같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기억함이 없으면 가만히 있어도 세상을 마음에 담는 죄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생활화 되어야 합니다. 마음에서 잊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마음을 하나님께 보낼 수 있는 길이 십자가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 십자가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모셔 들여야 될 마음 안에 끊임없이 세상을 끌어들이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마음에 들어온 죄를 인식해야 합니다. 죄를 인식할 때에 죄 없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에 나의 죄를 끼워 넣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이를 통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올려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에는 하늘로 가득 찬 만족과 기쁨이 생기고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땅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그러했듯이 성령님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우리의 공생애가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이를 통해 25~26절의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산다는 것은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에 대해 마음 채움을 중단하는 것은 곧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 할 때에 육체의 의미는 중단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만들 때에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세상은 살아볼만한 것입니다. 가장 편안하고 가장 기쁘고 가장 완벽한 행복을 보장하는 삶이 주님의 십자가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내 죄를 보게 하시고 죄로 장악 된 내가 십자가 안에 비어있는 자리를 메움으로서 주님의 십자가를 내 십자가로 만들어서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