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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십자가와 교회(6)-베드로의 망각_태승철

by 태승철 · 17-10-18 10:36 · 7,003
변화산 사건은 베드로의 고백과 베드로의 만류에 이어,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하나의 전체입니다.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베드로의 황홀감 혹은 베드로의 망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영화로우신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황홀하여 그 현장에서 떠나지 말고 살자며 제안하는 동안 베드로는 산 아래 일을 까맣게 잊은 것이지요. 세상 속에 살면서 하늘에 마음을 두는 교회는 변화산에서 일어났던 베드로의 황홀감과 동시에 베드로의 망각을 믿습니다.

십자가와 교회(6)-베드로의 망각

(마태복음 17:1~8)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와 교회(6)-베드로의 망각>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와 교회(6)-베드로의 망각

앞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교회의 존립 근거로 살펴보았습니다. 이 고백은 베드로의 영적 상태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으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고백이 인격적으로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이어지는 부활 승천사건이 반드시 일어나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 고백이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는 말씀에서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부활과 승천의 길을 따라서 마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 자리에 머물러야만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시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베드로의 고백을 보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만류하는 베드로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오늘은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황홀감을 경험하며 반대급부로 산 아래의 모든 일을 까맣게 잊는 망각 사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세 사건이 함께 묶여서 복음 전체를 이룹니다. 그리고 교회의 본질적 속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변화산 사건을 통해서 보이는 교회의 본질적 속성은 교회는 베드로의 황홀감을 믿으며 동시에 베드로의 망각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곧 베드로의 황홀감과 망각을 믿고 있는 상태가 우리가 교회 안에 들어온 증표가 됨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린 대로 교회라는 단어에서 떠올려야 할 것은 출석하고 있는 예배당이나 예배당에 소속된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사건이 떠올라야만 합니다. 교회는 그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을 놓치면 교회는 본질을 잃고 이탈되어서 이상한 인간들의 집단에 불과하게 됩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이 끝나는 경계에 서있습니다. 십자가 문으로 들어설 때에 세상을 떠나는 것이고, 세상을 떠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의 뒤를 따라 하늘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십자가 너머의 부활 승천의 길을 따라서 하늘에 모인 자들이 곧 교회입니다.

육체의 모임은 이러한 마음의 모임이 전제 된 상태에서만 의미를 갖습니다. 그럴 때에 모임에 힘씀도 필요해집니다. 육체의 모임은 마음을 하늘에 두고 서로가 서로에게 받은 은혜를 강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만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경부선 완행열차와도 같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열차가 지나는 수많은 역들이 있듯이 목회자는 그 많은 역의 하나의 역장에 불과하고, 교인은 십자가와 부활 승천으로 이어지는 경부선 열차의 승객입니다. 역장인 목회자에게 와서 역에서 머물러 있어야 될 내 손님이 아니라, 통과해서 들여보내야 할 개찰구를 지나는 승객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가기 위해 십자가 개찰구를 통해서 부활 승천의 길을 가야 될 승객일 뿐입니다. 목회자는 이러한 교인들의 마음을 십자가 너머로 들여보낼 뿐 이들의 몸과 마음을 머물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사건에 얽힌 이야기와 교회설립에 대한 주님의 약속, 십자가와 부활이 예고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는 말씀이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걸어가야 될 길입니다. 이러한 것이 잘 이루어 졌을 때에 나타나는 증거가 바로 베드로의 변화산에서의 황홀감과 베드로의 망각입니다.

이 사건을 한 마디로 요악해보면 아직도 베드로의 신앙 상태는 세상에 대해 죽지 못한 채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거리를 찾는 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의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능력을 발견하면서 이를 수단 삼아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오히려 이러한 확신에 불타오르며 세상과 더욱 열애 중인 상태입니다. 아직 오순절의 성령 충만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었기에 베드로는 세상으로 충만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의 베드로가 산 위에서 변모하신 하늘나라에서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자 그 현장을 떠나지 않고 머물기를 바랍니다. 단순히 머물고 싶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황홀감에 사로잡혀서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황홀경에 빠지는 순간에 반대급부로서 이제까지 산 아래에서 활활 타오르던 이 세상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망각해버렸습니다. 마음에서 기쁨과 만족거리로 붙잡고 있던 세상의 모든 가치들을 완전히 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라의 독립도 장관자리를 차지해보겠다는 욕심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심지어 가족이나 산 아래에 남아있던 동료들의 존재에 대해서조차 잊었습니다. 세상과의 뜨거운 열애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시에 사라져버렸던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극히 일부분을 눈으로 대면했을 뿐인데 방금 전까지는 그렇게 불타오르던 세상에 대한 가치의 욕구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일부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셔서 이러한 체험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신의 십자가로 만들어내는 과정에는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한 죽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은 곧 주님의 십자가에 나의 마음을 들여보내는 것입니다. 돈 좀 많이 벌었으면 하고 생각하다가도 하나님만이 들어와 계셔야 될 마음에 돈이 들어와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돈이 들어온 마음은 진정한 나의 모습이 아니므로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인된 나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거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극한 형벌에 죽으신 주님에게는 합당한 죄악이 없었습니다. 그 빈자리로 죄악 된 내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돈으로 만족하고자 했던 마음이 더러운 죄악이며 하나님 면전에서 간음을 행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죄 없으신 주님의 빈자리에 내가 들어가서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의 죽음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자니 세상에 대해서 등져야 하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여전히 내 옆에서 침을 흘리며 가지고 싶어 하고 가진 자는 승자로 떵떵거리고 가지지 못한 자는 실패자로 여기는 세상의 가치들을 완전히 등지고 버려야 합니다. 그럴 때에 이러한 세상에 대한 죽음에 대해 아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아쉬워하지 않음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좇았지만 베드로의 마음의 링 위에는 여전히 세상의 가치들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나라가 독립하기를 바랐고 장관자리를 차지해서 돈 명예를 얻어 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베드로를 변화산으로 데려가셔서 하나님 나라의 한 자락을 살짝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의 일부분이 들어오자마자 그렇게 강렬하고 간절하게 붙잡았던 세상의 모든 가치들은 한 방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서 세상의 가치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망각 속에 묻혀버리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믿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는 하늘나라가 주는 황홀감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는 것조차도 하늘나라가 눈앞에 펼쳐질 때에는 완전히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들임을 믿는 것입니다. 변화산 사건을 통해서 교회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전전긍긍 노심초사 안달복달하면서 추구하는 세상의 모든 가치는 전부 망각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게 교회입니다.

이 세상을 등지고 십자가 문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갈 때에 베드로의 황홀감을 나의 황홀감으로 믿어야 합니다. 또한 세상을 잊었던 베드로의 망각을 나의 망각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보일 때에 세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에, 내 마음은 지금 하나님 나라로 보내야 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교회에게 믿음을 촉구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믿음을 촉구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단 하나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지만 믿음 자체가 쉽진 않습니다. 차라리 변화산의 제자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하늘나라를 우리에게도 보여주시면 쉽지 않겠습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산에 있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영성은 사실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세상에 속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021절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청탁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 간에 시기심이 생겨서 다툼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이런 수준의 영성을 가진 제자들조차도 하늘나라를 살짝 보았을 때에 이 세상 것을 전부 잊어버렸습니다.

하늘나라를 보았을 때에 이 세상에서 재벌 되겠다는 소원을 가질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재벌은 고사하고 지금 하는 사업이나 잘해서 먹고사는데 지장 없고 가끔 여행이나 가기를 바라는데, 하늘나라를 본다면 그러한 넉넉함을 바랄 사람조차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보면서도 세상에서 대통령이 되거나 장관되기를 바라며, 명예를 추구하거나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보고 있는 가운데 하버드나 서울대 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결혼을 꿈꾸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계시다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세상에 대해 취하셨던 태도도 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가지고 싶고 이루고 싶어 하는 것이 많은 이 세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아무 미련 없이 훌쩍 떠나 하늘로 가버리셨습니다. 세상을 지으신 왕답게 한 10년이나마 마음대로 세상을 누릴 만도 하건만 주님은 그냥 하늘로 가버리셨습니다. 33년 동안 고생만 하시다가 부활하시고 나서도 세상의 어떤 것도 누리려고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18절의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이라고 했고, 58절에서는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믿음을 가지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변화산에서와 같은 체험을 허락해주시면 자연스럽게 세상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할 수 있을 텐데, 하나님께서는 왜 그 좋은 나라를 가리고 계시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가 가려져 있는 상태에서의 믿음을 원하시기 때문에 변화산 사건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눈으로 보면서 여기가 좋다고 말한 베드로와 제자들의 표현은 믿음이 아닌 반응일 뿐이었습니다. 산 아래의 좋았던 모든 것들을 잊은 것 또한 믿음이 아닌 하늘나라를 보았을 때에 생기는 당연한 반응일 뿐입니다. 믿음과 반응은 다릅니다. 믿음은 인격적인 반면에 반응은 동물적입니다.

 

그렇다면 변화산 사건을 통해 일깨우시고자 했던 예수님의 참 의도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길을 통해 마음이 하늘에 모여진 교회는 믿음 안에서 베드로가 보였던 반응을 나타내길 바라셨습니다. 베드로는 눈으로 보고 나타냈던 반응을 우리는 믿음으로 하늘나라를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감격과 황홀함을 믿음 안에서 가져야 합니다. 나는 돈을 간절히 원하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를 보았을 때에 세상을 잊었던 베드로와 같이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늘나라를 보여주신다면 이 세상 누구나 베드로의 황홀감과 베드로의 망각 속으로 빠져 들것입니다. 그러나 가리심으로서 교회가 믿음 안에서 하늘나라를 보며 기뻐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믿음 안에서 이 세상을 망각의 주머니 속에 넣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우리가 열렬히 사랑하고 소원하는 세상의 가치들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 기쁨과 만족이 되리라 믿어서 붙잡으려 하는 모든 것들을 하늘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베드로의 영적 상태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망각 속에 빠져 들었는데, 하늘나라를 갖게 될 때에 망각해버릴 세상 것들을 위해서 시간을 허비해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은 까마득하게 잊혀 질 것들을 위해서 생의 시간을 소모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늘을 가지는 것은 믿음 안에서 갖는 것입니다. 하늘이 보이지 않아도 베드로가 하늘을 보고 가졌던 황홀감을 그대로 갖는 것입니다. 이 황홀감 안에서 세상의 모든 가치들을 잊어버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하늘에서 우리를 향하여 이 믿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망각했던 것은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겼던 것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억울했던 일, 분하고 원통했던 일, 너무나 아쉬웠던 것들과 후회스러운 일들이 믿음 안에서 하늘을 볼 때에 한 순간에 사라지고 잊혀 질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자식을 앞세운 부모라면 얼마나 그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그러나 그 부모의 마음에 하늘나라가 세상과 비할 수 없이 좋은 것이라는 확신이 있고, 자녀가 하늘나라에 갔다고 믿는다면 자녀가 먼저 하늘에 간 것이 불행이나 아쉬워 할 일이 아니며 복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님을 깨달을 것입니다.

원수에게 해를 당해 죽은 사람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이제 그 원한이 구천을 떠돌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는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황홀해하던 그 하나님 나라에 빨리 들어가게 되었으니 원수조차도 은인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베드로의 변화산 사건에서 하늘나라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느꼈던 황홀감을 우리의 믿음 안에서 갖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가 세상을 망각했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등지고 떠나 망각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망각 속으로 집어넣은 이 세상의 모든 일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정하신 뜻대로 우리의 삶에서 이끌어 가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속한 사람으로서 하늘나라가 보이지 않아도 베드로의 변화산에서의 황홀감을 느끼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가 세상의 가치들을 망각했듯이 하늘나라가 보이지 않아도 세상을 망각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 마음 놓고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내가 놓아도 괜찮을까 두려워하고 염려하며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 놓고 다 망각 속으로 집어넣어도 됩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 나라로 가되, 이 하늘나라가 변화산의 베드로가 세상 모든 것을 한순간에 망각할 정도로 좋은 곳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늘나라를 믿으며 세상을 잊을 때에,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관장하실 것입니다. 성실하시고 진실하신 당신의 뜻을 따라 이 세상에서 우리를 선한 길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특권이고 교회의 자랑이며 교회의 멋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제 다시금 십자가 생활화에 우리의 전부를 걸기로 다짐합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의 망각 속으로 빨려 들어간 세상의 모든 가치들에 대해 등지게 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르며 베드로가 느낀 하늘에 대한 황홀감을 믿음 안에서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