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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평생 나를 먹여 살리는 이름_태승철

by 태승철 · 17-12-12 10:57 · 6,558
시인 박준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시의 제목처럼 나를 평생 먹여 살리는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아니 평생을 넘어 영원토록 나를 먹여 살리는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입니다. 이 이름을 잘 부르기만 하면 우선 마음이 배부르게 되고 몸도 먹고 삽니다. 특히 마음의 배부름은 몸이 죽어도 계속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 하나에 우리의 전생을 걸기 위하여, 그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법과 그럴 때의 파급효과를 알아봅니다.

평생 나를 먹여 살리는 이름

(시편 76:1~12)

 

 

1. 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알려지셨도다

2.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3. 거기에서 그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하셨도다 셀라

4. 주는 약탈한 산에서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

5. 마음이 강한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 잠에 빠질 것이며 장사들도 모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손을 만날 수 없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평생 나를 먹여 살리는 이름>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평생 나를 먹여 살리는 이름

박준이라는 젊은 시인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라는 제목의 시집이 있습니다. 이 시집에 같은 제목의 시가 나옵니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인은 자서전을 대필하면서 생계에 보태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직 첫 번째 시집도 내지 못한 시인의 생활은 무척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평생 시인으로 살려고 하는 철학이 담겨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생계를 위해 자서전을 대필해야만 하는 상황을 묘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꺼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시작(詩作)에 대한 근본적 철학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의 한 부분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이 시는 산문형식입니다. 시인의 철학을 표현해 주고 있는 이 부분이 오늘 본문의 주제와 연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굳이 한 말씀드리자면 시에서 나오는 찬비는 자서전의 주인공의 인생에서 경험하게 된 어려움을 뜻합니다.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한다.’라는 것은 성장을 말하는 것이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혔다라는 것은 곧 어려움으로 인해 남게 된 마음의 상처를 뜻합니다. 그런데 속옷에 물이 든 것입니다. 상처를 털어버리고 찬비가 내리는 어려움을 겪었을 때에 물이끼가 자라듯이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다고 자기가 자서전에 기록을 해주었다는 얘깁니다. 결국 밖으로는 보이지 않는 속옷이기에 시인은 자서전의 주인공의 삶의 겉 부분을 미화시켰다는 것입니다. 다음 연에서 그 내용이 보충됩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라는 부분은 삶에는 반드시 아름다운 사건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미화시켜서 아름답게 한 것은 자서전의 주인공을 위해서 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인에게 있어서 시를 포함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철학이고 소신의 반영이라는 것입니다. 생계를 위해서 자서전을 대필하면서도 그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미화하는 이유는 먹고 살겠다는 비굴함이 아니라 글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두고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름을 지어다가라는 것은 작명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애를 지어냈다는 것이고 미화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먹고 살기 위해 글쓰기를 택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는 사명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지어다가 평생을 먹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로 평생 먹고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평생 나를 먹여 살리실 뿐만 아니라 영생토록 내 마음을 먹고 살게 하십니다. 단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야만 합니다. 종교개혁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부르기를 제대로 하면 종교개혁은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를 때에 나타나는 상상할 수 없는 파급효과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우리 몸이 평생 먹고 우리 마음이 영원토록 먹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본시의 역사적 배경은 열왕기하 19장에 기록된 남 왕국 유다의 왕 히스기야 제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사건입니다. 앞선 75편도 같은 사건을 배경으로 삼았습니다. 다만 75편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이 있기 직전의 위기상황에서 부른 노래이고, 오늘 76편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이 일어난 후를 다루고 있습니다. 산헤립의 군대 십팔만 오천 명이 하룻밤 사이에 전멸당하고 산헤립은 본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두 아들에게 살해당한 사실을 목도하고 쓴 시입니다.

이 두 시를 연결하는 단어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75편에서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마음과 생각이 위기나 문제나 과제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 먼저 붙잡음으로서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해야 함을 노래했습니다. 76편은 하나님의 이름을 먼저 부르고 가까이 함으로서 나타나게 된 파급효과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를 정면에서 붙잡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동안에는 측면이나 후방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도움을 바랍니다. 이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도우심을 바라기 전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내 마음이 그 이름에 합당하게 바뀌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과 생각이 그 어떤 것도 붙잡아서는 안 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붙잡혀 있거나 붙잡은 상태에서는 하나님 이름을 제대로 부를 수 없습니다.

문제나 과제나 위기가 해결되어야 마음에 기쁨과 만족과 평강이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이미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풍랑 만난 배에서 주무셨습니다. 이렇게 어떤 위기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진짜 하나님의 존재는 내게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줄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붙잡고 이것이 해결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죄악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면 그렇게 문제를 붙잡은 상태가 죽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않으려면 애초에 문제를 붙잡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 부르기는 어떤 위기나 문제에서든지 내게 만족과 기쁨과 평강을 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시편 75편이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노래였다면, 오늘 76편은 그렇게 노래를 불렀더니 파급효과가 엄청났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치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강에 빠져 죽은 것처럼, 위기를 붙잡고 있는 내가 성전에서 상번제로 드려지는 어린양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첫 번째로 가깝게 했을 때에 나타나는 파급효과로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 십팔만 오천 명이 하룻밤 사이에 멸절했습니다. 남 왕국 유다의 사람들은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러한 일이 나타났음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알려지셨도다 /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2절에 언급되는 살렘이나 시온은 예루살렘을 의미하며 처소와 장막은 성전을 의미한다고 앞선 설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름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계십니다.

3절에서는 거기에서 그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전에 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번제단에서 산헤립의 침공이라는 위기상황에 대해 죽음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더니, 하나님께서는 직접 삶의 현장에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하나님의 존재가 계시며 성전에는 이름으로 계시고 삶의 현장에는 뜻과 역사하심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삶의 현장에서 뜻과 역사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경험할 수 있는 길은 성전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1절에 왜 유다와 이스라엘을 나누어 썼고 알려지셨다라는 의미가 불분명한 어휘를 사용한 것일까요? 아브라함 이후로 선민에게 하나님은 계속 알려져 왔습니다. 출애굽 때에는 본격적으로 당신이 어떤 분이고 누구이신지를 홍해 사건이나 광야에서의 기적을 통해서 알리셨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 때에 새삼스럽게 하나님이 알려졌다고 합니다. 또한 유다에는 단순히 하나님이 알려지셨다고 하고, 북 왕국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그의 이름이 알려지셨다고 구분을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렇게 구분함이 성령님의 역사를 느끼게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올바르게 부르는 법을 가르치시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결과에 대해 순차적으로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유다에 알려지셨다라는 것은 히스기야 왕 때의 선민들이 산헤립의 침공을 통해서 출애굽 때의 하나님을 동일하게 체험하였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때에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셨고,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사십년을 먹고 살게 하셨습니다. 즉 삶의 현장에서 행위하시고 뜻을 실현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그의 이름이 알려지셨다라고 하셨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1대 왕이었던 여로보암 왕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려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단(북 왕국의 북쪽)과 벧엘(북 왕국의 남쪽)에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것을 출애굽을 시키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부르게 하였습니다. 금송아지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긴 했지만 완전히 잘못 불렀던 것입니다. 결국 풍요와 다산을 추구한 북 왕국 이스라엘은 바알 신을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금송아지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 문제의 해결을 바라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북 왕국 이스라엘이 금송아지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고 불렀던 것과 똑같은 의도입니다. 건강 돈 결혼 승진 자녀의 형통 등의 문제들을 붙잡고 해결을 바라는 것이 곧 여로보암 식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랬던 자들에게 남 왕국 유다에 있는 성전을 통해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논개가 왜장을 붙들고 강으로 투신한 것 같이 세상 문제들을 붙잡았던 내가 성전의 번제단에서 어린양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 성전을 통해 부른 하나님의 이름이 북 왕국 이스라엘에까지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유다 군대와 백성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음에도 앗수르 군대의 십팔만 오천 명이 멸절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유다에게는 삶에 현장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드러나셨고,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불렀던 북 왕국 이스라엘에게는 성전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주장되고 알려졌음을 노래한 것입니다. 기가 막히는 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평생 먹고 삽니다. 삶의 현장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면 됩니다.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성전의 의미를 완성시킨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세상 문제에 붙잡혀 있고 세상 문제를 붙잡은 나를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내 마음은 아무것도 붙잡지 않은 상태가 되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수 있습니다. 이것만 하면 됩니다. 그럴 때에 내 마음은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먹고 배부릅니다. 내 몸이 남아있는 이 땅의 삶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오늘 시인이 독특한 표현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주는 약탈한 산에서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 / 마음이 강한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 잠에 빠질 것이며 장사들도 모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손을 만날 수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5절의 잠에 빠질 것이며라는 말이 바로 하룻밤 사이에 산헤립의 군대 십팔만 오천 명이 멸절당한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4절의 주는 약탈한 산에서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약탈은 곧 사냥함을 뜻합니다. 즉 사냥감이 가득한 산에서 주는 영화롭고 찬란히 빛나신다는 뜻입니다. 이 문장을 해석함에 있어서 학자들 간에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를 기록하고 있는 열왕기하 19장을 살펴보면 이 말씀의 내용이 쉽게 이해됩니다.

10절에서 산헤립은 히스기야에게 편지를 보내어 너희는 유다의 왕 히스기야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기를 네가 믿는 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앗수르 왕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겠다 하는 말에 속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앗수르가 이제까지 멸망시켜온 나라와 민족들의 이름을 언급합니다. 12~13절에 고산과 하란과 레셉과 들라살에 있는 에덴 족속과 하맛 왕과 아르밧 왕과 스발와임 성의 왕과 헤나와 아와의 왕들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이것을 잔학하기 그지없는 안하무인의 앗수르 군대가 사냥감을 사냥한 것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곧 강자가 약자를 쫓아가서 잡아먹는 사냥터입니다. 이러한 사냥터에서 하나님께서 영화롭고 찬란히 빛나신다고 합니다. 사냥터로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만 불러도 정말로 이 세상을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앗수르 같은 강자들이 언제나 호시탐탐 목을 노리는데 대처하고 방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기계발을 하고 피땀 어린 노력을 통해서 무엇인가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면서 사냥터 같은 이 세상에서 강자들의 발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냥터 같은 살벌한 인생의 판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을 내시는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기만 한다면 마음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존재로 말미암아 배부름을 얻을 것이고, 우리 몸이 놓인 이 땅의 삶은 하나님의 이름의 파급효과로서 하나님의 뜻과 역사가 영광스럽게 움직여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 놓고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기 위해 인생을 바칠 것을 주는 약탈한 산에서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라는 노래로 표현한 것입니다. 약탈로 살아가는 사냥터와 같은 삶의 현장에서 주님만이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십니다. 즉 주님만이 홀로 일등이시고 영광스러우시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마음이 강한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강한 자는 곧 완악한 자를 뜻합니다. 즉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죽여서 경쟁에서 이기려는 자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사냥감이 되어버립니다. 사방으로 원정을 다니며 다른 민족들을 사냥감으로 여겼던 앗수르 군대가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남 왕국 유다에 대해서는 사냥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 전념해야만 할 것입니다.

돈 문제가 생겨서 마음이 문제를 붙잡게 되었다면 이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의 괴로움은 돈 문제가 해결되어야 만족하고 기쁠 것이라고 여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돈 문제가 해결되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이 없다면 괴로워 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77절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촉구하셨습니다. 돈을 찾고 두드리던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마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돈 문제를 붙잡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동원하고 고용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에서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믿어지는 것을 찾고 두드리려고 합니다. 이 세상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그 문제로 인해서 기쁨과 만족이 좌우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을 하나님으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기쁘고 만족하는 것이고 하나님 없이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러나 생각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먼저 세상의 문제나 위기에 붙잡힌 나를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것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아무것도 붙잡지 않은 마음으로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가며 하나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평생 내 몸이 먹고 살고, 영원토록 마음이 먹고 사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되 십자가를 통해서 제대로 부름으로 그 이름 하나만으로 평생을 먹고 살고 영생을 먹고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