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0,1)복음방송

환전 안 된 희망은 자폭용 폭탄_태승철

작성일
17-12-15 09:20
작성자
태승철
조회
6,951
"내 비장의 무기는 아직 손안에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200만 명이 목숨을 잃게 되면서 ‘코르시카의 악마’, ‘목숨의 낭비자’ 등의 악명이 붙은 상황에서 나폴레옹 자신이 한 말입니다. 절망과 희망이 엎치락뒤치락 했던 그의 생애를 보면서, 희망은 절망을 극복하는 힘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희망은 끊임없이 지금의 만족과 기쁨을 파괴하면서 미래를 향해 나가게 하는 내 생애의 자폭용 폭탄은 아닐까요?

환전 안 된 희망은 자폭용 폭탄

(시편 79:1~13)

 

 

1. 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2. 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

3.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 같이 흘렸으나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4.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 거리가 되었나이다

5.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오늘 말씀 중심으로 <환전 안 된 희망은 자폭용 폭탄>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환전 안 된 희망은 자폭용 폭탄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종신 통령이 되어 유럽제국과 60회나 되는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 전쟁 전체를 나폴레옹 전쟁이라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전쟁에서 패배한 끝에 엘바 섬으로 유배를 갔다가 돌아온 후에는 영국과의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게 됩니다. 60회 이상이나 되는 전쟁을 통해서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러한 삶의 위기에서 나폴레옹은 내 비장의 무기는 아직 손안에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라는 말을 했고, 또한 정적이 너무나 많은 상황에서 남의 힘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의지할 것은 단지 나의 힘뿐이다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나폴레옹을 향해 코르시카의 악마, 목숨의 낭비자라는 악명을 붙였습니다.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을 때에 사람들은 다 끝난 줄로 알았지만 비장의 무기가 희망이라는 말처럼 나폴레옹은 다시 파리로 돌아와서 황제에 즉위했습니다. 그 뒤 6월에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에 항복하고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더 이상 희망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은 끝이 나고 맙니다. 나폴레옹의 인생 자체가 희망과 절망이라는 두 천사의 싸움터 같았습니다. 최종적으로는 희망의 천사의 날개가 꺾이고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사람들은 절망적인 처지에서라도 살아남는 길은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희망이 절망을 극복하고 넘어가게 해준다는 말인데 이 말에는 착각이 숨어있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희망 때문에 절망감이 주어지는 것은 아닐까요? 절망 속에서 빠져나오는 힘이 희망이라고 하지만 애초에 절망이 생긴 이유는 희망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복음의 역사를 살펴봅니다. 복음은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희망을 말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대로 절망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복음은 세상의 법칙대로 희망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세상의 법칙대로 절망을 말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절망이라고 명명될 수 있는 상황을 우리 삶에 허락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에는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러한 상황을 결코 절망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죽도록 매를 맺고 차꼬에 채워져 칠흑 같은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도하고 찬송하자 감옥에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서 천사의 얼굴이 되었고 돌로 치는 자들을 용서하는 초인적 힘을 보입니다. 베드로는 참수형이 결정된 전날 밤에 깊은 단잠에 빠져듭니다.

바울과 실라는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감옥에서 풀려날 것을 희망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을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풀려났지만 풀려날 것을 희망한 적이 없다는 점이 주목할 부분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사람들이 말하는 희망이란 주체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결코 스스로 나아질 상황을 희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도 돌에 맞아 죽는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을 희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한 일은 살아남기 위해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참수형의 아침이 오기까지 석방이라는 바늘 끝 같은 희망을 붙잡지 않았습니다. 다만 죽을 것을 받아들이고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예에 비추어본다면 우리는 복음을 너무나 도외시하며 희망과 절망을 말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이 세상 안에서의 희망은 만족과 기쁨을 언제나 미래에 둡니다. 현재에는 만족과 기쁨이 유보되어 있고 억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바로 지금을 만족과 기쁨을 위한 시간으로 규정합니다. 지금을 놓치면 참된 만족과 기쁨은 영원히 주어지지 않음을 말합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지금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것은 적용됩니다. 내일 아침이면 참수형을 당하도록 정해졌든지, 돌에 맞아죽는 상황이든지, 죽도록 맞고 차꼬에 채워져 칠흑 같은 지하 감옥에 갇혔든지 기쁨과 만족은 지금의 사건이 되어야만 한다고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는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 안에서 미래를 희망하지 않습니다. 미래는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주어질 뿐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결코 미래를 맞이하는 태도로서 정의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앞서보았던 시편 74편과 마찬가지로 바벨론 침공으로 인한 유다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배경으로 지어진 시입니다.

시인은 선민의 나라가 처한 비참한 상황을 탄식하고 하나님께 원수들에 대한 복수를 간청합니다. 그런데 74편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74편에서는 주로 성전 파괴에 대한 슬픔을 집중적으로 묘사하였다면, 본문은 예루살렘 멸망으로 인한 백성들의 처참한 처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민들에게 처참한 처지를 안겨준 바벨론에 대해 하나님의 복수를 6절부터 노골적으로 간청합니다.

그런데 이 시를 읽을 때에 느끼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과 민족이 당하고 있는 참담한 처지에 대한 영적 상황판단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유다 백성에게 주어진 처참한 패망은 다윗의 도망자 신세 때와는 사정이 판이합니다. 한 마디로 원수에 대한 복수를 간청할 만한 처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무 잘못도 없이 사울 왕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이때에는 분명히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연단의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훈련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패망은 선민들의 끊임없고 완고하기 그지없는 패역함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인의 애가 속에서는 이런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전무합니다.

원수의 나라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를 간청하고 있지만 실제로 남 유다를 패망하게 한 원인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선민들이었습니다. 선민들의 패역함이 바벨론으로 하여금 유다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파괴를 정당화시키는 원인임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공격은 선민들이 만든 폭탄이 터진 자폭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은 결코 하나님의 허락 없이 외부의 힘에 의해 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하신 선민들이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는 것을 왜 허락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선민들의 패역함 때문이었습니다. 바벨론의 공격은 선민들이 제조한 자폭용 폭탄이었을 뿐입니다.

이렇듯 선민들이 패역한 이유는 바로 소망의 문제에 있었습니다.

어제 살펴본 시편 787~8절을 보면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소망을 하나님께 두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어떤 기적을 보더라도 금방 잊어버릴 수밖에 없고 그의 계명을 지킬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완고하고 패역하여서 정직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 충성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곧 이 세상 안에서 가지는 소망은 우리의 삶에 대한 폭탄이라는 것입니다. 원자폭탄 수소폭탄은 말로만 들어봤지만 소망폭탄 희망폭탄은 우리가 어제도 오늘도 체험했고 내일도 체험할 폭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갖가지 기적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민들은 하나님을 소망하지 않고 세상을 소망하였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세상의 소망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한다면 이 소망은 삶을 초토화 시키는 자폭용 폭탄이 됩니다.

 

세상 소망은 파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 소망은 십년 뒤에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질 것이고, 무엇인가를 가져야 되겠다는 소망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 소망은 지금의 삶에 대한 판단기준으로 작용하며 파괴성을 드러냅니다. 소망을 갖는 순간 현재는 항상 부족하고 원치 않으며 불행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용기 있게 기운차게 맹렬하게 미래에 대한 소망을 향해 나가는 사람은 밖에서 보기에도 씩씩하고 희망차보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하는 일은 자신의 현재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고, 지금 현재 누릴 수 있는 행복을 폭발시키고 깨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현재 나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원천적인 사랑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부부관계가 깨어져 나가듯이 나의 인생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터져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소망이 갖는 파괴력입니다.

출애굽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보면 이것이 명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물이 벽돌처럼 쌓여진 가운데 마른 땅으로 행진하였고, 쫓아오던 애굽 군대를 향해 물이 밀려와 수장시켜버렸습니다. 이러한 기적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작 삼일 뒤에 물이 없다고 하면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냐 안 계시냐라고 망발을 해댑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복지에 대한 희망을 마음에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복지를 품고 있었기 때문에 전대미문의 홍해의 기적을 경험하고서도 결코 현재에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홍해의 기적을 본 순간조차도 온전치 못한 상황이며 원망불평의 상황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반석을 쳐서 물을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래봤자 아직도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곧 다시 불평을 합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품고 있었다면 하나님은 광야에서도 우리를 이렇게 먹여 살리신다라고 만족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자신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으로 만족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직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를 마음에 희망으로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나를 먹이시고 바람으로 메추라기를 몰아오셔서 고기를 배불리 먹게 하셨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아닌 이상 백성들에게 만족은 없었습니다. 복지에 대한 희망으로 하나님께서 별의별 기적을 다 보여주셨지만 백성들은 끝없이 불평하였습니다. 마음에서 희망하던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가 아니고서야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시는 그렇게 복지에 들어갔는데 복지를 빼앗기고 멸망당한 사건을 경험한 아삽 자손이 쓴 시입니다.

결국 복지를 희망했던 체질이 복지에 들어가서도 변하지 않았음을 드러냅니다. 복지에 들어가서도 또 다시 세상적 희망을 위한 비전을 가졌습니다. 좀 더 잘 살고, 좀 더 풍부하기를 바라며 풍요와 다산의 신이라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진 채로 살다 결국은 복지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망하던 미래가 멸망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희망을 갖는 사람들의 특징은 현재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파괴합니다. 아무리 건전하게 희망을 붙잡고 힘차게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 힘찬 미래를 향한 발걸음 뒤에는 현재를 파괴하는 파괴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현재를 파괴하지 않고는 미래를 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기쁘고 만족한다면 마음은 미래를 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령 미래에 원했던 소원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그 소원은 끊임없이 파괴된 현재의 잔해더미 위에 쌓여져 있습니다. 그러한 미래는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복지를 향해 가는 광야의 여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소망의 환원이었고 희망의 환전이었습니다.

달러를 원으로 바꾸고 원을 달러로 바꾸듯이 복지를 향한 희망을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광야생활의 참 의미는 희망에 거는 기쁨과 만족의 크기만큼을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광야생활을 사십년이나 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였던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 세상에서 가진 희망어치만큼 소망어치만큼 지금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달리 기쁨의 대상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복지에 대한 열망은 더욱 강해집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얻을 복지만큼 지금 하나님을 소망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위해 성막을 짓게 하셨고 지성소에 그 이름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붙잡는 자들에게 하나님 당신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이 약속을 따라서 광야에서 복지를 소망하는 만큼 하나님을 소망했더라면 영원한 복지를 허락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으므로 본문에서 노래하는 것과 같이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 폭탄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현재를 파괴하고 끊임없이 파괴한 잔해를 모아 미래를 쌓아올리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오늘도 기뻐하고 만족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만 우리의 소망은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위에 있습니다. 위에 있는 소망은 지금 누려야만 합니다. 이 세상을 향한 소망과 희망이 생길 때마다 그 소원어치만큼 희망어치만큼을 지금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채워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서 십억을 벌고 싶은 소원이 생겼다면 자연히 십억을 벌면 얼마나 기쁠지에 대한 기대치가 생깁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미래에 얻어질 기쁨과 만족만큼을 지금 하나님을 통해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의 기쁨과 만족에 관련해서는 십억이 겉도는 존재가 되어야만 합니다. 마치 방수 처리한 천에 물방울이 겉돌 듯이 십억이 겉돌 때까지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워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소원과 세상을 항한 희망을 하나님을 향한 소원과 희망으로 환전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바로 지금! 세상을 향한 희망만큼 하나님을 벌어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구약에는 성전이 있었으며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곧 세상을 향한 나의 소원이 죽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했던 소원어치만큼을 하나님을 향한 소망으로 바꾸어 다시 태어나도록 성전의 번제단이 있었습니다. 또한 성전의 완성이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와 성전은 곧 희망환전소입니다. 세상에 대한 희망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희망과 소망으로 환전하는 환전소가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대한 모든 희망을 죽이고 지금 하나님을 소망한다면 이 세상의 삶이 발전할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현재에 대해 느끼는 부족함과 불만이 미래를 향해 나가는 발전의 토대가 되는 것이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곧 발전을 가져오고 창조적 삶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와 발전은 결코 불만과 부족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셔서 그 부족을 채우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만족하실 뿐만 아니라 넘치고 넘치는 사랑을 주실 대상을 만드시기 위해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조는 부족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넘침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 대한 희망을 십자가에서 죽이고 그 세상에 대한 희망어치만큼을 하나님을 향한 소망으로 바꾸어서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며 살려고 할 때에 내 삶의 창조와 발전은 하나님의 능동적 뜻에 의해 이루어져 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며 시도하는 창조는 반드시 그림자를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두움을 동반합니다. 문명의 이기가 동시에 인간성을 파괴하고 피폐하게 만드는 역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을 향한 희망과 소원은 그만큼 하늘을 향한 희망과 소원으로 환전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삶을 파괴하는 자폭용 폭탄이 되어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이 나의 삶을 파괴할 것입니다. 설령 미래에 꿈꾸었던 비전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파괴된 현재의 잔해들 위에 세워져있다면 유다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같은 결과가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유전죄적 체질에 의하여 끊임없이 생기는 세상을 향한 소원과 소망만큼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소원과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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