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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반짝이는 것 팔아 하나님 사기_태승철

by 태승철 · 17-12-16 11:21 · 6,895
'반짝이는 것이 다 금은 아니다'는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반짝이기만 하면 갖겠다고 무턱대고 달려들 일은 아니지요. 그러나 일단 내 마음의 시선에 반짝이는 것이 들어왔다면 그 어느 하나도 그냥 버리지는 말 일입니다. 반짝이는 것이 다 금은 아니지만 반짝이는 모든 것이 내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사서 가질 수 있는 쿠폰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짝이는 것을 팔아 하나님 사기가 선민의 신앙이라면 반짝이는 것을 사려고 하나님 팔기가 선민의 타락이지요.

반짝이는 것 팔아 하나님 사기

(시편 80:1~19)

 

 

1.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2.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3.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오늘 말씀 중심으로 <반짝이는 것 팔아 하나님 사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반짝이는 것 팔아 하나님 사기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다(All that glitters is not gold).”라는 말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부분을 조금 살펴보면서 본문과의 연관성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니스의 상인에는 네 명의 주요인물이 등장합니다. 미모를 자랑하는 부유한 상속녀 포샤와 그녀에게 구혼을 하게 되는 바사니오 청년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사니오의 친구이자 해상 무역업에 종사하는 사업가인 안토니오가 있고, 고리대금업을 하는 유태인 샤일록이 등장합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포샤와 바사니오로부터 시작됩니다. 포샤에게 구혼을 하려는 바사니오는 재정적 문제에 봉착하게 되자 사업가인 안토니오에게 급하게 3,000두캇을 빌리려고 합니다. 두캇은 금화의 단위인데 3,000두캇은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안토니오가 그 시기에 돈이 없었습니다. 무역선이 귀환하는 두 달 뒤에야 돈이 생기지만,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에 안토니오는 유태인 고리대금업자인 샤일록에게 가서 돈을 빌립니다. 그런데 그 차용증서에는 기한 내에 갚지 못하면 살 1파운드를 베어낸다는 끔찍한 조건이 달려있었습니다.

결국 자금을 마련한 안토니오는 바사니오에게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바사니오는 포샤에게 구혼을 하게 되지만 돈이 생겼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포샤의 아버지가 죽으면서 유언과 함께 세 개의 함을 남겼는데, 딸에게 신랑감을 구할 때에는 그 세 개의 함 중에서 하나를 고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금과 은과 납으로 된 세 개의 함중에 하나에는 포샤의 초상화가 들어있었는데 이것을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금으로 된 함에는 택하는 자는 만인이 소망하는 것을 얻으리라라는 희망적인 문구가 있었고, 은으로 된 함에는 택하는 자는 그 신분에 합당한 것을 얻으리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자기 신분을 알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 자에게 은택이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납으로 된 함에는 모든 것을 내놓고 모험을 해야 하느니라라는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문구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포샤의 미모에 반해 구혼을 했던 대부분의 후보들은 금이나 은으로 된 함을 열었습니다. 모든 것을 내놓고 모험하기 보다는 만인이 소망하는 것을 얻거나 자기의 신분에 합당한 것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일찍이 모로코의 영주가 포샤에게 구혼을 하러 와서 세 개의 함중에 금으로 된 함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함 속에는 해골과 함께 쪽지가 들어있었습니다. 그 쪽지에 쓰여 있던 말이 앞서 보았던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다(All that glitters is not gold).’라는 것이었습니다.

원문에는 반짝이는 것이 다 금은 아니다. 그대는 이 말을 자주 들었으리라. 수많은 사람들이 내 겉모양에 홀려 그 숱한 생명을 팔았느니라. 황금으로 도금된 무덤 속엔 구더기가 우글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니스의 상인 27장에 나옵니다.

 

반짝이는 것은 곧 빛이 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 빛과 광채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셰익스피어가 말하는 반짝이는 것과 본 시에서 반복되어 나오는 광채라는 말에는 같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마음에 빛이 있다라는 것은 곧 즐거움과 만족과 기쁨이 있음을 뜻합니다.

열애중인 애인을 흔히들 오 나의 태양이라고 부릅니다. 마음의 빛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는 35억 명의 이성이 있지만 오직 한 사람만이 내 마음에 광채를 발합니다. 변화산의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광채 나는 모습을 보고는 황홀경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셰익스피어가 말한 반짝이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뜻합니다. 물론 그것을 가진다고 해서 그것이 금이라는 보장이 없을 뿐입니다.

분명히 마음에서는 그것을 가지면 기쁨과 만족이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것들이 광채 나는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대상이 나에게 빛을 비춘다는 것은 곧 그것이 나의 기쁨과 만족이 된다는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돈에서 광채가 난다고 느껴지면 돈이 내게 기쁨과 만족이 된다고 믿어지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상태가 바로 빛을 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돈을 반짝이는 것으로 느꼈지만 아무리 가져도 마음에 채워짐은 없습니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나온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다라는 말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금으로 된 상자는 반짝거리며 시선을 끕니다. 그러나 그것에 매료되어 열어봤더니 거기에는 해골이 들어있었을 뿐입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내 마음에 반짝이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면 기쁘고 만족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열심히 추구해서 가졌습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었더니 해골과 함께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다라는 쪽지가 들어있을 뿐입니다. 셰익스피어의 글이 그대로 오늘 시와 연결이 됩니다.

 

본 시를 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배경을 살펴보도록 합니다.

본 시는 79편과 마찬가지로 민족이 처한 비극적 참상을 경험하며 하나님께 민족의 구원을 호소하는 애가입니다. 다만 79편과는 역사적 배경을 달리합니다. 79편은 BC.586년에 바벨론에 멸망한 남 왕국 유다를 배경으로 삼은 것에 비해, 본 시는 BC.722년에 앗수르에 멸망한 북 왕국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은 여로보암 1세였습니다. 그런데 왕국의 멸망은 그가 나라를 세울 때부터 이미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여보로암은 다윗 왕조로부터 열 지파를 찢어 북 왕국 이스라엘을 세웠습니다. 그때에 첫 번째 조치로서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한 마리씩을 세워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부르게 하였습니다. 이는 북 왕국 이스라엘 지파의 사람들이 예배와 제사를 위해 남쪽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꾸만 남쪽으로 가다보면 남 왕국 유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역사는 208년간 진행이 되는데, 그 왕들이 하나같이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다고 일컬어집니다. 그만큼 여로보암의 죄악이 끝까지 관철되었고 이로 인해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북 왕국 이스라엘이 망한 참담한 상황을 경험한 시인은 민족의 구원을 간구하는 애가를 불렀는데 되풀이 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빛과 광채입니다.

1절 하반부를 보면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 3절에서는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 7절에서는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 19절에서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선민의 돌이킴과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어 달라는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북 왕국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오 나의 태양이여라는 고백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반짝이는 것들에 마음의 시선을 빼앗긴 결과가 멸망으로 주어졌던 것입니다. 모로코의 영주가 포샤에게 구혼을 할 때에 금상자를 선택했지만 그 안에서 해골이 나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에 반짝거리는 것들을 추구하며 살았던 결과가 멸망이요 해골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한편 남 왕국 유다의 백성들은 무엇을 어쨌기에 북 왕국 이스라엘보다 200년가량 나라가 더 지탱되었던 것일까요?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의 백성들은 똑같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결코 그 이름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 왕국 유다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모신 법궤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담겨있었고,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는 금송아지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 차이 때문에 남 왕국은 그나마 200년 간 더 지속될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남 왕국 유다의 백성들도 예루살렘 성전의 존재 의미를 제대로 생활화하지 못한 끝에 망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차이는 확연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모신 법궤에 담겼던 것과 금송아지에 붙었던 것이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북 왕국 이스라엘 사람이나 남 왕국 유다의 사람이나 이 세상에서 반짝이는 것을 만나게 되는 것은 똑같았습니다. 가장 가까운 예로서 돈이 반짝입니다. 즉 돈의 광채를 마음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대상들이 있지만 돈이 유난히 광채를 발하게 되는 것은 돈이 있어야 만족하고 기쁠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이 광채를 발합니다. 건강이 없으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고 여깁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녀의 형통이 광채를 발합니다. 명품 아파트 모델 하우스에 가보면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어둠에 묻히고 새집이 광채를 발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소원이 생기고 갖고 싶다는 욕구가 생깁니다.

이런 식으로 이 세상에는 반짝이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남 왕국 유다나 북 왕국 이스라엘이나 똑같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단계에서 차이가 납니다.

남 왕국 유다의 사람들은 반짝이는 새 집을 보았을 때에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모신 법궤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1절의 하반부를 보면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고 그 법궤의 뚜껑을 속죄소로 부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속죄소의 양 끝에는 그룹 천사가 두 날개를 펴고 마주하는 형상을 취하면서 법궤를 덮고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라고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이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가 선민들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곧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고 변함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계속 침묵 중에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성소의 의미를 알 때에 명품 아파트가 반짝이는 광채를 비추고 마음에 소원을 불러일으킬지라도 이것을 가짐으로서 행복해진다는 보장은 없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내 마음에 기쁨을 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뿐임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소원해야 하는 마음이 명품 아파트를 소원함으로서 더러워 졌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번제단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 왕국 이스라엘은 이러한 길을 걷지 못했습니다. 반짝이는 명품 아파트가 마음에 담긴 상태로 금송아지 앞에 나와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들이 찾는 하나님은 오직 그 명품 아파트를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돈이 반짝이는 마음 상태에서 금송아지 앞에 나와서 찾는 하나님은 그 반짝이는 돈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짜 예루살렘 성전에 이름을 두신 여호와 하나님을 팔아서 돈을 사고 명품 아파트를 사는 셈입니다.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은 똑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이러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 사정은 어떻습니까? 똑같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지만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모신 법궤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지 따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그것을 참 신앙이라고 알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이 세상에는 반짝이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지나가는 외제차만 보아도 순간적으로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말씀 드린 대로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라고 해서 반짝이는 것들을 향하는 마음을 모조리 폐기처분하거나 억제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성전을 생각하는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반짝이는 명품 아파트로 인해서 생긴 열망과 소원의 크기를 그대로 하나님으로 바꾸어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막연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반짝이는 것들이 나타날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조금씩 진전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돈 십억을 갖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에서 십억이 반짝이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럴 때에 십자가에서 십억의 이름에 대해 죽음으로서 그 마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십억에 대한 열망을 그대로 하나님께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십억을 가지고 싶었던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열망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추구하고 간구함으로서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다 보면, 어느 순간 십억이 주어지든 않든 기쁨과 만족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은 십억을 열망하던 그 크기만큼 하나님으로 채워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마음에 반짝이는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또 다른 세상에 반짝이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또 그 대상을 하나님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들이 내 마음에 유발시킨 소망과 열망의 크기만큼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망하고 소망하게 하였던 반짝이는 것들을 전혀 갖고 싶어지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면 그만큼 하나님으로 채워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반짝이는 것으로 하나님을 살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쿠폰으로 바꾸는 작업을 지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존재 자체가 바로 이러한 말씀을 끊임없이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다(All that glitters is not gold).’라는 말은 영문법으로 보면 부분부정입니다.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라는 것은 그 중에는 금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전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반짝이는 것들은 예외 없이 모두 금이 아님을 가르쳐주십니다. 금이 상징하는 것은 곧 내 마음의 진정한 만족과 기쁨입니다.

 

세상에서 갖고 싶은 것들이 생겼을 때에 무작정 억제하고 금욕적으로 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그 열망의 크기 자체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반짝이는 대상 자체를 바꾸는 역사이지 열망 자체를 말살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 생활화는 돈을 벌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벌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 사랑과 하나님을 가짐이 구체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점점 발전할수록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느끼는 모든 것들에 대해 소원과 열망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가진 증거입니다.

세상에서 반짝이는 것들이 나타날 때마다 성전 생활화 또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반짝이는 열망을 하나님을 사는 쿠폰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을 쇼핑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벼룩시장에 가보면 쿠폰으로 음식도 사먹고 물건도 삽니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반짝이는 것들이 나타나도 그것은 결코 금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유발된 소원과 열망은 하나님을 사는 쿠폰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쿠폰만큼 하나님을 사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들일수록 세상의 반짝이는 것들에 대한 나의 욕망은 사라집니다. 말씀드렸듯이 자장면을 먹고 싶었을 때에 하나님 스테이크를 먹으면 더는 자장면을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구체적인 하나님 사랑이 나타납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살다보면 반짝이는 것들이 마음에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들은 내게서 소원과 부러움과 열망과 욕구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열망과 욕구를 하나님으로 채울 때에 세상에 반짝이는 것들은 있거나 없거나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진전을 이루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지만 신앙적으로 보면 반짝이는 모든 것은 예외 없이 금이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그 반짝이는 것들은 하나님을 사서 마음에 모셔 들일 수 있는 하나님 쇼핑을 위한 쿠폰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내 눈과 마음에 반짝이는 것들이 많이 보이며 소원과 열망과 욕구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십자가를 통하여 이 모든 열망을 하나님을 사는 쿠폰으로 바꾸게 해주셔서 오늘도 눈에 보이는 하나님 사랑의 진전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