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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세상은 상황, 하나님은 현실_태승철

by 태승철 · 18-03-17 09:33 · 6,447
삶에서 막힌 곳이면 어디든 뻥 뚫고 시원하게 길을 낼 수 있는 간단하고 기가 막히는 비밀 하나 가르쳐 드릴까요? 보통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현실' '내 삶의 현실' '우리 가족의 현실' '우리나라의 현실' 등등. 이렇게 세상 안에서 만나는 모든 '현실'을 모조리 '상황'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냥 일이 되어가는 형편이나 모습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의 사실을 나의 현실로 선택하면 됩니다. 하나님 현실 속에서 세상 상황을 마주하며 살면 됩니다.

세상은 상황, 하나님은 현실

(시편 141:1~10)

 

 

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2.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3.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4.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

5.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은 상황, 하나님은 현실>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은 상황, 하나님은 현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 도망 다닐 때 엔게디 동굴에 숨었다가 사울 왕을 살려준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이러한 사건을 배경으로 한 다윗의 형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현실 속에서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 도망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다윗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현실로 가졌을 때에, 그가 마주하는 세상의 모든 상황에는 이미 하나님의 계산이 끝난 것이었습니다. 상황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목표를 향해 이끌려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마음 쓸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선민에게는 많은 전쟁의 역사가 있었지만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전쟁이 가장 대표적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의 산헤립이 십팔만 오천 명으로 침공했으나 하룻밤에 멸절당한 사건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특별히 마음에 두고 은혜를 받는 것은 바로 역대하 20장에 기록된 여호사밧 왕 때의 전쟁입니다.

암몬과 모압과 마온의 연합군이 예루살렘에 쳐들어와서 드고아 뜰에 있을 때입니다. 여호사밧 왕이 모든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에 모여서 금식을 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러던 중 야하시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그 다음날 말씀을 따라 군대 앞에 성가대를 세우고 드고아 뜰로 나아가게 됩니다.

21~22절을 보면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전쟁의 대승리에서 여호사밧 왕이 한 일이 무엇일까요?

여호사밧 왕이 한 일은 현실을 상황으로 바꾼 것이었습니다. 암몬과 모압과 마온의 연합군이 쳐들어 왔다는 현실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상황 즉 목적지를 향해 흘러가는 과정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현실은 곧 사실들 중에서 마음을 주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여호사밧 왕이 연합군에 포위당한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자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그러던 중 선지자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리고 성가대를 앞세워 찬양하며 나아갔습니다. 싸움터로 나가는 군대 앞에 성가대를 세웠다라는 것은 하나님을 현실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합니다. 인자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적군들이 쳐들어 왔다는 사실보다 우선적인 현실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들이 금식기도로 모이기 전에는 연합군이 쳐들어 왔다는 사실만이 마음을 둘 현실이었습니다. 당연히 마음은 괴롭고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선지자의 말을 통해서 인자하신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현실이 바뀌었습니다. 그러자 연합군이 쳐들어 왔다는 사실은 흘러가는 과정의 한 장면에 불과하게 되었고 적들은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171~2절에서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아브람의 생애에서 어떤 일을 만나든지 그것은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는 결과를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일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할 때에 결과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 계산되었고 결정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현실로 삼을 때에 세상에서 겪는 일들은 계산된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강물에 마음을 둘 수는 없습니다. 한 지점을 보고 있노라면 보고 있던 강물은 이미 흘러가고 다른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마음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만나는 처지를 이렇게 상황으로 여겨야만 합니다. ‘상황이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일이 되어가는 과정이나 형편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계산된 목적지를 향해 흘러가는 하나의 과정이기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두는 것은 주어진 사실들 가운데 선택이 이루어짐을 말합니다. 내게 주어진 많은 사실들 가운데서 마음을 둘 현실로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고, 천국이 있음을 믿고 선택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내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처지는 현실이 아닌 상황이 됩니다.

예를 들어 재정적 문제를 현실로 삼을 수 있습니다. 혹은 건강이나 가족의 문제를 현실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이것이 현실이 되느냐 상황에 불과한 채로 남느냐는 것은 나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최우선적인 현실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매다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내 앞에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현실로 가질 때에 돈이 없는 것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일이 진행되는 한 과정이고 상황일 뿐입니다. 결과가 이미 정해져있는데 과정에 마음을 쏟아 부을 필요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에서 세상은 곧 나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을 현실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본 시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던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엔게디 동굴에 피신했을 때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눈치를 채지 못한 채 용변을 보던 사울 왕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절호의 기회를 다윗은 포기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셨기 때문에 그의 생명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에게 모반의 의사가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사울의 옷자락만을 잘랐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마저도 마음에 걸려했습니다.

오늘 시에서 특이한 것은 다윗의 심리상태입니다.

4절을 보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라는 말이 나오고 10절에서도 악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언뜻 보기에 이 말은 사울 왕이나 그를 따르는 부하들을 일컫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이 사울 왕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사울 왕이 선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울 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악하다고 여겼던 자들은 대체 누구일까요?

다윗은 도망자의 형편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추종하여 십 년이나 도망생활을 함께 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웬만해서는 다 떨어져나갔을 텐데 대단한 충성심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들을 향하여 악한 자들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일까요?

이들의 잘못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다윗을 우선시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24장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은 사울을 해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다윗을 설득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주객이 전도된 이들의 생각을 악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윗이 느끼던 위기감의 정체가 분명해집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는 것보다 더 우선적인 위기감을 추종자들에게서 느끼고 있었습니다. 사울을 살해할 것을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여기는 추종자들의 마음속에는 실제로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세우셨고, 그 하나님이 지금 이 현장에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전혀 현실로 여기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말을 좋게 여겨 행동했다가는 다윗 역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현실에서 놓치게 됩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이 현실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위기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믿고 추종하는 자들을 오히려 악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매몰차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다윗의 위대함이었습니다.

 

본문 3~4절을 보면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라고 하는 말은 마음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사울에게 쫓기는 추종자들에게 사울을 죽일 상황이 찾아왔다는 것은 최고의 진수성찬입니다. 사울만 죽고 나면 이제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은 당연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다윗이 이룬 업적의 위대함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사울만 죽이고 나면 이렇게 도망 다니며 거지처럼 살 이유가 없었습니다. 안정된 생활과 번영이 약속 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먹는 진수성찬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생각을 경계하였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진수성찬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선택함이 방해받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기에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자신의 추종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한 자들이 되어버림에 다윗은 분노했습니다.

기름을 부어 세운 종을 하나님이 처단하신다면 모를까 하나님을 현실로 삼은 자라면 하나님이 세운 종을 처단할 생각은 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참담하게 여겨진다고 해서 세상에서 주어진 기회를 하나님보다 우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추종자들이 이를 포기하고 마음의 진수성찬을 꿈꾸기 시작하자 다윗은 이에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분향단과 번제의 기도를 드립니다.

2절을 보면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라는 말은 기도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성막의 분향단과 번제단을 염두에 두고 기도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다는 사실을 현실로 선택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현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에 내 마음을 연합하여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매사에 많은 사실들 가운데서 현실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돈이 없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일 뿐인데 이것을 현실로 채택할 때에 마음이 괴롭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곁에 계시다는 것을 현실로 선택하고 도망자의 처지를 상황으로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산된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과정으로 여긴 것입니다. 결과가 보이는데 과정에 마음을 둘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현실이 되실 때에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현실로 모셔 들일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많은 사실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도 사실이며 돈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도 사실입니다. 이 많은 사실들 중에서 하나님의 계심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바로 다윗이 드렸던 분향단과 번제단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성막에는 법궤를 둔 지성소가 있고 휘장 바로 바깥쪽에 분향단이 있었습니다. 이 분향단에는 아침과 저녁으로 대제사장이 들어가 향을 피웠습니다. 성소 안에는 하루 종일 향이 가득하게 됩니다. 이것은 선민들이 어디에 살든지 하루 종일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함을 뜻합니다.

분향단은 지성소와 성소를 잇는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법궤가 상징하는 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소에는 배부름을 상징하는 떡상이 있었습니다. 이는 곧 지성소에 있는 존재의 이름으로 만족하게 됨을 상징합니다. 즉 분향단에서의 기도는 하나님으로 만족하게 됨을 추구하는 기도를 하루 종일 반복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심정도 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지금 사울 왕에게 쫓기고 있지만 저의 기쁨과 만족은 쫓기지 않는다고 해서 생기지 않습니다. 지금도 내 앞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현실이기에 기쁨과 만족이 됩니다. 사울로 인해 불행해지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드렸던 분향단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현실로 채택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분향단의 기도가 드려져야만 합니다. 세상적인 어려움이 생기면 순간적으로 걱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곧 분향단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현실로 삼아야 합니다. 돈이 없다고 해서 마음이 슬퍼하는 것이 가당찮은 일임을 깨닫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돈이 없는 처지는 하나님에 의해서 계산된 목적지를 향해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임을 떠올려야 합니다. 내 마음의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은 지금도 내 곁에 살아계시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충만하신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고 없음은 결코 나의 기쁨과 슬픔을 좌지우지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번제단의 기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기쁨과 만족의 근원되시고 나의 유일한 현실이 되셔야 함을 앎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자꾸 세상을 향합니다. 돈이 좀 더 있으면 좋겠고, 좀 더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장수하면 좋겠고 형통하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바라는 바가 자꾸 생깁니다. 엔게디 동굴에서 다윗의 추종자들이 제안한 것과 같습니다. 이것만 해결되면 인생이 호전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소원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한 바람과 소원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현실로 채택하는데 방해가 됩니다. 이러한 마음을 죽이는 번제단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소원을 갖는 것은 유전죄로 인한 착각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나를 번제단에서 죽임으로써 지금 내 앞에 계시는 하나님을 현실로 채택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분향단의 기도는 하나님만으로 기쁨과 만족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는 기도입니다. 번제단의 기도는 자꾸 세상을 향하는 체질을 가진 마음이 죽었음을 인정하는 기도입니다. 나를 돌아보면 마음에 소원하는 것이 보일 것입니다. 소원하는 것은 곧 마음의 지성소에 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악입니다. 이런 나를 죽이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향단과 번제단에서의 기도가 합쳐진 것이 십자가사건입니다.

부활과 승천은 하나님을 향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삶의 모든 행위가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시작됩니다. 이것 자체는 죄악이 아닙니다. 무엇으로 채우려 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부활과 승천은 곧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분향단의 기도와 상통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은 이 세상에서 마음 채움 거리를 찾지 않겠음을 의미합니다. 번제단의 의미와 상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분향단과 번제단의 기도가 합쳐진 십자가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하는 기도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기쁨과 만족이 가능함을 인정하는 기도를 드릴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앞에 계시다는 사실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내가 처한 세상의 상황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계산되어지고 의도되어진 목적지를 향해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이 과정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은 좌우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단지 상황일 뿐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이 충만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계산되고 의도된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두어야 될 현실은 그러하신 하나님께서 내 앞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마음을 두어서 현실로 삼고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이 현실 안에서 만나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단순히 도망자의 현실을 살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현실로 모시고 도망자의 상황을 마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계심의 현실 속에서 계산된 상황으로서의 오늘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기도를 드림으로 다윗의 분향단 기도와 번제단 기도가 날마다 우리 마음과 입에서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비하신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시다는 사실이 나의 현실이 되게 하여 주셔서 어떠한 상황을 만나든지 계산된 목적지를 향해가는 과정으로 맞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