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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내동댕이쳐질 때의 인생낙법_태승철

by 태승철 · 18-03-20 09:39 · 6,547
바닥에 메쳐질 때 몸을 상처 없이 지킬 수 있는 유도의 낙법이 삶에도 꼭 필요합니다. 누구나 삶의 상황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질 때를 만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인생낙법을 모르면 다시 일어나기가 어려울 정도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가 있습니다. 복음은 기본적으로 낙법이면서 동시에 내동댕이쳐진 상황으로부터의 돌파구이고 더 나가서 최선의 성취를 가능하게 해주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우리 삶의 상황을 내동댕이치실 때가 있습니다.

내동댕이쳐질 때의 인생낙법

(시편 142:1~7)

 

 

1.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2.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3.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4.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동댕이쳐질 때의 인생낙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동댕이쳐질 때의 인생낙법

낙법(落法)은 유도의 방어기술입니다. 업어치기 같은 기술을 당할 때면 바닥에 내동댕이쳐집니다. 이럴 때에 몸에 상처 없이 기술을 받을 수 있게 넘어지는 방법이 낙법입니다. 한편 인생도 바닥에 내동댕이쳐질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낙법을 모르면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유도 선수들에게는 메치기를 당하여 바닥에 팽개쳐지는 일은 흔한 일입니다. 낙법을 알기에 계속해서 받아낼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도 낙법을 안다면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일상적 훈련의 하나로 여기고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내동댕이쳐진 상황이 오거든 그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마음으로 붙잡고 씨름하지 말고 무조건 도망가야 합니다. 마음이 얽힌 상황으로부터 도망가야 살 수 있습니다.

 

와일드(Wild)”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의 소제목은 상실한 것을 되찾은 태평양산마루길(From Lost to Found on the Pacific Crest Trail)’이라고 합니다. 멕시코 국경에서부터 캐나다 국경으로 이어지는 약 4,300km의 태평양산마루길 혹은 태평양종단길로 불리는 PCT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이 길을 걸어가는 내용입니다. 셰릴 스트레이드라는 여성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주인공은 가난한 가정형편과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결국 부모가 이혼하고 주인공은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어머니와의 행복한 인생을 맞이하려던 찰나, 유일한 의지였던 어머니마저 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인생의 상황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것입니다. 결국 주인공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고 스스로의 삶을 파괴해가기 시작합니다. 마약 중독이 되고 결혼을 하고서도 외도를 일삼으며 낙태를 반복합니다. 결국 이혼까지 하게 된 주인공의 삶은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고통과 혼란이 가중되던 어느 날 주인공은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고 마음에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작정 걷기를 실천합니다. 슬픔과 상처를 치유하고 엄마가 자랑스러워했던 딸로 다시 되돌아가기 위해서 4,285kmPCT 완주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 길이 결코 순탄치 않습니다. 멕시코 국경에서 미국을 지나 캐나다 국경까지 가는 동안에 눈 덮인 고산지대를 지나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백두산이 2,700m인데 이 산지가 4,000m를 넘습니다. 또한 아홉 개의 산맥과 사막과 광활한 평원과 화산지대를 통과해야 합니다. 인간이 만날 수 있는 모든 거친 자연환경을 통과하고서야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평균 152일이 걸리는 이 극한의 도보여행코스를 악마의 코스라고 부릅니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이 이 코스에 도전하지만 실제로 완주하는 사람은 일 년에 125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125명이 완주하지만 그 125명 모두가 셰릴 스트레이드와 같은 괄목할만한 결과를 손에 쥐지는 못합니다. 처한 입장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125명이 완주하지만 이 사람들은 도전과 성취의 과정으로 이 길을 걸었습니다. 자부심에 근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셰릴 스트레이드가 이 길을 걸었던 이유는 도망이고 피난이었습니다. 마약에 사로잡혀 있고 외도가 습관이었습니다. 이혼을 겪으며 한없이 망가진 자신으로부터의 도피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특이한 법칙이 하나 생겨납니다. 삶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 때면 도망가라는 법칙입니다. 똑같이 길을 걸어도 성취를 위해 길을 걷는 사람은 지금 상황을 도망가기 위해서 길을 걷는 사람보다 얻는 것이 적습니다. 인생이 내동댕이쳐질 때의 최고의 방법은 도망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말씀에서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지는 처지는 상황이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상황은 곧 계산된 목적지를 향해가는 과정입니다. 마음을 두는 것은 특정한 대상을 통해 마음을 채울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렇게 선택된 사실은 나의 현실이 됩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이 땅을 사는 우리의 유일한 기쁨과 만족이 되시는 현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둘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이 세상의 상황은 지나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의 상황이 내동댕이쳐질 때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상황판을 흔드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상황을 현실로 붙잡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을 믿으며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빠져나와서 빨리 도망가라는 것입니다.

셰릴 스트레이드는 마약과 외도와 이혼과 낙태 등으로 인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삶으로부터 도망쳐서 태평양종단길에 올랐습니다. 평균 152일이 걸리는 이 길을 94일 만에 종단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기간이 마약 등으로부터 도망치는 시간이 되어서 자신을 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셰릴 스트레이드는 갱생에 성공해서 작가로 활동하며 건강한 삶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세상의 상황이 내동댕이쳐질 때에 도망가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황을 주관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잘못해서 인생의 상황이 안 좋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여러분께도 잘못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대평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인생의 상황을 나쁘게도 할 수 없고 좋게 할 수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태가 아닐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된 상태를 깨닫게 하시려고 상황을 내동댕이치실 수 있습니다. 내가 직접적으로 상황을 내동댕이칠 수 없는 이유는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것으로 착각하며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현실로 착각하고 그것을 개선시켜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빠져나오도록 하시려고 상황을 내동댕이치십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곧 인생의 낙법입니다.

 

본 시는 다윗이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 아둘람 굴에 숨어있을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핍박으로 인해 극도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유일한 피난처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애절한 심정으로 간구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 의한 상황의 변화를 확신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사울 왕에게는 쫓기고 사람들에게 철저히 외면과 버림을 받음으로 인해서 갖게 되는 위기의식과 절망감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아둘람 굴에서 인생에서 최악의 상황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인생의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게 되었습니다. 본문 6절을 보면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비천하다라는 말은 심히 낮은 곳으로 옮겨졌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을 통해 가르쳐주시려는 인생의 낙법이란 무엇일까요?

다윗은 오늘 시를 통해 삶에서 내동댕이쳐졌을 때 살 수 있는 낙법만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돌파구를 말하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최고의 성취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인생이 내동댕이쳐짐을 느낄 때에 다윗이 주는 교훈을 백분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인생의 낙법에 대한 기초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낙법일까요?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의 앞에 토로한다라는 것은 히브리어 샤파크로 마음을 쏟아 붓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원통함과 억울한 마음을 처리하는 방법이 나타납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원통함과 억울함을 안겨준 당사자인 사울 왕과 맞서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울의 존재가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오직 다윗은 마음을 쏟아 부을 대상으로 하나님을 확보합니다.

예를 들어 손아랫동서가 나를 무시하여 마음에 원통함이 생겼습니다. 그럴 때에 해야 할 일은 마음에 생겨난 원통함을 동서가 아닌 하나님 앞에 쏟아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은 이 쏟아냄이 상대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사울이 저주받기를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원수를 갚아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만을 관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 가서 분풀이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꼭 이렇습니다. 사울로 인해서 원통함이 생겼는데 하나님께로 가서 풀어놓습니다. 이것이 낙법의 기초입니다.

하나님만을 대상으로 삼을 때에 내 마음이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세상을 현실로 삼은 상태에서 현실을 상황으로 강등시키기는 길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원수로 인해 생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을지라도 그 원수를 향하여 억울함과 분통함을 드러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오히려 상황에 더 빠져들고 정말로 가야할 곳인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원수 갚기를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원수가 최우선의 목적이 되고 하나님은 원수를 갚기 위해 동원되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첫 번째 관심사가 되실 때에만 우리와 만나주십니다. 그렇기에 원통함이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놓으라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마음을 쏟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

 

낙법의 두 번째는 3절에서 나타납니다.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한다라는 것은 너무나 큰 절망에 삶의 의욕을 잃은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윗은 당장은 아둘람 굴에 숨어있지만 나가서 어디로 가야할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길을 찾을 용기도 의욕도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낙법의 두 번째입니다. 내동댕이쳐졌을 때에 절대 스스로 길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원수는 안 보고 하나님만을 보라는 것이고 원통함을 하나님께 하소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상황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길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길을 찾으러 나설 때에 반드시 하나님을 잃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나님께 이 길을 갈지 저 길을 갈지 묻는다고 하여도 그 길이 세상길이라면 하나님을 잃게 됩니다. 내동댕이쳐진 상황으로부터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로 나의 현실을 옮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세상은 어떤 처지가 주어져도 상황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마음을 두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나의 현실로 만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나의 현실로 옮길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당시의 법정에서 피고인의 자리에 서면 돕고 변호해줄 증인은 나의 오른편에 서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른쪽을 살펴보는 것은 곧 도움의 손길과 조력자를 찾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는 상황에서는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치고 다윗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윗을 외면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나의 피난처도 없고라는 말은 몰래 숨겨줄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힘든 상황에 처했는데 마음을 위로해줄 사람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추종자가 400명이나 있었지만 그들의 신앙이 다윗에게 크게 미치지 못했기에 다윗의 마음을 위로해주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사방팔방이 철벽에 갇힌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조력자도 없고 도망가서 피할 곳도 없고 마음을 위로해줄 자도 없습니다. 한 마디로 인생 최악의 상황입니다. 세상이라는 공간에서는 돌파구도 없이 막히고 인생의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습니다.

5절에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이라는 말은 이 세상의 지평면 상에서 발을 딛고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만이 분깃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고백을 통해 하나님을 현실로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낙법입니다.

이 낙법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면서도 내가 상하지 않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나의 몫으로 나의 기업으로 나의 소유로 가지는 성취가 일어납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만 나올 수 있고 인생의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을 때에만 가능한 고백입니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외면하고 위로하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만이 피난처가 되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이런 저런 피난처를 마련해두었다면 결코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가 되어주시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나의 기업, 나의 몫, 나의 분깃으로 얻을 수도 없습니다.

6절을 보면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강한 자들의 핍박에 갇혀서 인생이 내동댕이쳐지고 있는데 7절에서 다윗은 어떤 간구를 하였을까요? 상황이 바뀌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옥에서 이끌어 내달라는 말대로 갇힌 상황이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 자체가 바뀌는 것을 간구한 것이 아닌 자신의 영혼을 이끌어 내달라는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정했습니다. 그러자 상황이 변하기에 앞서 영혼이 구원을 얻고 마음의 공백이 채워져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으시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도 이와 같습니다.

다윗은 아둘람 굴에서 인생의 바닥에 내동댕이쳐져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이러한 상황을 자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매달려 있을 때에는 누구도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누구도 위로해줄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있는 곳도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과 함께 내가 못 박혔다고 고백할 때에,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 됩니다. 셰릴 스트레이드가 태평양종단길로 도망하였다면, 우리는 십자가 길로 도망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을 때에 가장 큰 문제는 상황자체가 아닙니다. 감옥에 들어간 것, 사업이 망하는 것, 가정이 파탄 나는 상황 자체도 제일 큰 문제는 아닙니다. 제일 큰 문제는 내 마음이 그 상황에 묶여서 나의 현실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체감하여 씨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극단적 상황에서 다치지 않고 회복되고 오히려 더 나아지는 유일한 길은 내 마음이 세상에서 빠져나와서 아버지 하나님께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옮겨가기 위해서는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조력자가 없고 위로자도 없고 길도 찾을 수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만이 피난처가 되시며 유일하신 길이며 현실이 되실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으로부터 빠져나가서 하나님께로 도망가면 하나님께서는 굳이 내 인생을 나쁜 상태로 유지시키실 이유와 명분이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순교한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인생의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이유는 우리 마음이 세상을 현실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원치 않으시기에 그 판을 흔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이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오기를 생활화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바닥에 내동댕이치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낙법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낙법의 완성이고 성취의 완성입니다.

다니엘의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일곱 배나 뜨겁게 한 풀무에 들어갔을 때에 머리카락 하나 그슬리지 않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라는 낙법을 통해서 인생에서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오히려 호전의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에서 못 박힌 자임을 매순간 고백함은 이 세상에서는 길이 막히고 어떠한 조력자도 없는 상태에서 아버지만이 유일한 피난처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로부터 오는 구원을 만끽하는 삶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