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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마음이 미아라 '이 모양 이 꼴'_태승철

by 태승철 · 18-03-21 10:11 · 6,747
"이 모양 이 꼴로 엉망이 된 채로, 무슨 정신으로 사는 건지. 눈물 쏟아내고 한숨 뱉어내고 텅 빈 가슴치고 우네요." 가수 신지의 '이 모양 이 꼴로'의 가사입니다. 실연 당한 아가씨의 자괴감과 자조 섞인 자아의식이 함축적으로 표현된 '이 모양 이 꼴', 덩달아 마음이 아프네요. 내 삶이 이 모양 이 꼴로밖에 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 마음이 미아(迷兒)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성공과 성취와 성과가 없어도 미아 상태를 벗어나기만 하면 삶은 충만해질 것입니다.

마음이 미아라 이 모양 이 꼴

(시편 143:1~12)

 

 

1.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2.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3.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 지 오랜 자 같이 나를 암흑 속에 두었나이다

4.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5.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6.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마음이 미아라 이 모양 이 꼴’>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마음이 미아라 이 모양 이 꼴

가수 신지의 이 모양 이 꼴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착한건지 바보인지 나 같은 여자 못 봤대요.

요즘 같은 세상 흔해 빠진 사랑 이별도 쉽게 하는데

듣는 사람 앞에 두고 할 말 아닌데 못 났대요.

밥도 잘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왜 울며불며 하냐고

 

이 모양 이 꼴로 엉망이 된 채로

무슨 정신으로 사는 건지 눈물 쏟아내고

한숨 뱉어내고 텅 빈 가슴 치고 우네요.

 

나쁜 남자 만나 아픈 사랑하다 휴지 버리듯이 버려져

이젠 웃지 못해요, 이깟 이별에 죽지 못해 사네요.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기다려 봐도 안 오네요.

언제쯤 돌아올까, 내일이면 올까 아니면 영영 끝일까.

 

이 모양 이 꼴로 엉망이 된 채로

무슨 정신으로 사는 건지

 

이 모양 이 꼴로라는 말에는 자기냉소적인 의도가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자아의식을 갖게 된 이유는 사랑하는 애인으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입니다. ‘버림을 받았다라는 것은 곧 마음이 머물러 있을 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미아가 되었다는 것이죠.

마음의 집을 잃어버렸을 때에 나타나는 증상이 이 대중가요에 아주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눈물 쏟아내며 슬퍼하는 것입니다. 한숨 뱉어내고 텅 빈 가슴 치고 우는 것입니다. 이젠 웃지 못합니다. 이게 미아의 마음 상태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복음의 내용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는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집을 나가 미아가 된 지경에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음을 고백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내용입니다.

저의 기억엔 없지만 제가 어린 시절 경복궁에서 미아가 돼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위의 두 형님에게도 미아와 관련된 일화가 있습니다. 첫째 형의 미아에 대한 일화를 보면 서너 살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퇴근해서 집에 오시는데 아이가 집에서 나와서 어디론가 가더랍니다. 그래서 가만히 따라가 보았습니다. 당시에 약수동에 살았다고 하는데 장충동을 거쳐서 퇴계로 을지로 종로5가까지 상점들을 계속 구경하면서 2~3시간을 그렇게 가더랍니다. 아버지가 집에서 나오는 형을 못 보았다면 그대로 미아가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한편 둘째 형은 이와 다른 일화가 있습니다. 둘째 형이 소풍을 가는데 할머니가 따라 가셨습니다. 그런데 할머니에게 다른 데로 가면 안 된다고 10분마다 찾아와서 확인하더라는 것입니다. 할머니를 잃어버릴까봐 그랬는지, 할머니가 자신을 잃어버릴까봐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미아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성격입니다.

성경에서 집을 나온 탕자는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조차도 먹지 못할 정도로 망했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 모양 이 꼴로라고 한탄을 합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체험을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이유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몇 십 년 동안 성취가 없기 때문도 아닙니다. 마음이 미아 상태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이 미아 상태를 벗어나게 합니다. 미아 상태만 벗어나면 삶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충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을 통하여 이 미아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 시는 BC.979년경에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예루살렘 궁을 버리고 피난 갔을 때에 지은 시로 여겨집니다. 원수들에 의해서 주어지는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다윗의 애끓는 심정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러한 원수들로 인한 핍박을 단순히 상황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성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본 시는 비탄시이며 동시에 참회시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살펴봅니다.

1절을 보면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응답을 구하되 진실과 의라는 조건을 달고 있습니다. 또한 2절을 보면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조금 껄끄럽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심판에 대해 하라마라 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용서를 구할 뿐이지 감히 하나님께 심판을 요청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심판하지 마시기를 부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하나도 없으니 자신 또한 굳이 심판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처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그러한 뜻이 아닙니다. 우선 1절에서 말한 주의 진실과 의를 이해해야 합니다. 진실은 신실하다라는 뜻이고 라는 말은 하나님의 마음에 든다고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2절에서 나온 주의 눈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라는 구절의 의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원한 적도 없고 간구한 적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선택하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선택을 받은 당사자들이 똑같은 죄를 짓고 살지만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선택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도 그들이 선하기 때문이 아니고 은혜와 사랑으로 인한 것입니다.

1절에서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라는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인데 그 중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선택을 신실하시고 은혜와 사랑으로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그로 인해서 응답하시지 않는다면 다른 이유로 응답받을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게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만한 의로운 면이 조금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전히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지, 내게 사랑스러운 요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1절을 쉽게 풀이하자면 하나님께서 온전한 사랑과 자비로 나를 끌어안으셨습니다. 이제 그 사랑에 호소하오니 응답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주신 것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성전의 상번제에서 매일 죽는 어린 양을 통하여 스스로 죄인 됨을 깨닫고 죽음을 고백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의롭게 여기시사 껴안아주십니다. 오늘 다윗의 노래에는 이러한 성전과 번제의 요소가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윗의 기도가 3~4절에 나타납니다.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 지 오랜 자 같이 나를 암흑 속에 두었나이다 /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구절입니다. 이 기도가 다윗이 처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속에서 상한다라는 것은 곧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 가운데 있음을 뜻합니다.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었다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의 자존감이나 삶의 가치가 완전히 뭉개져버렸음을 뜻합니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국내외적으로 최고의 번영을 이룩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평생 쌓았던 공든 탑이 아들의 반역으로 인해서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간구는 이러한 공든 탑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심령을 지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왕궁과 왕위를 잃고 명성을 잃고 사람들은 여호와를 잘 섬긴다던 다윗의 최후를 비웃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오직 참담함으로 가득 차버린 심령이 구원 받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11절에서도 반복됩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 영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대체 영이 무엇이고 영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보면 대답할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이것은 신학을 하는 세계적인 석학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영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명확히 밝히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시고자 한 일은 구원이었습니다. 여기서 구원은 주님과 하나님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도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 영이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은 하나님 크기의 마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마음의 공백이 바로 영입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담음을 통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영은 독립된 것이 아니라 혼과 육과 연결되어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육과 혼의 영향을 받음으로 인해서 마음이 채워지지 않게 될 때에 영은 죽어갑니다.

다윗은 오늘 노래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모셔 들여야만 하는 영적 상태가 참담함으로 가득차고 말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최우선적 간구는 그러한 상태에서 회복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라도 잃고 권력도 잃고 피난 가는 중이지만 육신이 처한 환경의 회복이 아닌 마음의 구원을 간구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간구를 할 수 있었기에 다윗은 대단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어떻게 이런 신앙의 비밀을 알고 생활화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우리 같았으면 백만 원만 떼어먹혀도 분노로 충천해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평생 쌓아왔던 공든 탑이 무너지게 된 상실의 위기에서 이것들을 젖혀둔 채 마음의 상실만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잠언 423절을 보면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1632절에서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의 이와 같은 모습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는지도 모릅니다.

 

다윗은 마음을 잃은 상태를 참담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5~6절을 보면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피난길에 올라서 옛날 일을 회상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상식대로라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대책을 세우고 회의를 해야 할 것입니다.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책략을 짜내기 위해 참모들과 회의를 해야 할 터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순간에 옛날을 회상합니다. 더군다나 전쟁에서 이기던 시절도 아닌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생각하며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을 되찾고자 합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문제의 해결을 갈망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주여 삼창을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백 번, 천 번 부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상황이 바뀌고 전환되고 역전되는 것을 바라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를 사모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렸기에 하나님을 되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앞서 보았던 신지의 노래를 보면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버림받은 여성이 이 모양 이 꼴로라며 삶을 한탄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마음 둘 곳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다윗도 이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은 아들 압살롬이었습니다. 그의 모친도 왕가의 딸이었고 압살롬의 외모가 아주 준수했습니다. 밧세바에게서 낳은 솔로몬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솔로몬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깨닫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반면 압살롬은 다윗의 영광의 재현이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려 반란을 일으켰고 다윗은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 생각 하나만으로도 다윗의 마음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되자 더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이었겠습니까? 마음이 장악당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의 손톱 밑에 가시하나만 박혀도 마음이 내려앉지 않습니까? 학교에서 선생님이 전화만 해도 난리가 납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반란을 일으켰으니 마음이 장악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서 멈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을 가장 문제 삼았습니다. 마음이 있어야 될 마음의 집을 잃고 미아가 된 것으로부터의 구원을 간구합니다. 이것을 통탄하면서 하나님이 하셨던 일들을 읊조리며 하나님을 되찾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했던 마음 상태를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계속해서 생각하며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위대함입니다.

다윗은 마음 하나만 지킬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만 잃지 않으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평생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질지라도 하나님을 집 삼아 마음을 머물게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일주일 만에라도 회복시킬 수 있으심을 알았습니다. 상황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것이 마음을 사로잡기에 싸웠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을 보면 12절에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원수는 미아로 살면서도 미아인 상태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회복하려 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상실한 마음을 유지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8절에서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희 큰 형이 큰 눈을 껌뻑껌뻑하면서 생전 처음 보는 상점들을 바라보며 다닐 때에 길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하나하나가 너무 신기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마음에서 집과 부모에 대한 생각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세상에 내어줄 때 미아가 되고 탕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눈을 크게 뜨고 자녀를 바라볼 때에 마음이 빠지고, 사업을 바라볼 때에 마음이 빠집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대상들은 내가 하나님께 마음을 둠으로써 미아가 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다윗이 목동시절부터 한 일은 오직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골리앗 앞에서 사울 왕 이하 모든 이스라엘 군대의 마음은 미아 상태였습니다. 골리앗을 바라보는 동안 하나님이 살아서 이 싸움 현장에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어린 아이가 동네만 벗어나도 집을 찾아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현장에서 절대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여 나간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이 전장에서조차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동굴을 전전하며 도망할 때에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목동에서 왕이 되는 일까지 하나님이 해나가셨던 것입니다. 설령 왕이 되지 않았더라도 미아가 되지 않은 마음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서 바랄 것이 없는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10절을 보면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미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으로 충만하다면 하나님께서는 행할 바를 가르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충만해질 때에 내가 행하는 것 말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뜻의 열매가 맺힙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을 되찾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 현장에서 돌에 맞아 죽게 되었을 때에 얼굴에서 빛이 났던 이유는 마음이 하나님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천사 같은 얼굴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음이 미아가 되는 이유는 육체로 만나는 이 세상의 대상들을 마음의 눈으로 껌뻑껌뻑 쳐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쳐다보는 동안 첫째 형이 길을 잃을 뻔했던 것과 같습니다. 마음이 미아의 상태가 되는 것이 탕자입니다. 이 세상 어떤 것에도 마음을 쓰지 마세요. 그것을 위해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에서 떨어져 나와서 부활과 승천의 방향에 마음을 고정시킬 수 없게 될 때에 미아가 됩니다. 오늘도 누구를 만나든 어떤 일을 대하고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십자가를 먼저 바라봄으로써 미아의 상태에 빠지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성경이 말하는 영적 사실대로 이 세상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십자가를 마음으로 바라보고, 마음으로 붙잡고 마음으로 껴안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미아가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