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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내가 자리만 뜨면 사건 치신다_태승철

by 태승철 · 18-03-22 09:33 · 6,426
엄마가 잠깐 설거지 하러 부엌에 간 사이 조용하면 아기는 틀림없이 사고치고 있는 중입니다. 3살 미만짜리 아기들은 엄마가 자리만 뜨면, 서 있는 모든 것은 쓰러뜨리고, 담겨 있는 모든 것은 쏟아버리며,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은 맛있게 먹는 중이고, 아무데나 닥치는 대로 낙서 중이지요. 하나님이 이렇게 아기와 같은 속성이 있으십니다. 내가 삶에서 자리만 뜨면 사고 대신 사건을 치십니다. 믿음은 자리 뜨는 것이고 하나님이 치시는 사건으로 삶을 채우는 거지요.

내가 자리만 뜨면 사건 치신다

(시편 144:1~15)

 

 

1.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

2.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3.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4.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가 자리만 뜨면 사건 치신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가 자리만 뜨면 사건 치신다

우리는 사고 친다라는 말은 자주 씁니다만 사건 친다라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좀 바꾸어서 내가 자리만 뜨면 하나님께서는 사건을 치신다라는 제목이 되겠습니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들의 특징은 엄마가 자리만 뜨면 사고를 칩니다. 오히려 울고 징징대며 떼를 쓰는 동안에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자리를 뜬 사이에 한동안 조용하다면 반드시 사고를 치는 중입니다. 아무데나 낙서를 합니다. 그릇에 담겨있는 것을 다 쏟아놓습니다. 손닿는 곳에 있는 모든 것을 쓰러뜨립니다. 책이 꽂혀 있는 꼴을 못보고 다 빼놓습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입에 넣고는 아주 맛있게 침을 질질 흘리며 빨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세살 때까지 계속 됩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믿음이란 어린 아이를 남겨두고 자리를 뜨는 엄마의 마음과 같습니다.

마음에는 공백이 있고 이 마음의 공백이 바로 영입니다. 이 공백에 영이신 하나님께서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공백이 채워지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이 마음의 공백이 채워지는 상태가 만족과 기쁨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삶의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만족과 기쁨과는 상관없다고 여기는 것이고, 삶의 현장을 떠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처한 삶의 형편과 처지가 어떠하든지 그것의 변화나 개선으로는 궁극적인 만족과 기쁨이 만족이 주어질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치 엄마가 아기를 놔두고 자리를 뜨듯이 마음은 삶의 현장을 놔두고 하나님께로 가야합니다.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기는 반드시 사고를 칩니다만, 우리 마음이 떠난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사건을 치십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건 치시는 것을 깨달을 때에 내 일생의 과제는 삶의 현장에서 자리를 뜨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의 내용은 하나님이 치시는 사건으로 채워져 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산 대표적 인물이 다윗입니다.

예수님의 계보를 소개할 때에 마태복음 11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들 외에도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이 많았는데도 왜 하필이면 이 둘을 예로 든 것일까요?

아브라함의 생애 전체는 믿음이라는 주제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설교였습니다. 믿음은 곧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입니다. 만져지지도 않고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냄새 맡을 수도 없는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 전체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한편 다윗은 아브라함에게서 나타났던 믿음을 삶에 적용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증명했고 다윗이 실천한 그 믿음을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으로 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복음 사역이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삶의 현장을 살았던 다윗의 삶이 예수를 믿는 누구에게서든지 일어나도록 해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의 정체는 바로 자리를 뜨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사건 현장이나 상황이 어떻게 바뀌고 좋아지더라도 궁극적 기쁨과 만족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공백이 흡입력을 작용시키기 때문에 만족과 기쁨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흡입구의 방향을 하늘로 돌리고 내 마음은 세상에서 자리를 비우는 것입니다. 자리를 비우면 하나님께서는 사건을 치십니다. 하나님이 사건을 치심으로 삶의 내용이 채워져 가는 것이 신앙인의 인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생의 대표자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이러한 면모를 부각시켜 노래하고 있습니다.

 

본 시는 사무엘하 10장에서 소개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서 아람과 암몬의 연합군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노래들이 여럿 있지만, 오늘 시편의 특징은 전쟁이 치러지기 직전에 부른 노래였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이 굉장히 중요한 전쟁이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의 경계를 정해 주실 때에 동편의 경계를 확정짓는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렇게 중요한 전쟁이 치러지기 직전에 전의를 불태우기는커녕,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마음이 뜰 생각을 하면서 부른 노래입니다. 다윗의 삶에서는 항상 다윗과 하나님과 세상이라는 삼각관계가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이러한 삼각관계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왔는가를 묵상합니다. 되돌아봄을 통해 이제까지 벌어졌던 모든 상황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자리를 뜨는 것 밖에 없었다는 것을 되새겼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마음을 뗄 때에 하나님께서 사건을 치심으로 인해서 삶의 내용이 채워져 왔음을 묵상했던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전쟁을 하고자 하는 훈수를 두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 못하는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실 때에 사람들은 이를 두고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다윗도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셨다라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장갑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이 마치 내가 하나님의 장갑이 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일들을 이루신 주체가 내가 아닌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내 손을 움직였고 내 몸을 통해서 일을 한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나를 장갑삼아 일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전쟁의 전략을 가르쳐 주시고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틀렸다는 것이 다음 구절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오라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의 속성을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의 사랑의 대상이 되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나올 때마다 기억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대표적으로 표현해 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직접 사랑을 언급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기쁨으로 귀결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23절에서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이라고 하시며 기쁨으로 귀결되는 사랑의 정체가 하나 됨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서로가 서로로 인해 채움이 일어나고 연합하여 기쁨을 얻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오라고 말한 것도 이와 같습니다. 바로 이렇게 내가 하나님으로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만이 내 마음을 채우실 수 있는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내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과 연합하여 손가락을 움직이고 손을 움직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장갑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다윗이 한 일은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라고 하였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상황을 보고 듣고 만집니다. 그러면 내 마음은 십중팔구 상황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공산당이 만주에서부터 북쪽으로 내려왔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피난했던 것과 같습니다. 이들이 피난했던 이유는 공산치하에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우리의 마음을 상황에 묶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피해 하나님께로 피난을 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산치하에서 행복하게 살 수 없음을 믿기 때문에 피난했듯이, 벌어지는 삶의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지 나의 기쁨과 만족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피난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 피난 가는 마음이 곧 사랑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기쁨과 만족의 근원되심을 믿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서 내가 만족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렇게 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이 떠나버린 세상에 사건을 치십니다.

2절 하반부를 보면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로 피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이에 대형 사건을 치셨습니다. 목동이었던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목동이었던 다윗이 한 일은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께로 피난 갔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기쁨과 만족의 근원으로 모시며 사는데, 세상일들이 그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하나님께로 피난가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어서도 법궤를 모시고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성막의 상번제를 생활화함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피난 가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상황에 사로잡힌 나를 상번제에서 죽는 고백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도망했습니다. 이렇게 자리 뜨는 것을 평생의 과제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온 백성이 다윗에게 복종하게 하는 대형 사건을 치셨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중요한 전쟁을 앞두고 기억했습니다.

 

또한 다윗은 5절에서 여호와여 주의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며 산들에 접촉하사 연기를 내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시내산 사건을 떠올렸습니다. 시내산 사건은 곧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강림하셨던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강림하실 때에 산이 진동하고 불과 연기가 옹기점처럼 피어올랐습니다. 다윗이 이 사건을 떠올린 이유는 이제 마음이 떠난 상황에 이처럼 하나님이 강림하시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자리를 뜬 것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피신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일하셨고 그 결과 목동이 왕이 되는 일까지 일어났음을 회상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의 경계를 결정짓는 중요한 전쟁을 앞두고 있는데, 이 전쟁에서조차 다윗은 자리를 뜨겠다는 것입니다. 엄마가 아기를 떠나면 아기는 사고를 칩니다. 다윗은 전쟁을 놔두고 하나님께로 피난을 가면 하나님께서는 이제까지 하셨던 것처럼 원하시는 대로 사건을 치시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전쟁에서 이기게 해달라는 간구를 넘어선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3~4절을 보면 다윗의 입장이 나타납니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헛것 같다라는 것은 사람의 생애가 70~80년으로 긴 것 같아도 실은 한 숨에 지나지 않고, 그 존재의 무게는 그림자와 같이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다윗 한 사람의 생애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숨거리에 지나지 않고 그림자 같이 허망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지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개입하셔서 크고 작은 사건을 치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마치 관중석에 앉아 자신의 삶을 관람하는 기분이 되어 감격하고 있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에 국가대표팀 거스 히딩크 감독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때에 약체였던 한국 팀을 4강까지 오르게 했던 히딩크의 리더십을 본받고자 일반 기업에서도 강연 초청이 쇄도했습니다. 그 당시에 유행했던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홍명보당에서 만든 안정환이라는 특효약을 이천수에 타서 마시면 히딩크라는 트림이 나오면서 십년 묵은 체증이 뚫린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에 길이 남을 리더십이었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인터뷰 가운데 선수들이 골을 못 넣는다고 감독이 직접 뛸 수는 없다라고 했습니다.

대한민국 축구팀의 감독이 히딩크였다면 내 삶의 감독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서는 히딩크 감독과 반대의 말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서 감독도 하고 선수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삶에서 자리 뜨는 자입니다.

3~4절에서 드러나는 다윗의 심리가 이러합니다. 관중석에 앉아 자신의 인생이라는 경기를 관람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물론 다윗의 몸을 움직이고 다윗의 손을 움직여서 전쟁을 하고 왕 노릇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다윗은 이러한 일을 하고자 해서 해 본적이 없습니다.

사람은 내가 무엇인가를 해냈다고 여길 때에 기쁨과 만족을 얻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내 마음의 흡입력으로 움직이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이라는 의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이미 기쁘고 만족한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은 자연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움직이는 것을 내가 구경하는 삶이 되어버립니다. 내 손길이 닿는 영역은 나를 통해 역사하시고, 내 손길이 닿지 않는 영역에 대해서는 주변을 통해 역사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러한 마음을 가진 왕으로서의 다윗이 백성들에게 갖는 마음이 드러납니다. 백성들이 풍성함 가운데 살 것을 12~15절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들과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양식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이돌들과 같을 것이며 /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 우리 수소는 무겁게 실었으며 또 우리를 침노하는 일이나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이 없으며 우리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 /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왕으로서 우선적으로 원했던 것은 백성들이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마음을 뜨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기쁨과 만족이 되심을 믿고, 주어진 삶의 현장이 어떻게 변해도 그것은 나의 기쁨과 만족과 관계없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성전에서의 상번제를 통해 어린양이 죽을 때에 세상을 기대하는 나의 죽음을 통해서 마음을 하나님께로 피난시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건을 치실 것입니다. 그 사건이 12~15절에서의 결과로 나타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여! 자리를 뜨라. 하나님이 사건을 치신다.’라고 하는 것이 다윗이 가졌던 왕으로써의 바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쁨은 백곡이 가득해지고 양이 천천과 만만이 될 때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기쁨과 만족의 근원으로 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자리 뜬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크고 작은 사건을 치시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하신 하나님을 관중석에 앉아서 사랑하고 구경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노래하자는 것이 다윗의 신앙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을 우리에게도 허락하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아버지께로 가야할 것입니다. 삶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죽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다윗처럼 관중석에 앉아서 삶에서 하나님께서 사건 치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감사와 찬양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자리를 뜨게 하여 주시옵소서. 선수 되시고 감독 되시는 하나님이 사건 치심으로 삶의 내용이 채워지는 것을 관중석에 앉아서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