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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세상중독에서 하나님 충만으로_태승철

by 태승철 · 18-03-23 10:38 · 7,255
하나님 충만. 하나님 부자. 아니 하나님 재벌. 이것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능력 면이나 사회적인 지위와 역할 면에서는 얼마든지 나의 부족함과 열등함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부자 되기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베드로나 바울 같은 사도들에게도 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이 있습니다. 먼저 지금 내가 세상에 중독된 상태임을 확인하고 해독해야만 합니다.

세상중독에서 하나님 충만으로

(시편 145:1~21)

 

 

1.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2.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4.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5.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6.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권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

7. 그들이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중독에서 하나님 충만으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중독에서 하나님 충만으로

본문을 보면 주제다 싶은 구절이 없어 보입니다.

계속해서 송축하리이다, 찬양할 것이라, 선포하리이다, 노래하리이다라는 말들이 계속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시편을 해오면서 너무나 자주 접해왔던 내용으로, 설교하는 사람 입장을 생각해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감춰져있는 깊은 내용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복음을 알고 생활화하는 사람으로서의 소원은 하나님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부자가 되는 길은 누구에게 양보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보다 더 큰 하나님 부자가 되기를 바란다 하더라도 교만이나 욕심이 아니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스데반 집사님이나 사도들과 같은 신앙을 가질 수만 있다면 최고이겠지만 뒤쳐질 이유도 없습니다. 내가 맡은 사명의 역할이 작을 수는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나 인간적 능력이 열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부자 됨에 있어서는 우리가 뒤쳐질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하나님 충만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일 중요한 것은 중독 상태에 빠져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독(中毒)’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세 가지 뜻이 나옵니다. 첫째는 우리 몸에 독이 들어와서 각 기관이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상태(poisoning, intoxication)입니다. 독살, 식중독 같은 경우를 말합니다. 둘째는 술이나 마약 따위를 지나치게 복용한 결과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게 되는 병적인 상태(addiction)입니다. 약물중독, 술 중독, 마약중독 외에도 요새 유행하는 스마트폰 중독도 이러한 분류일 것입니다. 셋째는 특정 사상이나 사물에 영향을 받는 상태(influence)를 말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사물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판단할 때에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하지만 본인은 정상으로 여깁니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 사상에 중독된 사람이 돈을 가진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면서도 범죄로 여기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타협과 협상을 통해 공동의 선을 향해서 나갈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보자면 구원과 관계된 중독에 대한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직접 하셨습니다. 복음의 요체는 요한복음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14절과 15절을 살펴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평하다가 불 뱀에 물려 독이 펴져서 죽어 가는 상태를 죄로 인한 멸망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앞서 말한 중독의 세 가지 사전적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영적으로 멸망의 중독(poisoning) 상태에 빠져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세상을 살아갈 때에는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고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세상에 중독되는 증세도 나타납니다. 이렇게 멸망의 중독 상태에 빠지면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나타나는 증세가 이 세상의 마약중독 같은 증세가 나타납니다. 셋째로 정상으로 여기는 일상의 모든 생각과 판단과 언행이 실제로는 비정상적인 상태가 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은 중독입니다. 자녀에게 중독된 것입니다. 자녀의 형통이 없으면 금단현상이 일어납니다. 강남의 부모들이 자녀교육을 한답시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중국의 일부 돈 있는 사람들이 비슷한 경향을 띠고 있지만, 세계 어느 나라도 자녀 교육을 돈에 맡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중독 상태입니다. 자녀의 형통에 중독된 상태이기 때문에 모든 생각과 판단이 비정상적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면서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주석서들은 오늘 말씀의 주제를 하나님의 통치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주제는 밖으로 드러난 표현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시 전체의 구절들이 나오게 된 마음 상태를 짐작해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쓰인 시임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시편 중에서도 가장 영화로운 찬양시라고 합니다. 히브리 찬송 시중에서도 본 시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탁월합니다. 유대인 격언에 이 시를 마음속으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자는 내세를 위한 최선의 준비를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정작 살펴보면 모든 내용이 너무나 익숙해서 특이한 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이 하신 일의 기이하심,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과 자비로우심을 찬양하라, 송축하라, 노래하라, 선포하라, 기억하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에도 인용되는 등 기독교 문학과 신학에도 많은 영감을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그 주제가 하나님 충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하나님에 대해 갖게 되는 마음을 계속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찬송한다라는 말이 객관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기림이라면 송축한다라는 것은 보다 주관적입니다. 하나님을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찬송의 단계를 지나서 내 마음에서 더는 나를 위한 바람을 갖지 않습니다. 오히려 축복하는 심정이 되어서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듯이 이러한 상태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로 보이게 됩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도 더 이상 일상적 풍경이 아닙니다. 교인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사실을 교리적으로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관적 체험으로 받아들여 감동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야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늘 시인은 그러한 시점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 계절이 바뀌고 꽃이 피어나는 것을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속해서 일하고 계심에 감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꽃이 피는 것도 그냥 피어난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아기에게 옷을 입히듯이 하나님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또한 하나님이 최우선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셨다는 것을 영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에 둘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만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만이 절대적으로 옮음을 확신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충만의 특징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는 상황이 되더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 옳다고 여겼습니다. 단지 자신이 겪는 고통보다도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의 죄를 그르다고 생각하고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심, 긍휼이 많으심,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인자하심이 시인의 마음을 휘둘러 감고 있습니다. 푸근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에 대해서 선대하시고 사랑을 베푸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부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가까이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다른 사람도 체험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서 하나님으로 충만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자면 하나님으로 미쳐버리게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하나님 중독입니다.

칼 마르크스는 기독교를 비판하며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하였습니다. 혁명을 일으켜서 현실을 바꾸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착취당하고 약탈당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마음을 두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고 하니 아편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러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최후 변론의 장을 자신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전하는 기회로 삼자,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이 바울을 향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라고 했습니다(26:24). 바울이 하나님에 중독된 자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 중독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충만함을 얻을 수 있을까요?

세상 중독으로부터 빠져나와야만 합니다. 세상 중독을 풀 해독제가 필요한데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비상(砒霜)’이라는 독약이 있습니다. 이 비상은 아주 극소량을 쓸 때에는 약으로서 작용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이 받아야 될 모든 저주의 집결지입니다. 십자가 자체는 하나님의 아들을 처참하게 죽이기 위한 독약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중독 상태로부터 벗어나야만 하나님 충만이 이루어집니다. 세상 중독을 해독시키기 위해서는 바로 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중독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중독된 사도 바울을 향해서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은 바울을 향해 네가 미쳤도다라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상 중독의 해독제인 이유는 우리가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은 그 실체가 사랑이 아닌 중독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으로 충만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진정한 사랑이 아닌 중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또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면 이웃을 향하여 기쁨과 만족이 표현되고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웃 사랑의 진실입니다. 이웃 사랑이란 우리가 애써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이웃을 향해 손을 뻗으시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업을 하면 사업 중독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자연을 사랑하자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한 소리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지 않은 사람이 자연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연에 중독된 것뿐입니다. 자연으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얻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중독되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죄는 곧 하나님 이외의 대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1954년에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제임스 올즈(James Olds)와 피터 밀너(Peter Milner)라는 심리학자들이 실험을 했습니다. 쥐의 뇌에 전극을 이식하여 활동을 살펴보았습니다. 본래는 수면을 담당하는 부분에 전극을 이식하려고 했는데, 실수로 쾌감 중추에 전극을 이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실수를 통해 자칭 신경과학 역사상 가장 극적인 사건이 펼쳐졌다라고 말할 정도의 결과가 드러났습니다.

이 쾌감 중추에 자극을 주는 레버를 설치한 상자에 쥐를 넣었습니다. 쥐가 레버를 건드리면 쥐의 뇌에 심겨진 전극에 자극이 와서 쾌감이 느껴집니다. 어떤 쥐들은 한 시간에 7,000번이나 레버를 눌렀습니다. 전기 자극의 쾌감이 너무나 강렬했기에 먹이를 줘도 먹지 않고 물을 줘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발정기가 된 암수를 넣어도 짝짓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레버만을 눌러댔습니다. 새끼를 가진 암컷들도 젖 먹일 생각을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평균적으로 시간당 2,000번 씩 레버를 눌렀다고 합니다. 하루에 48,000번을 레버를 누른 셈입니다. 이 쥐들에게는 레버를 누르는 것만이 전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중독입니다.

자녀의 형통을 통해 기쁨과 만족이 얻어지리라 믿는 부모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쥐가 레버를 하루에 48,000번을 누르는 것처럼 자녀라는 레버를 누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돈을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은 돈을 레버 삼아 누르면서 살아갑니다.

요새 전직 대통령의 재물과 관련된 비리문제로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뉴스에 나오는 내용들의 절반만 사실이라고 가정할지라도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부유했는데 도대체 무엇이 부족해서 비리를 통해서까지 돈을 추구했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마치 쥐가 자극을 얻기 위해 레버를 누르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마귀는 아담과 하와의 머릿속에 이미 전극을 심었습니다. 이 세상 것들에 대한 믿음이 바로 그 전극입니다. ‘돈 벌면 기쁘고 자녀가 형통해야 기쁘고 승진해야 기쁘다라는 믿음이 바로 그렇습니다. 세상 것들이 기쁨과 만족을 준다는 믿음을 심어주자 인간은 마치 실험실의 쥐처럼 돈이든 자녀든 승진이든 레버를 누르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들을 노래하고 찬양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이 중독 현상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교회가 이런 중독이 얼마든지 충족될 수 있다고 교인들을 고무시키면서 하나님께 충성 봉사하라고 합니다. 다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더라도 많은 교회가 사실상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이 아닌 십자가로 중독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십자가로 충만해지는 것이 전부였던 것입니다. 마약중독자는 마약을 맞는 것만이 인생의 과제입니다. 그리고 내성 때문에 점점 더 많이 맞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엄마가 자식에 중독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전직 대통령처럼 돈돈 하며 사는 것을 오히려 당연하게 여깁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말하는 사도 바울과 같은 자들을 중독되었다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중독되지 않으면 세상의 중독은 결코 해독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일 수 없고 중독일 뿐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해진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에 사랑을 나누어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은 더 이상 기쁨과 만족을 세상에서 추구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대상이 나의 몸이든 가족이든 나라든 그 무엇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이제까지 돈에 중독되어 살아왔다면 그 만큼 십자가로 중독되어야 합니다. 자녀로 중독되어 살아왔다면 그 만큼 십자가로 중독되어야 합니다. 건강에 중독되어 살던 사람도 그 이상의 강도와 횟수로 십자가로 중독되어야 합니다. 목사님들도 부흥을 외치던 중독이 해독되기 위해서는 십자가로 중독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세상 중독은 해독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순절 기간에만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바라봄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쥐들이 레버를 시간당 2,000번씩 눌렀듯이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산 사람의 모습을 이미 보았습니다. 바로 솔로몬의 일천 번제입니다. 사람들은 그 제사의 규모와 희생제물의 양을 따지기를 좋아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내용입니다. 솔로몬은 일천 번 자신을 죽인 것입니다. 이제껏 그렇게 세상에 중독되어 살아왔으니 해독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번제단에서의 죽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평생의 과제입니다. 그 이유는 평생 세상을 바라보며 중독되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십자가로 중독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십자가만 바라보면 어떻게 삶이 유지될 수 있느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과 능력과 위엄과 행적을 찬양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다 해나가실 것입니다.

단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세상의 기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순교를 당하신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패한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에서는 항상 기쁨과 감사가 있을 것이고 시험에 들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매사에 십자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 중독은 거룩한 중독입니다. 십자가의 거룩한 중독을 통해서 세상의 악한 중독으로부터 해독되어서 하나님으로 충만한 삶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살면서 세상의 가치를 추구했던 횟수만큼 여생은 십자가로 해독되어서 하나님으로 충만해지고 하나님 재벌로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