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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스타강사'와 '전도자'의 차이_태승철

by 태승철 · 18-05-17 10:15 · 6,264
요즈음 새롭게 소위 뜨는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역사, 철학, 문학, 금융, 자기계발, 취미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타강사'들입니다. 강사는 강사료만 받지만 스타강사는 환호성과 기립박수와 앵콜을 더하여 받습니다. 일회 강연료가 웬만한 샐러리맨의 월급을 웃돕니다. 이유는 한마디로 가려운 데를 긁어주기 때문이지요. 겉보기엔 스타강사와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도서의 전도자입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등 가려운 사람의 다리 긁기가 사명이지요.

스타강사전도자의 차이

(전도서 1:1~3)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오늘 말씀 중심으로 <‘스타강사전도자의 차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스타강사전도자의 차이

요즘 새롭게 뜨는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스타강사입니다. 설민석, 김미경, 김창옥, 유수연, 강성태 등이 역사 철학 문학 금융 자기개발 취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대학이나 학원 혹은 기업이나 각종 단체의 모임에서 강연을 합니다. 본래 강사는 강연을 하는 사람들이기에 강사료를 받습니다. 그런데 스타강사는 환호성과 기립박수와 앵콜도 받습니다. 일회 강연료도 웬만한 샐러리맨의 월급이 우스울 정도로 높습니다. 그 인기가 스타연예인들 같습니다.

이렇게 스타강사들이 굉장한 인기를 누리고 높은 몸값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들의 강연이 재미있고 감동을 주며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청중들의 다양한 측면의 필요를 적절하게 채워줍니다. 재미나 가슴 뭉클한 감동뿐만 아니라 청중들의 삶에 구체적인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쉽게 말해서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인기와 몸값은 높아집니다.

그런데 겉보기에 이러한 스타강사와 아주 비슷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가르침과 깨달음을 전하는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 1절에 언급되는 전도자입니다.

전도자란 솔로몬 왕이 인생의 말년에 갖게 된 자아의식입니다. 솔로몬은 대체 왜 전도자라는 특별한 단어를 썼던 것일까요? 거리에 나가서 노방전도를 했던 것도 아니고, 머나먼 이국땅의 오지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도를 전한 것도 아닙니다. 오늘은 먼저 전도자라는 명칭이 의미하는 것을 살펴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전도자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기 위해서 스타강사와 비교를 해봅니다. 전도자는 스타강사와 비슷한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판이하게 다릅니다. 스타강사가 청중의 가려운 데를 시원하게 긁어주는 사람이라면, 전도자는 청중들의 삶과는 무관한 곳을 긁어줍니다. 다시 말해서 등 가려운 사람에게 다리를 긁어줍니다. 이것을 사명으로 삼은 자가 전도자입니다. 등이 가려워 죽겠다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다리를 긁어주니 오히려 성질이 날만합니다. 전도자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사는 자이고, 사람들을 감질나게 하고 신경질 나게 하는 자입니다.

 

나름대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어온 솔로몬은 말년에 이르러 전도자라는 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 아래에 기록한 것이 바로 이 전도서입니다. 솔로몬의 인생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이라면 일천 번제일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십 세에 왕이 되면서 일천 번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백성들의 문제를 올바르게 판단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한 이 행동을 하나님께서는 무척 기뻐하셨고, 구하지도 않았던 부귀영화까지도 다 허락해주셨습니다.

어떻게 보자면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 왕이 이루어놓은 영토 확장의 토대 위에서 왕국을 거저먹은 사람입니다. 여기에 더해 하나님이 주신 부귀영화까지 거저먹은 셈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세상에 취하게 되고 외교적 차원에서 많은 나라의 여인들과 정략결혼을 하게 됩니다. 결국 이 여인들이 솔로몬 왕의 마음을 빼앗습니다. 열왕기상 113절을 보면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여인들로 인해 우상이 왕궁 안까지 들어오게 되고 이스라엘 선민의 나라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에 대해 징계하심으로 나라의 안정과 평강은 깨어지게 되고 솔로몬의 대적들이 생겨나게 하셨습니다. 학자들은 전도서가 쓰인 시기를 솔로몬이 죽음을 앞둔 말년에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 솔로몬은 회개하는 심정으로 지혜자도 아니고 왕도 아닌 전도자로 일컬으며 이 책을 썼습니다.

일찍이 솔로몬 왕은 백성을 잘 다스리기 위해 지혜를 구할 때에는 왕과 지혜자라는 자아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는 전도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삶을 마치게 됩니다. 전도자는 무엇인가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은 다스리는 왕에서 벗어나 무엇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려고 했던 것일까요?

 

1절을 보면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전도자는 히브리어 코헬레트카할이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카할은 모으다, 소집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소집하는 것입니다. 이에서 파생된 코헬레트는 백성을 소집하여 교훈을 주는 사람, 사람들이 모인 집회에서 말하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스타강사와 비교될만한 요소가 보입니다. 스타강사는 청중들의 부름을 받아 초청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청중을 불러 모으는 자입니다. 여기에 큰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전도자는 청중들이 원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전하고 싶은 말과 전하고 싶은 마음으로 나선 자입니다. 반면에 스타강사는 청중들이 원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전도자는 마음에 무엇인가를 전하고 싶은 간절함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또는 찾아가서 전합니다. 반면에 스타강사는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초청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람들은 전도자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도자가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꼭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전하려고 하는 것이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전해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전혀 무관하게 느끼는 깨달음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전도자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내가 깨닫고 전하기 위해서 움직입니다. 저 사람에게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반면에 스타강사는 청중의 요구를 따라 강연을 합니다. 그래서 스타강사는 모인 청중들의 가려움을 잘 긁어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전도자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는 그들이 원치 않는 소리를 해야만 합니다. 등이 가려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는 다리를 긁어주는 셈입니다. 당연히 부름 받은 사람들은 전도자에 대해서 비판적이 되고 화를 내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이유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2~3절을 보면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사업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는데 전도자가 전화를 걸어서 이 사람을 급하게 부릅니다. 아주 중요한 것을 전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하게 만나러 갔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사업을 성공하므로 흑자경영을 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필요성으로 마음이 충만해있는 사람을 불러놓고는 네가 하는 사업은 다 헛되다라고 합니다.

다른 예로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 있습니다.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서 사회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하려고 합니다. 혹은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룰만한 사람으로 양육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자가 이런 마음을 가진 부모를 불러다 놓고는 네가 자녀를 잘 키우겠다고 하는 마음은 다 헛되다라고 하면 부모 입장에서는 화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자의 마음에는 확신이 있습니다. 사업하는 사람이나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가 가진 마음이 결국은 헛되다는 것을 반드시 깨우쳐주겠다는 생각에서 부른 것입니다. 문제는 이 소리가 불려나온 사람이 바랐던 소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이 매도당한 것으로 여겨 화를 냅니다. ‘왜 자녀 잘 키우는 것이 헛되다는 것이냐? 왜 사업 잘해서 흑자남기는 것이 헛되다는 것이냐?’라고 되물을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의 사역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37~8절을 보면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여긴 사도 바울이 십자가 복음을 전하려 했던 사람들은 전혀 복음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타강사와는 동떨어진 자세로 사람들을 마주대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전하려고 했지만 누구도 십자가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가치에 대해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들 앞에서 그것은 배설물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등 가려운 사람 다리 긁어주기입니다.

 

전도서의 저자인 솔로몬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를 다 누린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가 말년에 전하고자 했던 것은 그가 누렸던 세상의 가치를 얻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왕과 지혜자의 자아의식을 벗어버리고 전도자의 자아의식만을 남겼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얻고자 노력하는 것들이 다 헛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전도서는 신구약 성경 전체의 성격을 가장 강력하게 규정하는 책입니다. 세상의 가치가 헛되다는 것을 전한다는 점에서는 신구약 성경 전체가 전도서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을 적은 책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것을 전하는 책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느끼시는 나의 필요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지 내가 느끼는 필요를 해결하는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12절을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영원한 멸망을 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필요하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필요성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인간들은 하나님이 느끼시는 필요성에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기 나름대로 독자적인 필요성을 느끼며 해결해줄 스타강사를 기다렸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타강사였지 메시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간의 필요성을 충족시킬 이가 메시아라면, 인간의 관점에서 스스로의 필요성을 채울 이는 스타강사인 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타강사로 활동하시지 않았습니다. 인간들이 가려워하는 부분을 긁어주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긁으라고 하신 부분을 긁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이나 기적들의 궁극적인 의미도 이와 같은 부르심이었습니다. 인간이 필요를 느끼는 관심영역에서 기적을 보이심으로써 사람들의 주위를 집중시키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적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는 외침이었습니다.

교회는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교인들은 스타강사와 청중의 관계와는 다릅니다. 스타강사의 강연을 듣기 위해 모인 청중들은 강사를 부른 자들입니다. 선택과 부름 받음의 관계가 반대인 것입니다. 스타강사와 청중의 관계에서는 선택한 이가 청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선민들의 관계에서는 선택하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말씀하신 바가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에 와서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도 명확해집니다. 나의 필요성에 대한 자각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 느끼신 필요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느끼는 나의 필요에 대해서 죽지 않으면 하나님이 느끼시는 나의 필요를 받아들이고 공감할 수 없습니다.

 

저도 이전에는 설교를 하면서 스타강사와 같은 의식을 가졌던 적이 있었고 그로인한 효과도 보았습니다. 영락교회의 부목사로 있을 때에 성경강해를 하였는데 지하실이 콩나물시루처럼 된 적이 있었습니다. 설교 중에 기립박수를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마음에 감동이 되니 그랬겠지요. 저도 그것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친 이유는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잘 긁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설교는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여기시는 것을 전달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하는 전도자의 모습입니다. 등이 가려운 사람의 다리를 긁어주는 격이 되어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참 설교입니다.

그런데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설교학에서 소통(communication)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설교는 결코 인간적 차원에서 소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소통에 치중하다보면 교인은 청중이 되어버립니다. 교인을 청중으로 인식하게 되면 그들의 필요성에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목사는 설교자나 전도자가 아닌 강사가 되어버립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많은 목사들이 그렇게 스타강사의 유혹에 빠집니다.

교인들은 세상에서 느꼈던 필요성을 그대로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옵니다. 그런 교인들에게 맞추어진 설교는 강연이 되어버리고 목사는 강사가 되어버립니다. 전도자는 청중들의 필요에 맞추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느끼시는 필요를 교인들에게 전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표면적으로는 등 가려운 사람의 다리를 긁는 것처럼 여겨지기에 배척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도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갖는 것을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일로 여기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운명적으로 다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은 아무도 이것을 필요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등이 가렵다고 아우성인데 다리를 긁어주니 귀찮고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에 오순절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모인 곳에 성령께서 강림하시자 그들은 그제야 하나님이 필요로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530절을 통해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전도자의 말은 전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보다 더 잘 아실 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하나님이 필요하다 여기신 것을 전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 속에 성령님이 오셔서 전도자의 말을 듣게 하실 때에야 공감하고 받아들임이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 성령님이 인도하실 때에 설교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타강사를 찾듯이 목사님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느끼신 필요를 전하는 전도자가 누구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설교에서 추구해야 할 것은 재미와 감동과 속 시원함이 아닙니다. 내가 느끼는 유익함은 나의 필요성을 기준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유익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스타강사를 찾듯이 목사를 찾기에 대형교회는 미어터지고 소규모 교회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착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삶에서 내가 느끼는 가려움을 긁어주길 바랬기 때문이고 스타강사를 찾듯이 목사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 사이에서 기독교는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세상 종교들과 같이 나의 필요성을 채워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이것을 위해 나타난 사건이 아닙니다.

솔로몬의 전도자의 의식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우리는 겉멋이 들어서 인생은 헛되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진심으로 인생을 헛되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자녀 키우려고 애쓰고, 사업 잘하겠다고 애쓰고, 일류대학에 들어가겠다고 애써서 공부하는 인생이 헛되다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애쓴다고 해서 솔로몬과 같은 세상의 가치를 누릴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가치를 누려본 대표자 솔로몬이 이것들이 헛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르치겠다고 왕과 지혜자의 자아의식을 버리고 전도자가 되기로 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귀하다고 여기는 가치들을 위해 하는 모든 노력이 헛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대체 왜 그렇게 헛된지를 이어지는 내용들이 가르쳐줄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은 스타강사가 아닌 전도자로 오심을 깊이 깨닫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가 느끼는 필요가 죽고 하나님이 나에 대해 느끼시는 필요만이 성취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