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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해 아래 것들의 용도변경_태승철

by 태승철 · 18-05-18 10:22 · 5,999
단독주택을 미용실로 아니면 음식점 건물을 단독주택으로, 등등의 경우와 같은 용도변경을 원하면 건축법 시행령에서 규정된 9개의 시설 군에 대한 기준에 따라 각각 해당 관청에서 허가를 받거나 신고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법 용도변경이 됩니다. 건축시설 관련 사항은 아니지만 아주 치명적인 참사를 가져다주는 불법 용도변경이 우리의 일상에서 버젓이 자행 되고 있습니다. 이 용도변경 하나로 나 스스로 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폐기하고 있지요.

해 아래 것들의 용도변경

(전도서 1:2~18)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5.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8.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해 아래 것들의 용도변경>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해 아래 것들의 용도변경

강릉에 내려와서 십자가 복음방송을 할 때에 아파트 상가 사무실을 임대해서 썼습니다. 그런데 방송만 하는 입장에서는 넓은 공간이 필요 없었기 때문에 계약기간이 아직 1년이나 남은 상태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계약기간이 남았기에 제가 직접 지역정보지에 광고를 내서 세입자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광고를 낼 때에 건물 주인의 말만 믿고 병원이나 학원도 가능하다고 광고를 냈습니다. 결국 영어 학원을 하시는 분이 들어오시게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건물에는 학원이 들어올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주변에 학원이 있었기에 주인도 학원을 해도 되는 줄 알았던 것 같은데 정작 허가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일이 틀어지자 주인이 저를 원망하고, 또 들어오기로 했던 학원에서도 이미 인테리어 공사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저를 원망했습니다. 애초에 잘 알아보지 않고 학원을 들어오게 한 주인에게 책임이 있지만 주인이 워낙 낙담하기에 제가 돈을 더 드렸습니다. 학원 측에서도 결국 공부방으로 등록을 해서 들어왔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나간 것 같았습니다. 건물마다 용도변경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단독주택을 음식점으로 사용한다든지 반대로 음식점을 단독주택으로 사용하려면 허가와 신고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은 전도자로서 인생의 용도변경에 대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결국 모든 사람들이 불법으로 용도변경을 해서 사는 바람에 치명적인 참사를 자처하게 되었음을 가르쳐줍니다. 그 치명적 참사가 바로 헛된 삶입니다.

앞서 보았던 말씀에서 전도자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전도자의 원문은 코헬레트로서 카할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사람을 소집해서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전도자는 꼭 필요한 것을 말하기 위해 사람을 불러 모읍니다. 전도자가 느낀 필요를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도자의 특성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스타강사와 비교하였습니다. 스타강사는 필요에 의해 모인 사람들이 대답을 얻기 위해 초청한 사람입니다. 즉 청중들이 불렀습니다. 반면에 전도자는 사람들을 부릅니다. 전도자가 느낀 필요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자가 느끼는 필요와 사람들이 느끼는 필요는 어긋나기 십상입니다.

전도서의 주제가 헛되다라는 말에 들어있다고 하였습니다. 전도자의 입장에서 느끼고 확신하는 필요와, 사람들이 각자에게서 느끼는 필요가 다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요구하고 충족되길 바라는 필요와 노력이 모두 헛되다는 말입니다. 전도자는 이러한 헛됨에 대해 대칭점에 서서 사람들을 훈계하기 때문에 그 의미가 중요합니다.

헛되다라는 단어는 원문으로 공기, , 증기, 공허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14절에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맨손으로 바람을 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전도서를 염세주의나 허무주의 혹은 비관론처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바라보는 성격이 다릅니다. 염세주의나 허무주의 혹은 비관론은 세상을 보는 관점의 일종입니다. 하나의 세상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성격인 낙관주의이나 긍정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사실 그 자체를 다루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또 그것이 헛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수고하는 이유는 필요를 채우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필요를 느끼는 범위가 해 아래에서라는 것입니다. 해 아래에 있는 것들 중에서 필요를 느끼고 이루면서 사는 삶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범위가 해 아래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라는 말씀에 해석을 추가하여 의역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전하고 싶어서 백성들을 불러 모으는 전도자가 이르되, 사람들 각자가 느끼는 필요를 따르고 얻기 위해 애쓰며 살고 있지만, 모두가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되다. 즉 자신들이 느끼고 확신하는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수고하지만 그 필요로 하는 것이 해 아래에 있는 것이라면 그 모든 노력은 헛될 수밖에 없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갖가지 필요를 느끼며 살아갑니다. 크게는 성공과 형통입니다. 세분화하자면 건강 돈 명품 집 직장 승진 가족의 안정 부강한 나라 등 수두룩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결국 모두 해 아래에 있는 것이고, 해 아래에 속한 것이기에 실제로 얻어도 헛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해 아래에서 추구하는 필요들이 정말로 헛것이냐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세상 사람들이 침 흘리며 좋아하는 부귀영화를 비롯한 모든 가치들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한 분야에서도 원하는 필요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모든 복과 가치를 실제로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 솔로몬이 해 아래에 있는 가치들과 그것을 얻기 위한 노력을 헛되다고 폄하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솔로몬의 위치와 위상을 생각하면 세상에 대한 폄하야말로 잘못된 말 같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반복하여 말씀드렸듯이 사람이 필요를 느끼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은 공백상태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필요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필요를 느끼는 범위와 영역입니다. 해 아래에 있는 것들의 용도를 변경하였기 때문에 헛됨에 대한 오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쥐가 들끓는 마을에서는 쥐를 사냥하는 고양이가 칭찬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고양이를 사냥터에 데리고 가면 고양이는 절대 인간이 원하는 대로 사냥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혹은 고양이를 데려다가 어물전을 지키도록 하면 고양이는 결코 주인이 원하는 대로 생선을 지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선을 뜯어 먹으며 못쓰게 만들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가치가 헛되게 여겨지는 이유와 같습니다.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으나 마음을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 용도변경 되면서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우리나라에서 오리털파카가 아주 잘 팔립니다. 그런데 이것을 열대지방에서 팔려고 하면 용도에 맞지 않기 때문에 팔리질 않습니다. 이처럼 같은 대상도 사용하는 용도가 잘못되면 가치가 없어집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해 아래에 있는 것들이 대체 어떻게 불법적으로 용도변경이 이루어졌다는 것일까요? 그 해답이 7~8절에 나타납니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강물이 바다를 채우지 못하고,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않는다는 말에 해답이 있습니다.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은 성전에 마음을 비추어 볼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성전의 모습은 사람의 마음의 구조와 같습니다. 지성소에 법궤가 있듯이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아야만 합니다. 솔로몬은 사람의 마음은 본래 하나님이 들어와 계실 자리임을 알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해 아래 있는 것들을 필요로 삼습니다. 이것들이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 용도로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공백은 바다와 같아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솔로몬처럼 부귀영화가 초절정에 다다른 사람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재물의 용도는 마음을 채우기 위한 용도가 아닌데, 불법으로 용도 변경하여 마음을 채우기 위해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맨손으로 바람을 붙잡는 것처럼 헛되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부자로 일컬어지는 솔로몬이 재물로는 마음을 채울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재물은 마음을 채우는 용도가 아니며, 왕의 자리도 마음을 채우기 위한 용도가 아닙니다. 명예나 인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근면성실하게 살아가는 이유는 필요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필요가 채워지는 것은 곧 마음이 만족하게 됨을 뜻합니다. 마음이 만족하지 않는 한 무언가를 필요로 하고 추구하게 됩니다. 반대로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마음이 만족하다면 추구하거나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자의 자아의식을 가지고 이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업하는 사람에게 돈 벌어봐야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아픈 사람에게는 아무리 건강해봐야 마음에 만족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대통령이 되려는 정치인에게는 권력을 얻어 보아도 마음에 만족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이 전도자의 소리가 다리가 가려운데 등을 긁어주는 것처럼 쓸모없게 들립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전하는 설교를 듣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자신들이 느끼는 필요와 관계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이로 인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사람들은 이 말들을 귀담아 들을 것입니다. 똑같은 말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무시하고 어떤 사람은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전환점으로 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44절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믿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그들에게 과연 들어갈까 걱정할 필요도 없으며, 많은 사람들이 들을 것을 기대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듣게 하실 사람은 들을 것이고 설교를 통해서 그러한 사람을 찾아내면 되는 것입니다.

 

14절의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는 말씀이 이제 이해되실 것입니다.

결혼해서 원활한 부부관계를 갖겠다는 바람조차 헛됩니다. 헛된 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해 아래입니다. 해 아래에 있는 것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헛되게 용도변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애국심이나 가족에 대한 사랑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 채움을 위해서는 해 아래에 있는 것은 모두 무용지물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폐기처분되어야 될 무용지물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불법으로 용도변경을 했기 때문에 폐기처분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배설물이 되어버렸습니다.

배우자는 하나님으로 인해 생겨난 기쁨과 만족을 표현하는 대상일 뿐, 기쁨과 만족을 얻게 해주는 대상일 수 없습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도 하나님이 정하신 곳에 쓰여야 할 것인데, 멋대로 용도변경을 해서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한 필요로 삼았기에 폐기처분해야 될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폐기처분해야 될 쓰레기가 독이 되었기에 벌면 벌수록 독이 해치게 됩니다.

재벌들이 돈이 많다고 해서 만족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거짓과 사기이며 법을 어기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 정도면 누구보다 정직하게 살아도 풍요로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누구보다도 비열하게 행동합니다. 재벌들이 몇 조씩의 재산을 가지고도 계속해서 탈세를 하는 것은 그 재산이 마음의 만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반증일 수밖에 없습니다. 몇 조를 가지고도 만족하지 못했기에 탈세를 해서라도 더 모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세금을 내고 남은 돈이 만족을 주지 못한다면 탈세한 돈도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솔로몬이 전도자가 되어서 아무리 얘기해도 믿지 않습니다. 솔로몬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기쁨과 만족을 위한 마음 채움입니다. 즉 만족과 기쁨을 줄 수 있는 마음의 대상을 찾으려면 해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해서 말을 하고 손과 발을 움직여도 마음의 공백에서 발생하는 필요감 때문에 합니다. 그런데 해 아래의 것들을 대상으로 삼으면 결국 재벌이 이미 가지고 있는 돈도 만족하지 못해서 탈세까지 해서 더 벌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짓을 평생하게 됩니다. 불법으로 용도 변경했기 때문입니다.

 

해 아래에 있는 것들은 어떤 용도입니까?

솔로몬 당시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번제단에서 죽어야 합니다. 해 아래에 있는 것들을 필요로 느끼는 내가 죽습니다. 이것들은 가져봐야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잘 되지 않으면 걱정하는데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해 아래에 있는 것들을 필요로 하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죽습니다.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해 위로 올라가셨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내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용도가 되어 주셨습니다. ‘나만이 너희를 채울 수 있고, 나만이 너희에게 진정한 필요 대상이다라고 당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해 아래에 있는 것들은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해 아래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본래의 용도대로 하나님의 제2의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주관하심과 하나님의 뜻이 임하면서 제2의 창조가 일어나야 될 것들을 내가 불법용도 변경함으로서 용도폐기가 되었습니다. 용도폐기된 것으로 마음을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배설물처럼 독이 되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용도변경해서 내 마음을 채우려고 하면 관계가 좋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인생에 독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 채움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용도로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면 배우자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최선의 올바른 뜻과 섭리가 나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배우자를 향한 하나님의 제2의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의 용도는 내 만족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내 만족의 용도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자식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주관하심이 제2의 창조로 나타납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해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제2의 창조를 위해 준비되었습니다. 내 멋대로 용도 변경하므로 폐기처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2의 창조를 나타내실 수가 없기 때문에, 전도자는 헛되다라는 말을 이렇게 반복하는 것입니다. 불법으로 용도변경하려는 마음이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끊임없이 죽어야만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해 아래 있는 것들을 필요로 하는 마음이 끊임없이 죽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본래의 용도대로 하나님의 제2의 창조가 이루어지는 대상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