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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천년 왕국의 왕이냐, 세상 나라 노예냐_태승철

by 태승철 · 24-03-07 09:05 · 195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천년 왕국의 왕이냐, 세상 나라 노예냐>의 줄거리 :

가정과 직장 등 우리가 매일 삶을 영위하는 모든 생활 현장은 천년 왕국의 영토가 되었습니까? 천년 왕국을 사시면서 어린 양 그리스도 예수님과 더불어 왕 노릇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이 세상 나라의 노예로 살고 있습니까? 천년 왕국의 왕은 하늘로 충만하여 말과 행동을 발산하면서 삽니다. 반면에 이 세상 나라의 노예는 오감으로 접하는 이 세상에 오직 종속적으로 반응하며 말하고 행동할 뿐입니다.

 

천년 왕국의 왕이냐, 세상 나라 노예냐

 

(요한계시록 20:1~6)

 

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3.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본문은 계시록 중에서도 논란이 가장 심한 부분으로 천년 왕국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천년 왕국의 왕으로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세상 나라의 노예로 살고 계십니까?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 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제목과 연관하여 천년 왕국의 왕으로서의 삶과 세상 나라의 노예로서의 삶의 특징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천년 왕국의 왕으로서의 삶은 하늘로 충만한 상태에서 말과 행동을 이 땅에 발산하며 삽니다. 반면에 세상 나라의 노예로서의 삶은 하늘과 연결이 끊어진 상태에서, 육체의 오감으로 접하는 세상에 대해 반응하며 삽니다. 세상 나라의 노예의 삶이란 세상에 종속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년 왕국의 왕들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대상과 사건과 문제가 어떠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반응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반응한다면 세상에 종속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하늘의 충만함으로 발산되는 말과 행동을 합니다. 그 대상과 상황과 사건과 문제를 보고 계신 하나님의 뜻이 발산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의 모습을 공생애 현상이라는 표현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공생애 현상은 이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는 언제나 공생애를 살 수 있나?’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공생애 현상은 쉽게 말해서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아내는 전업주부이고 남편은 직장에 나가는 부부가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남편은 출근하기에 앞서 아내와 가정이라는 환경을 먼저 접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편은 심기가 불편한 아내와 접촉한 마음을 가지고 회사에 나가게 됩니다. 그러자 회사에서 별일 아닌 것으로 짜증이 납니다. 반대로 아침에 아내와 접촉한 마음이 좋은 상태였다면 회사에 나가서 문제를 마주해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갑니다. 공생애 현상의 원리가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공생애 현상은 아침에 일어나 가족을 만나는 것보다 하나님을 먼저 만나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생겨난 하늘 기운으로 말과 행동을 발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내게서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공생애 현상을 염두에 두면 천년 왕국의 왕으로 사는 것과, 세상 나라의 노예로 사는 것의 차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몸으로 만나는 세상에 대해 마음이 반응한다면 세상 나라에 종속된 노예입니다. 반대로 몸으로 만나는 세상의 대상이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먼저 만난 상태에서 세상을 향하여 말과 행동을 발산한다면 천년 왕국의 왕입니다. 왕은 세상에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자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말만 듣는 사람을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본문에서 논란이 많은 구절이 2~3절입니다.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만국이라고 번역된 원문을 보면 지상의 모든 나라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라들이라는 복수형입니다. 그러면 나라들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천년 왕국이라는 말과 연관하여 나라들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나라는 한국, 미국, 일본, 중국, 독일, 프랑스 등의 국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복수로 쓰인 나라들과 천년 왕국이 의미하는 나라는 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한 사람이 태어날 때는 몸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몸을 통해 가족관계로부터 시작하여 수없이 많은 관계들을 맺습니다. 그 관계들 전체가 하나의 나라입니다. 이 지상에 80억 인구가 있다면 80억 개의 나라가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의 규모가 만만치 않습니다. 관계의 연관성을 생각하면 몸을 통해 생긴 나라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국가보다도 더 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몸을 통해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한국에도 있고, 미국에도 있고, 유럽에도 있고, 호주에도 있고, 남미에도 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맺을 수 있는 관계의 나라는, 지상에 있는 행정 체제로서의 국가의 개념보다 크면 컸지 절대 작지 않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한 사람이라는 존재의 중요성과 의미와 크기와 범위를 너무나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나라는 몸이 있기 때문에 생긴 관계들로 이루어진 삶의 영역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천년 왕국이 무엇이냐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먼저 천년 왕국과 관련된 일반적인 해석들에 대해 짚고 넘어가 보고자 합니다. 천년 왕국은 해석 방법에 따라서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의 세 가지로 나눠집니다.

전천년설이란 예수님의 재림이 임한 다음에 어린 양과 결합한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지상에서 왕 노릇하는 천년 왕국이 있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후천년설은 반대로 예수님의 재림 전에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지상에서 왕노릇 하는 천년 왕국이 있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전천년설이라는 이름으로부터 천년 왕국이 재림 전에 나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재림을 기준으로 볼 때 재림이 천년 왕국 앞에 나오면 전천년설입니다. 마찬가지로 재림이 천년 왕국 뒤에 나오면 후천년설입니다. 무천년설은 천년 왕국은 따로 없으며 예수님의 초림 때부터 재림 때까지 전체가 천년 왕국이라는 해석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천년 왕국이 어떤 것이라고 여겨집니까? 많은 사람들은 천 년이라는 단어와 왕국이라는 단어에 신경을 집중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이러한 표현이 등장했는가에 대해 앞뒤 맥락을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전천년, 후천년, 무천년 같은 이야기가 나올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이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천 년 동안 어린 양 신부들이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을 할 때, 무저갱에 갇혔던 마귀가 잠시 놓이리라고 합니다.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신 뒤에 천 년을 다스렸는데 그 뒤에 마귀가 잠시 풀려날 것이라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으로는 예수님이 이미 재림하신 뒤에 마귀가 다시 풀려나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우리는 재림이 임하면 물질로 이루어진 육체로 이루어진 시간과 공간의 세계가 없어진다는 것을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도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셨고, 베드로후서에도 언급되었습니다. 성경 전체의 증언이 재림 때가 되면 모든 물질이 녹아 없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 이 땅에 천 년 동안 다스리실 나라가 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고, 마귀가 다시 놓여나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후천년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이 언제일지 모르는데 그전에 정확히 천 년을 재서 예수님과 성도들이 이미 다스리고 있다면 재림시간을 계산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도둑같이 임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깨어있을 필요성이 없습니다. 재림 전에 천년 왕국이 임하는 것이라면 그전에 살던 사람들은 본문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앞서 우리는 어린 양과 완전한 결합을 이루는 잔치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렇게 결합함에 이어서 나타나는 백마 탄 자로 상징되는 공생애 현상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이해가 없다면 천년 왕국에 대해서도 제대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아기로 오셨을 때부터 재림하실 때까지가 천년 왕국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천년 왕국은 어린 양과의 완전한 결합이 있은 뒤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자면 천년 왕국이란 공생애 현상이 나타날 만큼 어린 양과의 결합이 완전히 이루어지고, 그때부터 내 몸이 죽을 때까지의 기간이 됩니다. 공생애 현상은 내 마음이 예수님과 결합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내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 있게 됩니다. 그럴 때 공생애를 사셨던 예수님이 내 몸을 통하여 다시 공생애를 이어가시며,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서 실현해 나가시는 나라가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과의 완전한 결합으로부터 이 몸이 죽을 때까지의 기간이 예수님과 더불어 왕노릇 하는 천년 왕국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같은 이야기는 나올 가능성조차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기준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해 오고 있습니다. 앞에서부터 있었던 이야기를 순차적이고 논리적으로 적용해 보면 전천년, 후천년, 무천년이라는 이야기는 나올 수도 없습니다. 공생애 현상이 시작되어 육체가 죽어서 끝날 때까지 성도가 예수님과 더불어 왕 노릇하는 것이 천년 왕국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왕국인 이유는 몸을 중심으로 맺어진 관계의 영역 전체를 하나의 나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 어린 양과의 결합이 온전한 사람이 백 명이 있다면 백 개의 천년 왕국이 진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다 한 명이 죽는다면 구십구 개의 천년 왕국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어려운 상징들이 줄줄이 등장하기에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 어려워 보일 뿐이지 십자가를 기준으로 해석한다면 그 내용은 무척 논리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천년 왕국 후에 마귀가 잠깐 놓이리라는 말씀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읽지 않은 7~8절을 보면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옥은 무저갱입니다. 사탄이 무저갱에 있다가 잠깐 놓인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다룰 7절 이하의 내용과 연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천년 왕국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깊게 해보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는 천년 왕국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천년 왕국은 어린 양과의 완전한 결합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공생애 현상이 시작되고 내 몸이 죽을 때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천 년은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제 어떤 분과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당신이 아는 70이 넘은 은퇴하신 장로님이 십자가 복음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게 되어서 감격스럽고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이분은 사십 년이 넘도록 장로로 봉직하였고, 그야말로 일평생을 교회에서 지내다시피 했는데 십자가 복음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셨다는 내용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분이 공생애를 사시는 기간은 천 년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나서 열다섯 살에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여 어린 양과 결합한 청소년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 청소년도 천 년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천 년이라는 숫자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저는 성경학자들의 해석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서 우리는 7장에서 십사만 사천 명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성경학자들 또한 이 숫자에 대해 절대적인 사람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의 속성을 가리킨다는 것에는 대부분 동의합니다. 또한 육백육십육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숫자대로의 특정한 대상이나 사람 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학자들도 이러한 이해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는 사람들이 천년 왕국에 대해서는 천 년을 문자 그대로의 숫자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저로서는 앞뒤 생각이 왜 이렇게 이질적이고 모순적 형태를 띠는지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천 년은 공생애를 질적으로 가리키는 상징어입니다. 공생애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사만 사천에 대해 말씀드릴 때도 언급했습니다만 3은 하늘의 완전수이고, 4는 땅의 완전수입니다. 7도 완전수이듯 10은 충만함을 가리키는 만수(滿數)입니다. 그리고 1,00010을 세 번 곱한 수로, 충만함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숫자입니다. 따라서 천년 왕국이란 정말로 천 년이라는 햇수 동안만 왕국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천 년이라는 숫자로 상징되는 질적인 성분을 갖고 있는 나라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천년 왕국은 땅에서 이루어집니다. 천 년으로 상징되는 질적인 성분은 바로 하늘로 충만함을 가리킵니다. 땅에서 살 때 제일 큰 문제는 우리 마음이 세상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고, 몸으로 접촉하는 것들이 들어오기 쉽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세상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으로 가득 차면 세상에서 보고 듣는 대로 말과 행동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에 종속되어 노예로 사는 것입니다. 왕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삶입니다.

천 년이라고 표현을 한 이유는 이 땅에서 오감이 열린 몸을 입고 살고 있지만, 이 사람은 특이하게도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삶을 삽니다. 그 마음이 어린 양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올라간 마음에는 하늘 기운이 가득 찹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으로 가득 찹니다. 마음이 세상으로 가득 차지 않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 몸이 움직일 때는, 그 마음을 채우고 있는 하늘의 기운이 말과 행동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천 년이란 바로 하늘로 충만함이 질적인 성분이자 속성임을 가르쳐주는 상징어입니다.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국에서 일어나는 삶의 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가 하나님의 예정하심의 속성인 것과 마찬가지이고, 육백육십육이 어린 양을 등지고 하나님과 끊어진 삶의 질을 표현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천년 왕국이란 어떤 특별한 삶의 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이 왕국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몸이 있기 때문에 맺어진 관계들이 어마어마한 범위로 뻗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년 왕국을 살게 되면 그 조건은 예수님과의 결합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완전히 죽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상태에서 하늘로 충만해집니다. 그 이야기가 4~5절에 자세히 언급됩니다.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이는 첫째 부활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목 베임을 당한 자들과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자들이 사는 것을 첫째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목 베임에 대해서도 주석에서는 순교자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첫째 부활이라는 표현과 연관하여 생각해 본다면 그런 뜻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죄와 저주 속에 갇혀서 하나님에 대해 끊어진 상태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죽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은 인간이 아닌 짐승과 같은 존재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있는 가축이고 짐승인 상태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일어나는 첫째 부활이란 우리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감을 통해 하나님과의 끊어짐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짐승에서 사람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목 베임을 당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짐승의 탈을 쓰고 살던 존재들이 어린 양 예수님과 결합합니다.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라고 했습니다. 목 베임이란 어린 양 예수님과 결합함으로써 가축으로 살던 내가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끊어져 짐승처럼 살던 자가 하나님과 연결되면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다른 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성도만 먼저 부활한다고 해석하지만, 본문에서 그러한 표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28~29절에서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재림 때 생명의 부활이든 심판의 부활이든 부활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만 먼저 부활한다고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십자가 복음을 생활화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성경을 해석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들의 성경 해석이란 말씀에 대한 해석이 아닌 이 세상 필요에 따른 합리화일 뿐입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지 않는다면 마음에 세상이 들어와서 담긴 상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생기는 필요를 따라 성경을 해석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을 자기 필요와 입맛에 맞춰서 이해하고 있을 뿐이지 성경 자체에 대한 올바른 해석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요한계시록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교리로 아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생활 현장에서 십자가는 생활화되어야만 합니다. 남편 앞에서, 아내 앞에서, 자녀 앞에서, 부모 앞에서, 형제자매 앞에서, 이웃 앞에서, 직장에서, 시장에서,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알지 못한다면 성경은 한 구절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담고 있는 짐승의 상태에서 짐승의 필요에 따라 멋대로 해석할 뿐입니다.

 

이어서 6절을 보면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사망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첫째 사망이란 몸이 죽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은 영이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영은 지옥에 들어가도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망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몸이 살아있어도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를 사망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다가 몸이 죽는 것이 첫째 사망이고, 심판을 받아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그 심판의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살펴볼 것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진 짐승으로 살다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서 살게 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제사장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 땅에서 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하늘을 대표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다시 천 년이 언급됩니다. 이 천년은 기간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질적으로 하늘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 노릇이 되는 이유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에 의해 반응하며 말하고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발산되는 내용만을 말과 행동으로 옮기며 사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어떤 상황에도 굴복하지 않으며, 어떤 조건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예수님과 더불어 일체된 상태에서 생기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발산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왕 노릇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천 년의 삶이 다 끝나는 때에 사탄이 다시 놓인다는 것과, 사탄이 땅의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그들을 모아 싸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이 전쟁은 아마겟돈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들이 망하고 나서 예수님의 재림과 더불어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이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천년 왕국에 왕 노릇을 하며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이 세상 나라에 노예로 살고 계십니까? 아무쪼록 여러분은 천년 왕국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 나라의 노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심장 옆에 꽂아두는 심정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 나라를 종식시키고 천년 왕국을 온전히 이루는 은혜의 사람들이 되십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가 십자가를 내 생애의 유일한 붙잡음의 대상으로 확정한 자들로서, 어린 양과의 온전한 결합을 이루게 해주시고, 공생애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를 붙잡는 강도가 일 년 365일 쉬지 않고 강화됨으로써 더 이상 세상 나라의 노예로 사는 기미조차 온전히 제거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