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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새 예루살렘 성, 크고 황홀한 어우러짐_태승철

by 태승철 · 24-03-16 07:17 · 224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새 예루살렘 성, 크고 황홀한 어우러짐>의 줄거리 :

천국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허락받은 수많은 성도가 동시에 낯설고 물 설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혼잡스럽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천국에서는 정말 놀랍도록 완벽하고 아름다운 거대한 어우러짐이 벌어집니다. 모든 성도가 천국에서 하나님과 어린 양을 중심으로 거대하고 아름다운 조화 속에 어우러짐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이 어우러짐 안에서의 삶이 맛보기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 성, 크고 황홀한 어우러짐

 

(요한계시록 21:9~17)

 

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14.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15.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 자를 가졌더라

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17. 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본문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새로운 터전으로 허락받은 수많은 성도가, 예수님의 재림과 백 보좌 심판 이후 동시에 천국으로 들어가 살게 되는 장면이 계시됩니다. 그런데 생각하기에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은 낯설고 물 설은 곳일 수 있습니다. 아는 바도 없고 경험도 없는 상태로 천국에 들어가서 앞으로 살아야 될 삶의 터전을 확보해야 되고 찾아야 하니 꽤 혼잡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혹은 세상적인 언어로 사고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충분히 그러한 예상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러한 낯섦과 혼잡 대신에 놀랍도록 거대하고, 황홀하고, 아름다우며 조화와 균형이 완벽한 어우러짐이 발생하고 있음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10절에는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성이 어린 양의 신부로 비유되었습니다. 여기서 새 예루살렘 성은 무엇이고, 천국은 무엇이며, 우리가 들어가서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에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천국 안에 새 예루살렘 성이 있는데, 그 새 예루살렘 성이 어린 양의 신부로 비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새 예루살렘 성이라고 표현된 이유는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던 당시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당시 사람들의 언어 안에서 삶의 터전은 언제나 성이었습니다. 낮에는 성 밖에 나가 농사를 짓더라도 밤이 되면 성 안으로 들어와야 했고 장터가 열리는 곳도 성 안이었습니다. 이러한 의도에서 사도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언급했던 삶의 터전을 새 예루살렘 성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어린 양과 완전한 결합을 이룬 성도 전체가 어우러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새 예루살렘,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개념이 보다 명확하게 이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새 예루살렘 성은 성도를 벽돌로 삼아 쌓아지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어린 양과 결혼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 오감을 통하여 세상을 실감함이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을 실감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눈으로 마주 보듯이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실감하는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는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실감이 반영됩니다. 그러한 사람이 이 세상에 한 명 태어난다는 것은 새 예루살렘 성을 이루는 벽돌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재림 때 태어날 사람을 마지막 벽돌로 삼아 완성될 새 예루살렘 성의 벽돌이 하나씩 하나씩 쌓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정혼하고 결혼하는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세상 실감 죽이기를 계속 반복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 실감이 확장되어 가게 되고, 나의 분량이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 성을 쌓는 데 기여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예수님 재림이 임하고 백 보좌 심판이 끝나고 나면, 이 땅에서 십자가로 세상 실감을 죽이고 하나님 실감을 확장해 온 사람들 전체가 어우러지는 거대한 한 판의 삶이 만들어집니다. 어우러짐이라는 단어를 통해 새 예루살렘 성이 왜 어린 양의 신부로 묘사되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1절 이하에는 우리가 실제로 천국에 가서 살 때 느낄 수 있는 내용들이 마치 맛보기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천국에서 성도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을 계시를 받아 이 땅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성의 빛이 보석 같고 벽옥 같다고 했습니다. 빛이 보석 같고 벽옥 같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마음에 닿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내 마음에 빛이 닿는 곳마다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들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이아몬드나 사파이어나 에메랄드나 루비 같은 각종 보석들을 귀하게 여겨서 선물로 받으면 소중하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은 육체가 아닌 신령한 몸을 입고 사는 사차원의 세계입니다. 세상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영인 마음에 하나님의 빛이 닿을 때마다 보석을 받는 것처럼 좋다는 것입니다. 좀 더 실감나게 표현하자면 날씨 좋은 날 나가서 햇볕을 쬐면 눈이 부셔서 손으로 해를 가립니다. 그러면 손에 해의 따듯함이 느껴집니다. 손이 햇볕을 받아 따스함을 느낄 때마다 돈이 생긴다고 상상해 봅니다. 백 달러짜리 지폐가 마구 떨어집니다. 나가서 햇볕만 쬐면 백 달러짜리, 오만 원짜리 지폐가 떨어져서 쌓입니다. 너무 황당무계한 이야기지만 어쨌든 기분이 무척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면 이러한 황당무계함이 실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쐴 때마다 마치 손에 돈다발이 생기는 것처럼 좋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쐴 때 ! 좋다!’라고 느낀 후에도 그 좋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계속 비춰지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쐬면서 ! 좋다! 좋다! 좋다!’라는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 수정같이 맑다고 했습니다. 햇볕이 닿을 때마다 손에 돈다발이 툭툭 떨어진다면 세상 사람들은 무척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을 때의 느낌은 단지 좋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수정같이 맑다는 것은 그 빛이 나를 관통합니다. 빛이 나를 뚫고 나가서 휘감아버린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좋음에 휩싸이게 됩니다. 나의 영인 마음의 세포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빛이 스며들어서 관통합니다. 내 세포 하나하나를 채운 빛은 뿜어져 나와서 마치 누에고치를 하얀 실크가 감고 있듯이 나를 휘감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새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가 어우러짐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 각자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모습만으로는 천국에서 내 영인 마음이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를 다 표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사도 요한은 마음에서 성령의 감동을 통해 느끼는 천국의 삶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고 열두 천사가 그 문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마다 열두 지파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옛날 성에는 성문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에서 나가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검문했습니다. 이것은 성의 존재 이유와도 닿아 있습니다. 성은 외부로부터의 침공을 막고 내부에서 안전하게 살기를 원하는 열망에서 쌓았습니다. 옛날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성이 곧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크고 높은 성곽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라는 말에 담겨진 사람들의 의도와 열망을 생각해 보면 크고 높은 성곽은 난공불락의 상징입니다. 이 난공불락의 성을 쌓았다는 것은 마음에서 평안이 깨질 모든 요소가 다 제거된 상태임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크고 높은 성곽이란 안전함과 편안함이 온전히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어린 양과의 온전한 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30%, 또 어떤 사람은 50%, 60%, 70%를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라도 어린 양과의 결합을 이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을 어린 양과의 결합과는 무관하게 세상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단 하루도 마음의 온전한 평강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끊임없이 변수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주권에 의해서 이 세상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세상에 마음을 붙인 상태에서 편안하고자 합니다.

가족들에게 왜 너는 나에게 편안함을 제공하지 않느냐?’라고 불평을 합니다. 매일 마주하는 가족들이 나의 편안함의 토대가 되어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와는 다릅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형통해서 마음이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부모가 원하는 방향과 목적지를 향해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배우자를 바라볼 때 편안함을 기대하지만, 이 세상에서 나에게 편안함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애초에 없습니다. 가족뿐만이 아닙니다. 친구가 내게 편안함을 줄 수 없고, 넉넉한 재정 상태가 편안함을 줄 수 없습니다. 재벌이라고 해서 마음 편하게 살지 않습니다. 수출이 늘었다 줄었다 하는 바람에 초조해하고, 주식이 오르락내리락 편할 날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살면서 진정으로 마음이 편하고 평강 가운데 있었던 시기를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크고 높은 성곽이란 그러한 평강의 천 배를 상상해 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천년 왕국의 1,000이라는 숫자가 충만함을 뜻하는 10의 세제곱이었듯이, 크고 높은 성곽이란 천 배의 평강과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어떤 변수가 생기거나 사고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평강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세상 상황에 취하면 취할수록 평강이 생기기는커녕 인간성이 망가져 버립니다. 그나마 삶의 환경이 편안하지 않기에 마음이 조금이라도 낮아지고 겸손해질 수 있을지언정, 삶의 환경이 편하기만 하다면 못돼먹은 괴물 같은 인격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크고 높은 성곽은 성도들의 어우러짐을 상징하는 새 예루살렘 성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을 중심으로 어우러지고 있는 조화 속에서는 각자가 하나님의 빛으로 둘러싸이는 황홀함 속에 있음은 물론이고, 각자가 관통하는 하나님의 빛을 쐬면서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의 좋음을 느낄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빛 앞에서 돈이 툭툭 떨어지는 것과 같이, 빛만 쬐면 돈다발이 떨어지는 상황을 너무나 좋아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한 좋음이 나를 휘감고 있는 상태에서 사람들과 어우러지는데 그 누구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천국에는 내 마음의 안정을 깨는 요인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변수가 발생하지 않을 때 인간성이 괴물이 되어버리는 것과는 반대의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빛을 쐬는 사람들끼리 어우러지는 한 판 삶의 현장에서는 안정감이 날마다 새롭게 갱신되고 갱신되는 편안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어서 열두 문을 열두 천사가 지킨다고 했습니다. 성을 자유롭게 들락거릴 수 있는 사람은 성 주민입니다. 열두 문이 있다는 것은 하늘로 올라가 함께 어우러지고 있는 성도의 신분과 출신을 말합니다. 그 문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 쓰여 있다는 것은, 크고 황홀한 어우러짐 속에 들어와 있는 성도 각자의 출신 성분이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임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는 높은 사람도 있고 낮은 사람도 있고, 큰 자도 있고 작은 자도 있으며,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으며, 배운 자도 있고 못 배운 자도 있고,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습니다. 또한 잘생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못생긴 사람도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때는 그 모든 육체가 있음으로 생기는 천차만별이 없어집니다. 거대하고 황홀하고 아름다운 한 판의 어우러짐 속에 들어와 있는 모든 성도는 그 출신 성분이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이 세상에 있기 전에 예정하셔서 당신의 아들로 삼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열두 문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쓰였다는 것은 이 출신 성분을 DNA처럼 받고 있는 자들이 모였음을 의미합니다.

성문은 정체성을 묻는 곳입니다. 성문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자들은 성의 주민이어야만 합니다. 천국의 새 예루살렘 성으로 상징되는 크고 황홀한 어우러짐 속에 있는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이 세상에서 육체를 입고 있을 때 내게 주어진 조건과는 아무 상관없이 오로지 창세 전에 하나님의 예정 속에 내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예정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받은 계시록 속에서 끊임없이 강조되는 것은 싸워서 이기라는 요청입니다. 이 요청대로 예정을 받은 자라면 육체의 오감을 통해 생기는 세상 실감을 어린 양의 십자가를 통해 계속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실감을 세상 실감이 이기지 못하도록 이를 악물고 싸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들이 바로 예정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명심하시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13절을 보면 열두 문에 대한 묘사가 이어집니다.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동서남북으로 세 개의 문이 있습니다. 이 동서남북의 형태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아들들이 어우러질 때의 기본 패턴으로 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어우러짐은 동서남북의 기본 형태를 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민수기 2장부터 언급되어 온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머물 때는 동서남북 진영을 짜고, 행진할 때도 동서남북 진영대로 순번을 짜서 움직였습니다. 동서남북이라는 네 방향은 성도가 어우러질 때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기본 패턴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민수기에 나왔던 그 이야기가 계시록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아니 거꾸로 되어야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아들들 각자가 어린 양과 결합함에 따라 새 예루살렘 성에서는 벽돌이 쌓여갑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을 구상하실 때는 동서남북으로 문이 세 개씩 나 있는 정방형의 성으로 계획하셨습니다. 그 계획이 반영된 땅의 모습이 민수기에서 선민들이 광야에서 동서남북으로 진을 치는 형태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동서남북으로 진을 친 이유는 천상의 어우러짐을 앞당겨 실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하나님을 실감하고 어린 양을 붙잡고 있다는 그 하나의 조건만 갖춘다면, 육체의 조건에 상관없이 어우러짐을 이룰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너와 내가 다르지만 어우러질 수 있음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노예와 주인이 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관계성이었습니다. 우리는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오네시모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빌레몬은 주인이었고 오네시모는 도망간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전도에 의해 빌레몬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오네시모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당시 노예는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물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서로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주인과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종이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어우러짐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어우러짐이 동서남북이라는 형태 속에서 연습되고 준비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볼 때 이 사람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사람과는 같이할 수준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나는 배운 사람이지만 저 사람은 아니다.’ 혹은 나는 가진 사람이지만 저 사람의 행색은 형편없다.’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가 어린 양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끝없이 세상 실감을 죽이고 하나님 실감을 확장시켜 나가기 위하여 싸우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육체적인 조건 때문에 어우러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천국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천국의 어우러짐의 기본 패턴인 동서남북에 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민수기에서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해 계획하시고 구상하신 구조가 선민들의 진영 짜기에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강릉에서 십자가 복음방송을 시작한 것이 어느덧 14년이 되었습니다. 많지는 않아도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 실감을 확장하기 위하여 세상 실감을 죽이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인터넷 환경도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허락하시는 인터넷이라고 하는 땅 위에서 동서남북의 진영 짜기와 어우러짐을 연습해야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뭔가 프로젝트를 세우고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하여 광고를 하는 것 같다고 여기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저 진리를 말씀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는 서로가 육체의 차별을 뛰어넘어 하늘에서 이루어질 어우러짐을, 땅에서 연습하며 살아야 될 때가 되었다고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확신을 주셨습니다. 제가 만든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프로그램입니다.

 

14절을 보면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어우러짐의 기본 바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자면 예정 속에 있습니다. 이 세상 쪽으로 볼 때 열두 사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까지 가신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처음으로 세상에 증언한 자들입니다.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 성으로 상징되는 거대하고 황홀한 하나의 어우러짐의 기초가 되는 것은 바로 증언 속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열두 사도처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열두 사도가 직접 만난 증언 속의 예수님을 실제 대상으로 믿으며 나를 예수님께 던질 수 있었습니다. 어린 양 하나를 붙잡고 씨름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다 내 형제이고 진짜 가족입니다. 저에게도 육의 가족이 있습니다. 육의 가족이 없으면서 여러분을 진짜 가족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육의 가족 중에는 천상의 거대하고 황홀하고 조화로운 어우러짐에 참여하지 못할 자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육의 가족 중에서 여러분만 천상의 어우러짐에 참여할 자일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로는 가족이지만 하나님과 어린 양을 중심으로 영원히 함께 어우러져 살 가족은 아닙니다.

이것은 가족을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가정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는 마음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의 자리로, 남편의 자리로, 엄마의 자리로, 아빠의 자리로, 아들의 자리로, 딸의 자리로 파송되어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들 앞에서 어떻게 하나님 실감으로 충만한 말과 행동을 할 것인가를 책임져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제가 여러분의 진짜 가족이고, 여러분이 저의 진짜 가족입니다. 한 지붕 밑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이 가족이 아닙니다. 의식을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에 벽처럼 남겨두고 있는 육체의 틀을 다 깨뜨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육의 가족들 앞에서 하나님 실감으로 충만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위하여, 죽을힘을 다해 어린 양을 붙잡고 싸워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에게서 안정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 바라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안정을 찾고, 하나님을 바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계시록 21장은 인간의 언어를 통해 천상에서 이루어지는 어우러짐의 삶을 맛보기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상에서 이루어질 삶이 우리의 진짜 삶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예정을 받은 자로 싸워 이기며, 증언된 어린 양과 연합하여 아무쪼록 새 예루살렘 성으로 표현되는 어우러짐에 모두가 참여하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천상의 어우러짐을 땅에서 결정해야 하는 예수 믿는 운명과 팔자를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이며, 오직 하늘 실감을 날마다 확장하고 굳건히 하기 위하여 세상 실감을 날마다 죽이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고, 하늘에서 어우러짐을 땅에서 연습할 수 있는 동서남북의 존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