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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나라고 상복(償福) 없으란 법 있나?_태승철

by 태승철 · 16-06-23 07:23 · 7,706

노벨상과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이 있지요. 내게는 '유토피아'라는 단어만큼이나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이 상을 둘 다 받은 사람이 세명이나 있답니다. 유년시절 보물찾기를 해도 변변한 상 받은 적이 없었던 나에게도 상이라는 것이 과연 주어질까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의 여생을 하나님이 주시는 상으로만 채우면서 살 수 있는 길을 눈앞에 펼쳐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도 이제 여생만큼은 상복 터진 삶을 살다 천국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라고 상복(償福) 없으란 법 있나?

(사무엘하 22:21~29)

 

 

21. 여호와께서 내 공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갚으셨으니

22.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함으로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23. 그의 모든 법도를 내 앞에 두고 그의 규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24. 내가 또 그의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2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의 눈앞에서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26.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27.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

28.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29.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나라고 상복(償福) 없으란 법 있나?>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나라고 상복(償福) 없으란 법 있나?’

노벨상이 부러운 이유는 그동안 자기 분야에서 노력한 것을 세상이 인정해 주는 보상 심리가 충족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더해 분야별로 상금이 무려 10억에서 14억까지 됩니다. 종교계에도 노벨상에 버금가는 템플턴상이 있는데 잘 아시는 대로 한 경직 목사님께서 수상하셨습니다. 내가 받은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이런 상을 받은 분이 계시다는 것이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이 템플턴상도 노벨상 못지않게 상금이 큰데 목사님께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사님 당시에는 102만 달러이었는데 요즘은 140만 달러 정도 된다고 합니다. 기금의 이자에 따라서 상금의 액수가 바뀌는 것 같습니다. 수상 소감을 발표하시는 자리에서 북한을 돕기 위한 성금으로 102만 달러 전액을 기증하시면서 평생 1분 동안 백만장자가 되어 봤습니다.”라고 하시며 웃으셨는데 어느 개그맨의 멋진 유머보다도 더 감동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 평생 1분 동안 백만장자가 되어 봤다라는 말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102만 달러를 받은 그 자리에서 바로 기증을 하셨던 목사님께서는 이미 상을 받은 마음상태였기 때문입니다. 102만 달러가 없어도 이미 충분한 마음입니다. 우리도 100만 달러 상은 받지 못하더라도, 목사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것과 같은 상은 받을 수 있습니다.

노벨상과 템플턴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상은 우리에게는 유토피아로 비현실적으로 들립니다. 이번에 한 강 작가가 영국에서 맨부커 상을 받은 것도 대단한데, 노벨상과 템플턴상을 둘 다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마더 테레사 수녀님과 소설가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레이저를 발명한 물리학자 찰스 타운스입니다. 목사님을 통해서 보았듯이 노벨상이나 템플턴상을 10개씩 받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마음은 이미 상으로 가득 찬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상의 내용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무엘 상하를 마무리 짓는 다윗의 노래를 짚어가면서 오늘 세 번째 부분의 그 첫 구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21절에 여호와께서 내 공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갚으셨으니라고 합니다. ‘상 주신다.’는 것은 보답한다, 갚으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마음을 좀 무겁게 하는 부분이 있는데 내 공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갚으신다.’는 말이 어렵습니다. ‘공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내 행동이 어긋남이 없는 것입니다. ‘내 손의 깨끗함도 나의 행함이 하나님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22절에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함으로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켰으므로 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악을 행함으로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라는 말은 번역이 온전치 못한 것 같습니다. ‘아니하였으며라는 부정어를 악을 행하므로다음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내가 악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23절에 그의 모든 법도를 내 앞에 두고 그의 규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상 받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본문의 내용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상 주심이 마땅한 것처럼 공의를 행할 수 있었고 손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보시기에 깨끗할 수 있었고 그의 모든 법도를 내 앞에 두고 그의 규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우리가 기독교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이렇게 어렵게 느껴지고 상복이 없는 자로 생각하는데, 그러나 이것은 여러분이 돈 버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고, 여러분의 꿈과 소원과 계획대로 자식을 키우려고 하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목사님들은 목회하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교인 한 명의 마음을 교회에 붙이는 것보다 하나님의 모든 법도를 내 앞에 두고 그의 규례를 버리지 않는 것이 훨씬 쉬운 것인데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잘못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앞서서 본 것처럼 가족이든 이웃이든 상황이든 환경이든 그것들이 사망의 물결이고 불의의 창수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불의의 창수라는 말은 의롭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 말의 본래 뜻은 무가치한 것들의 홍수입니다. 다시 말해 내 마음을 빠뜨려 죽이는 것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여겨서 마음을 전폭적으로 쏟는 대상들이 내가 마음으로 도망쳐야할 하나님에 비하면 이것들은 금방 타버릴 숯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도망가야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가족과 이웃과 상황과 사건과 일과 프로젝트 등 모든 것들이 다 나의 마음을 빠뜨리는 무가치한 것들의 홍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내가 머물러야 할 하나님에 비하면 잠시 타다 재가 되어버릴 숯덩이에 불과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23절에 그의 모든 법도를 내 앞에 두고 그의 규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라고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법에 대해 마음에서 친화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친화력이 생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들에 대해 마음에서 거슬림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이 오감으로 마음을 사로잡기 전에 마음이 하나님께로 도망갑니다. 이 세상은 내가 붙잡고 씨름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도망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도망의 증거와 결과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들에 대해 내 마음에서 거부감이 생기질 않습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은 사실 단 하나의 계명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1계명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만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것은 내 마음을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 세상에서 사랑해야 될 것들과 사랑할만한 것들 사이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을 도망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나머지 계명들은 저절로 다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 친구에게 저주만 해도 살인한 것으로 보시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으로 보십니다. 이러한 행동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제 1계명인 하나님께 마음이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머물고 있다면 어떤 증거가 나타나느냐면 좀 과장해서 하나님! 성경에 쓰여 있는 것 말고 다른 계명은 없습니까? 좀 더 주시죠.’라는 마음까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여자 친구에게 프러포즈를 위해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특별히 부탁하여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이제 칼 퇴근을 하려고 하는 차에 갑자기 회사 상사가 야근을 강요하면 야근을 하면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이 돈 많이 버는 곳에 가 있고, 이 세상에 성공에 가 있고 승진하는데 가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질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돈이 궁해서 야근이라도 하고 싶은 상황이었다면 주어진 일이 손에 착착 붙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마음이 건강이나 형통이나 돈에 가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게 느끼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께 가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이웃 사랑도 하나님 사랑의 증거이므로 이웃 사랑이 안 되고 있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상()은 너무나도 쉬운 것일 수 있습니다.

 

무조건 세상에서 도망가야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윗을 모델로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델하우스처럼 제시된 다윗의 신앙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해나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우리는 교리를 공부하려고 교리서를 읽어봤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를 수도 있습니다. 독일에서 유명한 신학자들이 정통교리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놓은 교리서들을 읽으면 한 줄을 못 읽을 수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것인데 하나님께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오감을 통해 들어와서 내 마음을 빼앗아가려는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가는 것인데 마치 나를 죽이려는 홍수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도망가면 이 세상에서 육체로 행해야 될 행동이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날개를 단 것처럼 가벼워집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죄를 짓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 외에는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서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올바른 행동이 나오게 되고 그럴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받게 되는데 하나님은 어떤 상을 주시는 것일까요?

노벨상이나 템플턴상처럼 메달과 증서를 주시고 상금을 주시면 좋겠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은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이야기가 26절부터 나옵니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라고 하시는데 나타내시며, 보이시며가 상입니다. ‘자비는 마음이 하나님께 머무는 여러 측면의 한 측면으로 히브리어의 하시드라는 말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을 하나님께 보내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내 마음의 공백 안으로 하나님을 흡입하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면 마음의 공백에 돈을 흡입해서 채우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로 마음이 도망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도 나를 사랑하셔서 받아들여 주시는 것인데 이것이 받아들여짐의 상입니다.

내가 삼성에 받아들여지고, 서울대학에 받아들여지고, 결혼하고 싶었던 여자에게 받아들여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 상의 의미는 새로운 영역으로 받아들여짐을 통해 새로운 나를 얻게 되는데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자로서 나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박 근혜 대통령 정부에 받아들여져서 장관을 하게 되면 온 가족이 다 함께 기쁠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면 받아들여진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마음이 하나님께로 도망가지를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을 기쁘게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경직 목사님이 템플턴상의 상금을 다 베풀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기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상으로 받은 입장에서는 템플턴상으로 인해서 더 기뻐할 필요가 없이 이미 배가 꽉 찼습니다.

 

이어서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완전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창17:1절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