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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하나님 이름이 독이 되는 체질_태승철

by 태승철 · 16-12-03 10:24 · 7,455
보약의 대명사인 녹용은 원기회복과 면역력 증가에 탁월한 효과를 갖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체질이 태양인일 경우 녹용은 보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답니다.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이 인삼 복용을 삼가야 함과 같지요. 하나님의 이름이 독으로 작용하는 체질이 있습니다.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부를수록, 반복하여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저주처럼, 쉼도 평안도 없는 삶이 무한 지속 됩니다. 이런 체질의 정체를 밝혀야만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독이 되는 체질

(역대상 13:7~14)

 

 

7.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8.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9.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10.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11. 여호와께서 웃사의 몸을 찢으셨으므로 다윗이 노하여 그 곳을 베레스 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12. 그 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르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궤를 내 곳으로 오게 하리요 하고

13. 다윗이 궤를 옮겨 자기가 있는 다윗 성으로 메어들이지 못하고 그 대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니라

14.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독이 되는 체질>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독이 되는 체질

한의학에서 보약은 인체의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온 이물질이라는 차원에서 독으로 분류가 됩니다. 그래서 보약을 먹을 때에는 해독 작용이 강한 녹두를 먹으면 안 됩니다. 녹두가 독처럼 작용하는 보약의 효과를 무효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보약을 먹을 때에는 우선 약재가 중요하고 먹는 사람의 체질이 보약을 독으로 흡수할지 약으로 흡수할지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이 인삼을 먹으면 안 좋게 작용해서 두통을 느끼게 합니다. 감기로 몸에 열이 있을 때에는 절대 인삼을 먹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또한 보약의 대명사인 녹용도 기본적으로는 원기회복과 면역력 증가에 탁월한 효과를 보입니다. 태음인이나 소음인에게는 효과가 크고 소양인에게도 어느 정도는 효과를 보는데, 태양인이 녹용을 복용하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살이 쪄서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이름이 독이 되는 체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 땅의 유일한 표시입니다. 그런데 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도 인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마음의 체질에 맞지 않는다면 상상할 수 없는 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마치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이 인삼을 대놓고 먹는 것과 같은 행동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러한 내용을 말씀해주고 있는데 하나님의 이름 대신 법궤를 옮기다 일어난 불상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제 말씀 드린 대로 여호와의 법궤의 구조는 인간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법궤는 직육면체의 상자모양입니다. 즉 그 안에 무엇인가를 담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누구나 다 이러한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법궤 위에는 속죄소 뚜껑이 있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수호하는 두 그룹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두 그룹은 두 날개를 서로 마주보게 하여 상자를 덮고 있으면서 거룩함을 지키고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의 마음의 거룩한 부분에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인간의 마음을 두 그룹이 날개를 펴서 보호하는 가장 거룩한 곳에 무엇인가를 담을 때에는 항상 이름을 담게 됩니다. 실제로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 자체를 담을 수는 없기에 이름으로 바꾸어 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마음에 담으면 종이 돈 자체를 담을 수 없기 때문에 명사로 바꾸어 마음에 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마음을 가리키는 법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십계명의 돌판이 들어있습니다. 이 돌판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돌판이 들어있는 법궤가 곧 하늘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상징물입니다. 여호와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이듯, 이 말씀의 돌판이 담긴 법궤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말과 글자로 쓰여 질 수 있는 여호와의 이름에 형상을 부여한 것이 법궤입니다.

예를 들어 평화의 상징으로서 비둘기가 있습니다. 평화라는 명사를 비둘기로 상징화시킨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돌판이 들어있는 법궤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궤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곧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태도가 됩니다.

 

앞서 사무엘상 4장 이하에 보면 전쟁에 이긴 블레셋이 이스라엘로부터 법궤를 탈취합니다. 그렇게 법궤가 블레셋 아스돗의 다곤 신전에 안치되었을 때에 그 신상들을 파괴하고 종기 재앙을 불러옴으로 인해서 아스돗의 사람들이 이스라엘 신이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한다고 해서 가드로 옮겨지게 되었고, 그곳에서도 재앙이 이어지자 에그론으로 옮겼는데 역시 재앙이 임하므로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렇게 법궤가 돌아오게 되었으나 칠십 년 동안 법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심 밖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법궤는 형상을 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는 차원에서 이름과 법궤는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의 체질로 하나님의 이름과 같은 의미를 가진 법궤를 가지자 종기 재앙으로서 부작용이 발생하는데 법궤가 독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법궤를 탈취하였던 블레셋 사람들과 같은 마음 상태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같은 부작용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칠십 년 동안 기럇여아림에 방치되어왔던 법궤를 옮겨오는데, 모든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의 법궤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살아가길 원해서 전 국민이 참여하는 국가적 캠페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언제나 기억하며 살면 좋겠다는 너무나 마땅하고도 아름다운 동기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축제분위기에 하나님께서는 찬물을 확 끼얹어버리십니다.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되어 있던 법궤를 그 손자인 웃사와 아히오가 두 마리 소가 끄는 수레를 이용해 옮기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에 소가 뛰자 수레가 흔들렸고, 법궤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웃사가 법궤를 붙잡았습니다. 웃사로서는 신성모독을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반사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법궤에 손을 대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셨고 그 자리에서 죽게 하십니다. 그러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됩니다. 사무엘하에는 삼만 명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며칠 뒤에는 이들이 전국으로 소문을 퍼트리게 될 터였습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겠다는 의도로 시작된 아름다운 캠페인이 하나님에 의해서 종식되어 버릴 분위기가 되었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타작마당에서 소가 뛰었다는 대목은 히브리어로 샤마트라고 하는데 걸려 넘어진다.’라는 뜻입니다. 타작마당은 곡식에 흙이 섞이지 않도록 땅을 고르고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곳이었습니다. 작은 돌멩이조차 없는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 소가 뛰었다는 것은 이 일이 우연찮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애초에 하나님께서 소를 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수레로 옮기는 것은 이방사람들이 우상을 옮기는 방식이었습니다. 본래 민수기가 기록하는 법궤 이동은 레위인들이 법궤의 고리에 나무막대를 꿰어서 어깨에 메도록 하셨습니다. 성소의 기구에 손을 댄 자들은 다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규정도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이 규정을 어겼기 때문에 웃사를 죽이셨다고 해석한다면 하나님은 그저 냉혈한의 원칙주의자가 될 것인데 이러한 규정이 세워지게 된 의도를 먼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소가 끄는 수레에 법궤를 실었다는 것은 곧 우리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법궤의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곳에 돈이라는 이름을 담으면 실제 돈을 갖고 싶어 하는 소원이 생기고 되고 그러면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이름을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담았다는 것입니다.

법궤에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나타내는 돌판이 들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두 그룹이 날개를 펴서 보호하는 가장 깊은 곳에 하나님의 이름 외에 다른 것을 품은 상태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소가 끄는 수레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인격성은 무시되고 그 전지전능하심만을 취하려고 하는 것인데 블레셋이 법궤를 탈취했을 때와 똑같은 마음 상태가 되어서 재앙이 내립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담으면 당연하게 소원과 계획이 생겨납니다. 마음에 자녀를 담으면 자녀의 형통을 소원하게 됩니다. 그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소가 끄는 수레가 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대로 이끌어가려고 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모습을 이스라엘 온 국민들이 봄으로서 블레셋과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될 터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웃사를 죽이심으로 깨우침을 주셨던 것입니다.

다윗 개인적으로는 올바른 신앙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법궤가 방치되었던 칠십 년의 세월로 인해서 법궤가 하나님의 상징물인 것은 알았지만 성막의 기구들이 가지는 의미에 합당한 행동을 알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은 있었으나 합당한 지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두 그룹이 날개를 펴서 보호하는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하나님 이외의 다른 이름을 마음에 품은 체질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이름과 같은 동격인 법궤를 바라보고 있을 때 블레셋에서 일어났던 재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돈을 담고 하나님께 나와서 사업이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이게 시지프스의 저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따라 붙는 속성이 전지전능하시고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돈을 향하여 하트 뿅뿅을 하는 마음의 수레에 하나님의 이름을 실은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내가 믿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오히려 내 삶의 평안을 깨뜨리고 지독한 저주의 삶으로 빠지게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잘 보이면 얼마든지 내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를 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간구하는데 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습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업을 위한 사십일 금식기도 끝에 잘 되었다면, 그것은 기도의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을 선민에서 포기하신 저주일 것입니다. 사업이 마음에 걸려서 사십일 금식기도를 해야 한다면 그 기도의 주제는 내 마음의 두 그룹이 날개로 덮고 있는 가장 깊이 자리 잡은 돈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는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서 내가 만들어 놓은 수레에 올라타시라고 강요한다면 재앙의 길을 독촉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부를수록 내 삶은 평안이 아닌 재앙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레위인이 어깨에 멘다.’는 것은 모세가 이동할 때에 이 규정을 주셨는데 모세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가라하시면 가고 서라하시면 섰습니다. 레위인이 메고 가지만 레위인 자신들이 수레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법궤가 시키는 대로 갑니다.

우리 마음에 가장 깊은 곳 두 그룹이 날개를 펴서 지키는 거룩한 장소에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오면 내 생각도 내 언어도 내 육체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을 태우고 다니는 하나님의 수레가 됩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이끌려가는 수레가 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소가 끄는 수레에 하나님의 이름을 담게 되면 내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내 인생의 수레에 하나님의 이름과 그 이름의 속성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끌어 들여서 종속시키는 것이 돼 버립니다. 캠페인이 이렇게 돼 버리면 블레셋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재현되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이것을 끊어 버리신 것입니다.

다윗의 귀한 의도가 올바로 성취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시고 캠페인에 찬물을 끼얹어 버리시고 삼 개월 뒤에 올바른 방식으로 법궤를 운반하도록 하십니다.

오늘도 두 그룹의 날개로 덮여있는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하나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을 두고 있는 체질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면 빨리 중단하시는 게 좋습니다. 마치 태양인이 녹용을 복용하는 것이 독이 된다는 것을 알고 중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열이 많은 사람이 인삼을 복용하다가 인삼을 중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이름 부르는 것을 중단하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에 맞지 않는 체질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생활화를 지속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기억하고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고백하는 것이 끝나는 순간 우리의 체질은 하나님의 이름이 독이 되는 체질로 바뀌고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는 어느덧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세상 가치들의 이름이 들어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독이 될 수밖에 없는 체질이 억눌림을 당하는 이 일이 지속되어야만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에게 평안의 근거요 복락의 근거요 행복의 근거가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 세상에 입에 담을 수 있는 명사 중에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값지고 귀한 명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하나의 이름만으로 세상을 살고 우리에게서 일어나지 못할 일이 없음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수레에 하나님을 태우지 말고 하나님이 나의 삶 전체를 수레로 삼으실 수 있도록 십자가를 생활화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