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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하나님 공감을 위한 유리벽(?)_태승철

by 태승철 · 18-05-16 09:43 · 6,190
인간은 공감하는 존재(HOMO EMPATHICUS)입니다. 즉 타인의 감정이나 주장, 의견 등에 대해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거지요. 요사이는 비즈니스의 성공을 위해서도 머리보다 마음의 공감능력이 더욱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리벽이란 공감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이지요. 공감하는 존재인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 유리벽이 있다면 어떤 일이든 성공은 물 건너간 셈이지요.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유리벽 없이 공감 없다고.

하나님을 공감하기 위한 유리벽

(잠언 31:1~31)

 

 

1. 르무엘 왕이 말씀한 바 곧 그의 어머니가 그를 훈계한 잠언이라

2. 내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내 태에서 난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서원대로 얻은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3.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하지 말지어다

4.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고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들에게 마땅하지 않도다

5.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곤고한 자들의 송사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

6.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

7. 그는 마시고 자기의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자기의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8.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9.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을 공감하기 위한 유리벽>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을 공감하기 위한 유리벽

유리벽은 보이지만 차단되었음을 상징합니다. 공감과는 반대되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공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리벽이 있어야만 합니다.

기업 컨설턴트인 데브 팻나이크(Dev Patnaik)가 쓴 공감하는 인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원 제목은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이고 부제는 잠자는 비즈니스 감각을 깨우는 공감능력의 발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공적인 비즈니스는 머리가 아닌 마음에서 완성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공감능력을 발휘하거나 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성공하거나 실패한 비즈니스의 사례들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미국의 디트로이트 도시는 자동차 산업의 메카로 불리는 곳입니다. 포드나 GM이나 크라이슬러 자동차 회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자동차가 처음 만들어진 곳은 유럽이었지만 이것을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은 바로 미국의 디트로이트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이 산업도 많이 쇠퇴하여 미국 내 자국 자동차 점유율은 50%밖에는 되지 않지만 1984년까지만 해도 81%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산업이 흥했으니 그 지역 주민들도 잘살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몇 십 년에 걸쳐서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 점차 쇠락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2000년 초중반에 들어서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 바닥을 쳤는데 디트로이트에서만은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도시에서는 일본차 혼다나 도요다를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유독 디트로이트에서만은 미국 차가 도로를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디트로이트에서는 자동차회사 근로자가 많았기에 자신뿐만 아니라 그 주변인들에게까지 차를 할인해서 살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특유한 문화 때문에 다른 도시와는 다르게 외국산 차의 점유율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디트로이트 시민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이 외제차를 사는 이유를 공감하지 못했기에 그들이 원하는 차를 만들지도 못하고 자동차 산업은 몰락해갔습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거대한 유리벽에 갇혔다고 표현했습니다.

반대로 공감력을 발휘하여 성공한 예도 있습니다. 디즈니랜드에 사파리가 있다고 합니다. 이곳이 1998년에 개장한 이후로 70달러나 되는 비싼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매년 890만 명이나 되는 관람객이 찾는다고 합니다. 디즈니랜드의 수익을 매년 50억 달러씩 올려주는 효자입니다. 그런데 이 계획의 제안 단계에서 담당자인 죠 로드는 경영진의 절대불가의 벽에 부딪힌 적이 있었습니다. 경영진으로써는 이미 잘 되는 디즈니랜드에 사파리를 추가할 모험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죠 로드는 고심 끝에 한 가지 묘안을 냅니다. 경영진이 모인 회의장에 조련사가 벵골 호랑이 한 마리를 끌고 들어왔습니다. 뜬금없이 호랑이가 들어와서 으르렁대니 경영진은 기절초풍할 노릇이었습니다. 빨리 내보내라고 아우성을 치는데 호랑이가 나가자 분위기가 묘해졌습니다. 결국 사파리에 찬성하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호랑이 한 마리를 대해보니 그 생생함이 굉장했던 것입니다. 죠 로드는 이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기획을 제안했던 것입니다. 경영진으로 하여금 공감하게 함으로써 기획은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유리벽과 공감은 이러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디트로이트는 독특한 자동차 문화가 유리벽이 되어서 소비자들과의 공감을 막았고 도시를 몰락하게 하였습니다. 반대로 죠 로드는 호랑이를 통해 경영진에게 사파리에 대한 공감을 불어넣어 기획을 성공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공감하기 위해서는 유리벽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디트로이트시의 독특한 자동차 문화와 같습니다. 외부의 열망과 공감을 차단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유리벽임과 동시에 공감이기도 합니다. 호랑이가 사파리의 공감을 이끌어 냈듯이 십자가는 하늘나라와 하나님에 대한 공감을 불어넣는 매개입니다. 십자가가 가지고 있는 유리벽의 기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늘에 대한 공감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유리벽에 갇혀야만 공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유리벽인 이유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세상에 대해서 죽고 또한 세상이 나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대해서 차단되어야만 하나님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돈을 못 버는 상황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무척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들과 공감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공감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은 절대로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늘 아버지에 대한 믿음에 우리가 공감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돈을 추구하는 세상 사람에게 공감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공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먼저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차단되어야 합니다. 내 앞에 자녀가 있지만 그 사이에는 유리벽이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공감할 때에 비로소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내려올 수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제 보았던 30장과 함께 잠언의 결론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잠언의 대단원이라고 보기에는 약간의 허전함이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내용을 함축하면서도 강한 끝맺음이 필요할 것 같은데 다소 밋밋하기 때문입니다.

내용을 보면 르무엘 왕에 대한 그 어머니의 훈계입니다. 이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왕으로써의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정복 전쟁을 좋아하지 말고, 술에 취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해야 백성들의 문제를 정의와 공의로 판단할 수 있으리라는 것인데 이것을 잠언의 결론으로 보기에는 아쉽습니다. 이제까지 질리도록 반복되어온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현숙한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결론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도 직간접적으로 이미 다 이야기 되었던 것들의 반복입니다.

편집자들은 도대체 왜 왕의 이야기와 현숙한 아내에 대한 이야기로 잠언을 마무리 지었던 것일까요? 여기에 성경의 묘미가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싱겁기 그지없는 내용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싱거운 이야기를 하게 하신 성령님의 의도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의도를 파악할 수 있으면 결론이 참 멋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의도가 무엇일까요? 바른 왕과 현숙한 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타락하기 전의 에덴동산의 모습과 같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특징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왕은 바깥일을 다스리는 남자를 상징하고 현숙한 아내는 가정을 다스리는 여자의 모습입니다.

다스리다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국가나 사회, 단체, 집안의 일을 보살펴 관리하고 통제하다.”라고 합니다. 즉 남자와 여자를 집안의 안팎으로 관계되어진 사람과 일들을 다스리는 모습으로 그린 것입니다.

주제를 다스림에 놓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스림에는 판단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판단에 대한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판단에 관한 이야기로 잠언을 끝맺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30장에서는 마음의 배부름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인간이 짐승과 같은 점은 배부름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짐승과 달리 육체적 배부름뿐만 아니라 마음의 배부름을 추구합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의 총명은 곧 이 세상의 가치로 마음이 배부를 수 없음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으로만 마음이 배부를 수 있음을 아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총명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세상의 가치로 배부르려고 하는 것은 짐승으로의 전락입니다.

오늘 판단에 대한 이야기는 이 배부름의 연장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배부를 수 있느냐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 답이 바로 판단과 연결되어 있고 왕과 현숙한 아내를 비유로 말하고 있습니다.

 

왕은 여자에게 마음을 뺏기지 않고, 정복 전쟁을 즐겨하지 않고, 독주에 취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왕은 세상의 좋은 가치를 다 가진 자입니다. 그렇기에 왕은 어쩔 수 없이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길 것이고 정복 전쟁을 좋아할 것이고 포도주를 즐기며 포도주가 상징하는 바대로 세상의 가치에 마음을 빼앗기고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스리는 자리는 판단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인간인 이상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조건에 놓이게 됩니다. 비단 왕의 자리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의 배를 불리려하는 동안에는 어떤 대상과 상황에서도 올바른 판단은 나올 수 없습니다. 이것이 타락의 징후입니다.

사람은 짐승과는 다르게 반드시 판단하며 살아가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판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사람은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빠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판단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판단하도록 지으셨는데 절대적으로 판단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즉 절대적으로 필요한 판단을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판단을 수입하는 업자처럼 살아야합니다. 판단이 필요한데 이것이 나에게서는 나오지 않으니 수입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판단을 구할 때에 마음에는 배부름이 생겨납니다.

현숙한 아내에 대한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자는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면 한 시도 살 수 없다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아내도 다스리는 자입니다. 집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돌보아야합니다. 남편에 관한 일, 자식에 관한 일, 종들에 관한 일, 집안의 경제문제 등을 판단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면 스스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많은 판단을 하나님께 구하며 사는 사람이 바로 현숙한 아내가 상징하는 바입니다.

우리의 삶은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정복 전쟁을 하고 싶어 하고, 독주에 취하고자 하는 왕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왕의 자리가 아닐지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세상에 취하고 싶어 하는 존재들이기에 철저하게 세상과 격리되어야만 합니다.

내가 판단하는 것은 이미 세상에 마음을 빼앗긴 상태이고 세상 것을 많이 얻겠다고 성취욕에 장악된 상태이고 세상에 취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어떤 식으로도 올바른 판단은 나오지 않습니다. 왕이 아닐지라도 누구나 세상에 대한 가치를 정복하고 성취하고 취하려 합니다. 반대로 내 앞에 주어지는 어떤 사람이나 대상에 대해서도 판단하지 않는 삶을 살려고 했던 사람이 바로 솔로몬입니다.

 

스무 살에 왕이 되어서 한 일은 일천 번이나 자신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젊은 나이에 왕이 되었으니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길 것은 분명합니다. 왕이 되었으니 나라의 영토를 넓히고자 정복 전쟁을 벌일 것입니다. 또 왕의 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세상의 가치에 취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결코 백성들의 재판에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알았기에 일천 번 죽어 마땅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번제를 통해 세상에 대해 유리벽을 쳤습니다.

이것이 상번제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어린 양이 번제로 드려집니다. 죽는 어린 양은 세상에 마음을 빼앗긴 나의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성취욕에 장악된 나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좋은 것들에 취한 나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나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판단을 필요로 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도록 세상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러한 나를 죽여야만 하나님의 판단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번제단은 유리벽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도 일천 번제를 통해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켰습니다.

번제단에 오른 양은 토막 나고 각이 뜨여서 석쇠 위에 올라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맞이해야 하는 판단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판단은 이렇게 철저하게 분쇄되어 죽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잠언의 결론입니다. 솔로몬과 같이 내가 죄인 됨을 알고 번제단에서 일천 번씩이라도 죽음을 맞이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이는 곧 세상에 대한 격리이자 감금입니다.

이 번제단의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서 세상과 단절되어야만 합니다. 어떤 것에도 마음으로 접촉하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것이 자녀일지라도 내 육체 관한 일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은 그것들로부터 마음을 격리하고 감금해야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세상에 대해 차단이 일어나면 마음은 주님과 함께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면 벵골 호랑이가 경영진 회의장에 나타난 것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대해 느끼시는 공감이 생겨납니다. 이 공감력이 내 마음에 살아있는 동안 유리벽으로 차단된 세상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내려오고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내 마음이 공감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13절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눈앞에 있는 자녀나 사업을 비롯한 삶의 문제들에 대해 하나님의 계획에 공감하려면 먼저 철저하게 세상과 격리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세상 성취욕에 장악되고, 세상의 가치에 취해있는 것이 바로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악임을 알고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유리벽으로 격리되는 것입니다. 세상과의 접촉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가 되면 마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대해 공감하는 바를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느껴지면 유리벽 너머에 있는 문제들에 대해 가지신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에 공감하게 되리라는 것이 잠언서의 결론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해 우선 유리벽을 쳐야합니다. 구약에서는 그것이 번제단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렸듯이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하며 세상에 유리벽을 치고 차단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공감하는 호모 엠파티쿠스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감정이입을 하지 말고 접촉하지 말고 공감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격리될 때에 하늘을 공감하게 되고, 눈앞에 있는 세상의 문제들에 대해 가지신 하나님의 뜻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잠언서의 결론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눈앞에는 너무나 급박해 보이는 일들이 펼쳐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을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유리벽으로 격리된 마음을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에 대해 가지신 마음에 공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세상에 대해 가지신 계획에 대해 공감하는 귀중하고 기적 같은 역사로 날마다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