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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솔로몬의 해 아래 '가치실험'_태승철

by 태승철 · 18-05-19 13:27 · 5,791
솔로몬의 지혜. 솔로몬의 영광. 솔로몬의 재판. 이 말들은 관용어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실험'이라는 말은 별로 못 들어 봤습니다. 그래서 그 실험의 결과에 대해 크게 주목하지도 않았지요. 북한의 핵 폐기가 전 세계의 관심거리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미국과 중국은 계속해서 새로운 핵실험을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이 모르는 것은 핵 못지않은 폭발력을 가진 것이 ‘가치’이고 그래서 솔로몬의 가치실험이 중요한 거지요.

솔로몬의 해 아래 가치실험

(전도서 2:1~26)

 

 

1.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2.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였노라

 

9.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

10.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11.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솔로몬의 해 아래 가치실험’>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솔로몬의 해 아래 가치실험

요즘 전 세계적으로 북한의 핵폐기 문제가 초미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엊그제 북한이 갑자기 남북한 고위 간부급회의를 거절함으로써 평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은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다만 남북한과 주변 동북아시아에 대해 어떤 한 사람의 주장이나 의견이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놓지 않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복음 사건이 원활하게 전달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핵실험보다도 더 주목해야 될 실험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솔로몬이 행한 가치실험입니다. ‘가치란 어떠한 대상을 소유하면 기쁨과 만족을 얻게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따라서 가치실험이란 어떠한 가치를 가졌을 때에 믿고 기대하는 만큼의 기쁨과 만족을 얻게 되는지 실험해보는 것입니다.

핵무기가 폭발하면 무서운 파괴력을 가집니다. 그러나 가치도 이에 못지않은 폭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서 폭발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핵무기는 삶을 끝낼 수 있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무서운 폭발력입니다. 한편 채택된 가치 즉 가치관의 영향력 또한 생애 전체를 변화시키는 폭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가치실험이 중요합니다. 이 실험의 결과에 주목하고 이를 통해 변화된 가치관을 가질 수 있다면 핵폭탄에 비할만한 엄청난 폭발력에 의한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솔로몬과 연관된 솔로몬의 지혜, 솔로몬의 판결, 솔로몬의 재판, 솔로몬의 영광이라는 말들은 많이 사용해왔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실험이라는 말은 거의 주목하지 않고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였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시험을 해보았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가지면 즐겁고 낙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실제로 가져 보았다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이나 현자들이 깨달은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가져보는 실험을 해보았다는 점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결론이 헛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3절을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이어집니다.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 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천하의 문장가들을 불러와도 이 말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간단히 풀어 이야기하자면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지만 의도적으로 어리석음을 한 번 시도해보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실험은 특정한 조건을 만들고 실제로 행해서 나타난 결과를 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자는 사람을 불러 모아 일깨우는 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도자와는 다른 필요를 느끼며 살기에 이들의 생각은 어긋납니다. 전도자가 정말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에 대해 호소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그것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이유를 납득하지 못합니다. 전도자는 하나님 경외를 외치지만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돈과 건강이 중요합니다. 어떤 이들은 결혼이나 승진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전도자를 자처한 솔로몬이 한 가지 제안을 한 셈입니다.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들이 정말로 가치가 있는지 직접 실험을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이 실험의 첫 번째 재료로 술이 등장합니다. 술을 통해서 의도적으로 어리석음을 붙잡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술에 취하듯이 세상에 취하여 사업을 확장하겠노라고 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그 당시에 가치 있게 여겨지던 사업들을 확장시키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또 가치 있게 여겨지는 금은보화를 누구보다 많이 모아보기도 하고, 또 예능인들을 통해서 가무와 오락을 즐겨보기도 하고 수많은 처첩을 거느려보기도 합니다.

매력적인 배우자, 많은 재물, 즐거운 오락, 사업의 확장은 이른바 세상 사람들이 침 흘리며 이루고 싶어 하는 가치들입니다. 전도자가 아무리 호소해도 듣지 않으니 이것들을 직접 경험해보고 헛됨을 증명하겠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일찍이 이십 세에 왕이 되어 일천 번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했고,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셔서 지혜에 더해 부귀영화까지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엄청난 재물이 쌓였고 모든 사업들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왕궁에서는 많은 예능인들이 모여 가무를 벌이며 무궁무진한 오락거리를 만들어내고, 천명이나 되는 처첩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일천 번제를 드렸던 시점부터 이미 전도자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가치에 대한 시험을 시작했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솔로몬은 처첩들에게 마음을 빼앗김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실책을 저지르게 됩니다. 결국 회개하고 돌아오면서 전도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즉 솔로몬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자신의 생애를 해석하는 작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졌던 솔로몬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을 세상가치의 실험장으로 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다윗의 자손에서 예수님을 보내실 것입니다. 한편 솔로몬 또한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택하셔서 메시아로 오실 예수님이 태어나셔서 이루실 복음 사역과 연관 지어서 의미 있는 생애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느끼는 필요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가르치실 것이고, 그 필요를 죽일 수 있는 번제단이 되실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무지막지한 부귀영화를 부어주심으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비하기 위한 실험을 하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결과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돈이 헛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 사람들이 모을 수 없을 만큼 돈을 가진 자가 되어야 가능합니다. 대체 누가 이러한 실험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세대에서 가장 부하다는 사람들조차 솔로몬의 부에는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재물을 얻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업을 크게 키우는 것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누가 대표로 실험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실험을 위해서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더 이상은 없다 싶을 정도로 큰 사업을 이룬 사람이 필요합니다. 세상에는 달리 이런 입장의 사람이 없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솔로몬에게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솔로몬이 다윗 왕의 영토 확장을 근거로 삼아 벌였던 사업들은 현시대에서 이루어지는 사업과는 그 모양이 다르지만 확장이라는 핵심적 의미는 동일합니다.

천명의 처첩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 나라에서 예쁘다는 공주들을 다 끌어 모으는 실험을 솔로몬이 아닌 누가 실험해 볼 수 있었겠습니까? 솔로몬조차도 그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졌다가 회개하고 돌아올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솔로몬이 자신의 생애를 돌아볼 나이가 되자 그제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들의 진실이 보였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감당치 못할 많은 부귀영화를 쏟아 부으신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제 이야기를 잠깐 해볼까합니다. 저의 집사람이 저 보고 하는 말이 한식 양식 중식 분식을 다 좋아하면서도 한식을 먹을 때에는 한식만 좋아하는 사람보다 더 좋아하고, 중식을 먹을 때에는 중식만 좋아하는 사람보다도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식탐의 화신 같은 존재라는 것이죠.

솔로몬이 세상의 가치에 대해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탐내는 모든 가치를 다 이루었으면서도, 하나의 가치에만 집중한 사람보다 훨씬 더 성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해 아래에 가득 찬 세상가치들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서 솔로몬의 생애를 실험장으로 쓰신 것입니다. 말로만 해서는 안 믿기 때문에 근거 있는 결과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헛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은 돈 버는 일 하나에 매진한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가졌습니다. 사업에 성공한 사람보다도 더 많이 성공했습니다. 훌륭한 아내를 얻어서 아름다운 가정을 꾸몄다는 사람보다도 더 많이 성공했습니다. 오락을 즐기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많은 오락을 즐겨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것만 가지면 행복할 수 있으리라 믿고 평생을 수고하며 살지만 진실은 그들의 믿음과는 정반대임을 증명한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일들을 다 이루어 보았지만 마음의 금고 안에 채워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채워질 때에 기쁨과 만족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터무니없고 무지막지하도록 세상의 가치를 부여받은 솔로몬의 마음의 금고에는 바람만 휑하니 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이야기는 솔로몬처럼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느끼는 필요가 얼마나 불필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솔로몬의 생애를 실험장으로 삼으셨습니다.

 

한편 24절을 보면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종잡을 수 없는 말이 나옵니다.

앞서 본 11절에서 세상가치를 추구함이 다 헛됨을 말하였습니다. 같은 의미의 말이 17절과 22절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다 헛되다고 했던 솔로몬이 갑자기 24절에서는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이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하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먹고 마시고 수고하다라는 말에서 수고하다라는 말을 주석들은 내가 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낀다.’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단순히 움직이고 활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먹고 마시고 움직이는 것은 곧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생존하는 그 자체로 얼마든지 기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쁘고 만족하기 위해서는 돈을 많이 모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사업을 확장해서 성공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갖가지 취미나 오락을 가져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훌륭한 배우자를 가져야 것도 아닙니다.

살아있는 자체가 진정한 기쁨과 만족의 충분한 조건입니다. 그렇기에 기쁨과 만족을 위한 더 이상의 조건을 찾아 수고하는 것은 술에 취한 어리석은 행위가 됩니다. 살아있는 자체로 기쁠 수 있는 이유는 살아있는 자만이 마음에 하나님을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 위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이 되면 설령 돈이 없고 사업이 안 되고 오락이 없어도 배우자가 없어도 기쁘고 만족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가치는 기쁨과 만족을 위한 삶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살아있기만 하다면 기쁨과 만족을 얻을 준비는 이미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쁨과 만족은 목표지점이 아니고 출발지점입니다. 사업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사업을 잘 해서 기쁘겠다는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솔로몬이 실험을 통해서 그것이 헛되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해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 기뻐하면서 사업장에 나가면 됩니다. 재물이나 배우자를 비롯한 다른 모든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잘못된 가치관을 버려야 합니다. 배우자를 대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으로 기쁨과 만족을 누린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배우자에게서 기쁨과 만족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만족을 표현하는 상대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결국 솔로몬의 가치실험은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가르쳐줍니다. 유전 죄의 습성을 가진 우리는 아무 소용도 없는 가치를 소원합니다. 이 습성을 따라서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없는 세상가치들을 평생 쫒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가치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만족을 출발점으로 삼는 자들에게 세상가치는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는 대상이 됩니다. 2의 창조를 위한 재료들입니다. 이 점을 잊지 않기를 바라시며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생애를 통해 가치실험을 행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이 세상가치가 마음 채움에 대해서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는 결코 솔로몬처럼 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가져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실험용으로 쓰셨듯이 우리를 희생시키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솔로몬이 부러울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배설물로 여겼던 가치들에 치이며 살아야만 했던 사람이 솔로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솔로몬의 가치실험을 통한 메시지를 믿으며, 여전히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가치들을 붙잡으려 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기는 고백을 생활화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해 위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기뻐하면서 만나는 모든 대상들에는 기쁨과 만족을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의한 제2의 창조가 일어나는 삶을 살아가십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에서 독생자 예수님께서 희생 되신 것처럼, 다윗의 아들이었던 솔로몬은 실험도구로 희생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전해주시고자 하신 실험의 결과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해주셔서 믿음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유전 죄의 체질을 볼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는 생활화가 오늘 하루 종일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