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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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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할수록 하나님 측근 되는 근심_태승철

by 태승철 · 23-01-21 08:55 · 1,028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면 할수록 하나님 측근 되는 근심>의 줄거리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내가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함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주 안에서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으로서 근심하기가 있습니다. 누누이 근심을 금하신 주님께서 내 마음이 주 안에 머무는 동안 허락하시는 근심이 있습니다. 주 밖에서 하는 세상 근심은 내 뼈가 썩게 만들지만, 주님이 허락하신 근심은 나를 더욱더 하나님의 측근이 되게 합니다.

 

하면 할수록 하나님 측근 되는 근심

 

(빌립보서 2:19~30)

 

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1.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3.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24.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27.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본문에는 근심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합니다. 기쁨의 서신인 빌립보서에 근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 의외입니다. 그런데 이 근심이란 하면 할수록 더욱 더 하나님의 측근이 되어가고, 하나님과 친해지는 이상한 근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준해서 생각하자면 우리는 근심할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문에서는 근심한다는 말을 너무나 주저함 없이 반복합니다. 이 근심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서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듯이, 오늘 본문에서는 주 안에서라고 세 번 언급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에게 세상일과의 관계에서 근심은 금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주 안에 있는 사람에게 근심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때때로 주님이 허락하시는 근심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더욱 더 깊게 만들어주고, 우리를 하나님의 측근이 되게 해줍니다. 내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일 경우에 나와 같은 형제를 대할 때 주께서 허락하시는 근심이 가능합니다. 그 형제가 세상일과의 관계에서 기쁨이 멈춰지고, 쉬지 않는 기도가 중단되고, 범사에 감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가 될 때 근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세상일과의 관계에서 형제의 마음이 주 안에 계속 머물지 못하고 주 바깥으로 튕겨져 나가려는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근심을 할 수 있습니다.

 

이 근심은 주 안에서 하는 근심이므로 하나님과 주님의 마음을 받아서 하는 근심입니다. 그렇기에 주 바깥으로 나가 있을 때 삶에 대해 근심하는 것과는 그 내용이 완전히 다릅니다. 주 바깥에서 하는 근심은 심령을 썩게 합니다. 세상적으로 말하자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육체에까지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스트레스의 증상으로 혈압이 올라가고, 당도 높아지고, 몸이 뻣뻣해지고, 동맥경화가 나타나고, 위도 안 좋아진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바라보기를 중단하고, 삶을 직면해서 근심할 때 이러한 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편 마음이 주 안에 머물면서 나타나는 근심은 스트레스성 근심과는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주님의 마음을 받아서 하는 근심은 주 안에 있던 사람이 주 바깥으로 튕겨져 나가게 되는 것에 대한 근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근심이자 주님의 근심이고 성령님의 근심입니다. 마음이 주 안에 머물거나 머물고자 애를 쓰며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형제가 주 바깥으로 나가게 되는 것을 근심하는 마음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근심과 일치합니다. 우리는 이 근심을 통해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에 더욱 더 깊이 참여하게 됩니다. 삼위 하나님의 근심에 동참함으로써 사위일체 됨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형제가 근심거리를 만들어주기를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형제가 주 안에 계속 머물면서 세상일들에 좌우되지 않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이 나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도 삼위 하나님께 동참함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그 형제를 보고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그 기쁨에 동참할 때 사위일체를 이룸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본문은 근심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늘 기쁨을 노래하는 서신 안에 근심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 찬 본문이 있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19절을 보면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가운데 디모데를 통해 빌립보 교회의 근황을 듣고 위로를 받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곧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 대해서 근심하고 있었음을 가리킵니다.

빌립보 교회는 앞서 살펴보았던 고린도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습니다. 이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하늘 기쁨을 유지했고, 그 증거로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에 지속적인 후원을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선교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이 지속됨을 근심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됨으로 인해 빌립보 교인들이 주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있을까 근심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빌립보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사건을 두고 근심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주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없기를 기도하면서 근심하였던 것 같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근황을 듣고자 후원금을 모아서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을 보냅니다. 이에 에바브로디도는 로마까지 가서 사도 바울에게 후원금을 전하고 사도 바울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는 사역을 하게 됩니다. 본래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로 돌아가서 사도 바울이 영적으로 건강하여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고 있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는 로마에 온 후에 죽을지도 모르는 심한 병에 걸리고 맙니다. 이 소식이 빌립보 교회에 전해지게 되었고 빌립보 교인들은 사도 바울에 대한 근심뿐만 아니라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근심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사도 바울도 이렇게 근심이 가중된 상황에 놓인 빌립보 교인들을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 본인 역시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 모두에게 근심거리가 된 것에 대해서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사도 바울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차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될 중요한 키워드가 있습니다. ‘주 안에서라는 표현이 세 번이나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근황을 알기 위해 디모데를 보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빌립보 교회에 대한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근심은 사도 바울의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에 생긴 근심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19절을 보면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주 안에서 디모데를 보내겠다는 것은 주 안에서 생겨난 근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빌립보는 그리스 반도의 북부 마케도니아 지방에 속해있었고, 사도 바울은 이탈리아 로마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마음은 모두 주 안에 모여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이 주 안에 있었고, 빌립보 교인들의 마음도 주 안에 있었으며, 디모데의 마음도 주 안에 있었고, 에바브로디도의 마음도 주 안에 있었습니다. 주 안이 곧 진정한 예배당이자 교회였던 것입니다. 몸은 예배당 안에 있어도 마음은 주 바깥으로 튕겨 나가 있는 모습은 교회가 아닙니다. 주 안이 진정한 예배당이었기에 몸이 있는 자리와는 상관없이 이들의 마음은 주 안에 모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형제들 간의 교통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다만 몸이 떨어져 있고 각각 형편과 처지도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고, 빌립보 교회는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이 끊이지 않는 상태에 있었으며, 에바브로디도는 로마에 와서 죽을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이에 마음이 주 안에 모여 있는 형제들은 각각 다른 처지에 있는 형제들의 상황에 대해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근심은 주 안에서 갖는 근심이기에 근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측근이 되게 해주는 놀라운 근심이었던 것입니다.

 

마음이 주 안에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어떤 환경에 처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환경적 어려움에 처했다면 마음이 육체가 처한 어려움에 치중하게 되고 쏠릴 수 있습니다. 마음이 어려움을 향하면 그것을 해결하고, 개선하고, 극복하려는 유혹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마음이 더는 주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주 바깥으로 나가게 하는 강력한 유혹입니다.

본문에서도 이러한 어려움에 대한 상황이 계속 언급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었고,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에바브로디도는 죽을병에 걸려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은 자신의 일보다는 서로의 일을 근심하였습니다. 이 어려움으로 인해서 주 안에 머물고 있는 형제의 마음이 주 바깥으로 튕겨 나가서 항상 기쁨과 쉬지 않는 기도와 범사에 감사가 중단되지 않을까 근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근심은 바로 세상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갖고 계시는 유일한 근심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세상일로 근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이 세상에서 환경이 바뀌고 사건이 터지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우리의 마음이 영향을 받아서 주 바깥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근심하십니다. 우리가 주어진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고 극복하겠다는 마음을 먹을 때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제쳐놓고 문제를 향하게 됩니다. 문제에 치중하고 세상일들에 빨려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주 안에 머물지 못하고 주 바깥으로 튕겨 나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에바브로디도를 죽을병에 걸리게 하셔서 주 안에 있는 형제들에게 근심을 더하게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에바브리디도는 빌립보 교회가 맡긴 후원금을 사도 바울에게 전하고, 사도 바울의 사역을 돕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아신다면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문제는 에바브로디도에게만 국한된 어려움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에서의 사역 중에 많은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까지도 살리는 역사를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을 돕겠다고 불원천리 로마까지 찾아온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는 전혀 치유의 역사를 행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사도 바울이 행한 기적들은 사도 바울이 가진 능력에서 나오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병을 고치고 죽은 사람까지 살렸던 모든 순간은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에서 이루어진 일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하늘과 연결되는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 세계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구원의 그리스도로 전하기 위한 방편으로 하늘로부터 주어진 능력이었습니다.

한편 에바브로디도는 이미 주 안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서 죽을병에 걸리도록 하신 것이기에 사도 바울이 임의로 능력을 발휘해 고칠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마음이 주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근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은 에바브로디도가 죽을병에 걸린 상황에서 마음이 주 밖으로 나가지는 않을지 근심했습니다. 그랬던 에바브로디도가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본래 디모데를 보내기로 했으나 빌립보 교인들의 마음을 염두에 두고 에바브로디도를 먼저 돌려보내기로 합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었을 때뿐만 아니라 회복된 후에도 그의 마음이 굳건히 주 안에 머물렀으니, 이제 건강하게 돌아가는 에바브로디도를 보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 안에 머물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 주 바깥으로 나가게 되는 경우에는 몸으로 만나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유혹이 주어집니다. 몸이 어려움을 당할 때 마음이 문제에 쏠리게 되면서 주 바깥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유혹은 주어진 일이 순조로울 때도 주어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경계심을 풀자 마음에 세상이 스며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 안에 마음이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형제들을 향해서 갖게 되는 근심의 이유입니다.

다만 이렇게 주 안에서 생겨난 근심은 특이하게도 내 영혼을 썩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기쁨과 평강의 근원이신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에 더욱 더 깊이 들어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측근이 되어서 형제들에 대해 근심하는 가운데서도 마음의 평강은 커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 역사상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최대 측근이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류에 대한 근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동일하게 인류에 대한 근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렇기에 인류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함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형제를 향한 근심이고, 형제 때문에 느끼는 기쁨입니다. 형제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모습이 나의 기쁨이 됩니다. 또 형제가 유혹을 받아 항상 기뻐하지 못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지 못하고, 범사에 감사하지 못할까 근심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최대 측근이실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근심하시고 걱정하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근심을 받아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구원의 길을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감히 인류를 근심하는 일은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주변의 형제들에 대해서는 근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 안에 머무는 것은 동일하나 몸이 당하는 처지는 서로 다릅니다. 나와는 다른 처지에 있는 형제가 순조로움 속에 있든지, 어려움 속에 있든지 주 바깥으로 나가지 않기를 근심하는 마음이 나를 점점 더 하나님의 깊은 측근으로 만들어갑니다.

 

최근에 서로 다른 입장에서 두 번의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이신 여성 두 분과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봄방학이 없어져서 1월에 방학을 시작해서 개학할 때까지 방학이 진행된다고 합니다. 한 학기 내내 학생들을 가르치고 업무에 시달리다가 방학이 시작되었는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휴가를 허락하신다는 믿음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휴양지를 중심으로 관광을 하는 외국회사가 관장하는 휴양코스를 계획하셨다고 합니다. 또 다른 분과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암으로 투병 중이십니다. 집을 떠나서 그동안 알아보았던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요양소에 한 달간 들어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두 경우를 대하면서 제 마음에 순조로움에 대한 근심과 어려움에 대한 근심이 생겼습니다. 유명한 휴양지에서 일주일 머무는 동안 다채로운 편의를 제공 받고 아름다운 풍경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마주하면서 주 안에 있던 마음이 휴양지에 스며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근심입니다. 또 요양소에 들어가시는 분께서는 그곳에서 한 달을 지내는 동안에 몸의 아픔과 변화된 환경에 의해서 마음이 치중되고 쏠리지는 않을지 근심이 생겨서 기도드리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 마음이 모여 있는 교인들이자 형제들이고 하늘 가족들이며 십자가 식구들입니다. 식구(食口)라는 말이 같은 솥의 밥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듯 우리는 같은 주님의 죽음을 먹고, 아버지의 좋음을 먹고, 성령님을 먹는 식구들입니다. 세상 환경이 재정적으로 어렵든, 몸이 아파서 어렵든, 자녀의 문제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모르면 어쩔 수 없거니와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주 안에서 근심할 수 있습니다. 형제의 마음이 주 안에 머물지 않고 주 바깥으로 나가게 되는 일을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 근심은 이미 하나님 아버지와 주님과 성령님이 우리를 향하고 계시는 근심이고,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에 가담할 수 있는 근심입니다.

이제 아름다운 장소로 휴양을 떠나시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휴양지의 아름다움이 무색할 정도로 하나님으로 인해 좋은 마음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요양소에 들어가시는 형제님도 계십니다. 그분께서도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이 능히 육체의 암이라는 모든 고통과 걱정과 근심을 뛰어넘기를 바랍니다. 그 요양소에서 남다른 모습으로, 스데반 집사님처럼 얼굴에서 빛이 나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빛의 자녀이자 하나님을 본받은 아들로서의 모습을 드러내는 기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근심은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저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형제를 향해 근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를 위해서도 제 마음이 한시도 주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없도록 기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저를 보실 때에 저 또한 죄인으로서 근심으로 바라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을 위해 빌립보 교인들이 근심했던 것과 같습니다.

나 자신과 관계되는 일에서 근심은 금물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 있기에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만 다른 형제들을 향해서는 항상 기쁨이 멈춰지고, 쉬지 않는 기도가 중단되고, 범사에 감사가 멈출까 염려하며 근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어떤 처지와 상황에 처해있든지 항상 주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설령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라 할지라도 말씀을 공유하는 입장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근심어린 마음으로 서로 기도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점점 더 하나님의 측근의 자리로 깊이깊이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해서는 항상 기쁨과 쉬지 않는 기도와 범사에 감사 이외에는 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형제들을 향해서는 하나님과 같은 마음이 되어서 항상 기쁨과 쉬지 않는 기도와 범사에 감사가 중단되지 않도록 근심하는 기도를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